Max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
카를 마르크스,에밀 뒤르켐과 함께 사회학의 삼대장이자 최종보스
1 개요
독일의 사회학자 겸 철학자 겸 정치학자 겸 법학자이며, 사회과학 역사상 유례없는 먼치킨이자 넘사벽급 입지에 서 있는 인물.이길 수가 없다 베버느님 사실상 카를 마르크스 다음으로 유명한 사회과학자이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냉전 이후 상당히 축소된 지금은 세계 정치 및 사회학계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1889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박사학위 논문 "중세 상사회사 서설"을 심사한 사람이 바로 로마사로 유명한 테오도르 몸젠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학위신청자가 자신의 논문에 관해 제시한 3개의 논점에 대해 다른 학자들과 신청자가 토론을 벌여야 했다. 로마사 분야의 최고권위자인 몸젠은 베버가 '식민도시colonia'와 '도시municipium'에 대해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베버의 의견에 물음을 제기했으나, 얼마간의 토론 이후 '베버의 논제가 옳다는 것에 승복하진 않지만 이 수험자의 앞날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고 말하며 토론을 끝마쳤고 베버의 박사학위논문심사는 그렇게 통과되었다. 이후 베버는 몸젠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로마사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한다.
3 그의 이론
막스 베버는 사회를 실재가 아닌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사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중시한 것은 사회(집단)의 현상이 아닌 구성원(개인)의 행위이다.[1]
- 행위는 행동과 구분되는 용어로 쓰인다. 즉, 개인의 행동이 주관적이고 특정한 의도와 의미를 가지게 될 때 그것은 행동이 아닌 행위라는 뜻이다.
- 결국 사회학적 분석이라는 것은, 바로 그 주관적 의미를 지닌 행위를 설명함으로써 성립된다고 믿었다.
- 당사자(사회 구성원)의 행위가 합리적(당시의 기준을 근거로)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그것을 다시 '이념형(ideal type)'이라는 것으로 구분해 총 4가지의 행위 유형을 만들었다.
- 목적합리적 행위 : 개인은 행위 자체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평가한다. 내가 시험을 잘 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공부를 평소 열심히 하는 것도 있고, 벼락치기를 하는 것도 있고, 커닝을 하는 것도 있다. 개인은 이러한 여러 수단으로서의 행위 중에서 어떤 게 더 나은지 저울질을 하게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 가치합리적 행위 : 물리적이고 세속적인 목적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을 중시한다. "기독교인은 올바르게 행하고, 결과는 하나님 뜻에 맡긴다"라는 말은 비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독실한 기독교인은 이 가치관을 바탕으로 일관적인 행동을 취해 목적합리적 행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정서적 행위 : 행위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행위 자체를 위한 행위로서 동작한다. 이것은 가치합리적 행위와 유사하나, 이 경우 그 행동을 지배하는 명확한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런 생산성 없는 놀이나 오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 전통적 행위 : 아무 생각 없이 평소 하는 짓 그대로 하는 걸 말한다.
위의 이념형을 기반으로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저술하였다. 그에 의하면 당시 자본가들의 자본주의 행위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목적합리적 행위이나, 그 근간에는 가치합리적 행위를 두고 있다[2] . 즉 그들의 자본주의 행위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있는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청교도)적 윤리관[3]하에서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낭비하거나 향락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이를 근대 자본주의 정신ethos이라 함).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종교적인 윤리관이 매우 깊게 박혀 있는 현상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특이하다.
베버는 현대사회에서 목적합리적 행위가 갈수록 더 중요시되어, 끝내 가치합리적 행위없이 목적합리적 행위만으로 합리성이 '굴러가는' 것을 경계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사람이 이윤추구(목적합리적 행위)를 하는 목적은 인간이 '잘살기' 위해서(가치합리적 행위)인데, 이윤추구만 내세우다 보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등의 질문들이 정작 파괴되기 때문이다. 가치합리적 행위 없이 목적합리적 행위만으로 합리성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통 Iron Cage, '쇠우리'라고 번역한다(파슨스의 번역). 이 번역을 통한 해석으로 베버가 현대사회를 암울하게 봤다는 것이 존재하나, 다른 한편으로 베버가 현대사회를 암울하게 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강철외피', '강철 껍데기'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합리성이 '굴러가는' 데에 있어서 강철구의 겉은 목적합리적 행위지만, 가치합리적 행위인 그 강철구의 내용물이 비어있다는 것이다. 즉 파슨스의 번역에서 현대인은 '쇠우리'에 갇혀 절망에 빠진다는 뉘앙스를 갖지만, '강철외피', '강철 껍데기'라는 번역에서는 그 시대의 현대인들이 그 강철구의 가치합리적 행위의 내용물을 새롭게 채워나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베버가 현대사회를 그렇게 암울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베버는 미국 방문 당시, 발전하던 미국을 합리성의 첨단이라고 여기고 들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