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사회학
社會學
Sociology

1 개요

참고. 성균관대 사회학과-사회학이란
사회학은 사회,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써의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회발생, 사회구조, 사회구성, 계급, 계층, 가족, 사회문제, 일탈행위, 의사결정 등 인간 사이의 관계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다루는 범위가 넓다. 정치, 경제, 심리 등 사회과학 전체를 아우르는 대명사로 보아도 무방하다. 벌거벗은 아기 두 명이 있으면 사회가 성립해 버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표류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1] 그래서 웬만한 어휘는 그걸 '사회학' 앞에다 갖다 붙이기만 하면 '○○사회학'이라는 사회학의 분과학문이 성립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거시적 관점은 초기 사회학 이론이 제창되던 시점부터 사회학 이론의 주류로서 자리잡아왔으며, 이와 반대되는 성격을 지닌 개인의 상호작용 및 현상학적 사회학이론은 20세기 초중반부터 조명받기 시작하여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러한 거시적 이론과 미시적 이론을 통합하려는 시도[2]가 계속되고 있다.

보통 사회과학 분야에서 경제학, 정치학과 함께 사회과학의 토대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존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학이 사회과학과 동의어인 줄 아는 경우도 있다. 인문학이 인문과학과 동의어라서 헷갈리는 모양.

사회학자들은 일반적인 사회 통념에 반기를 드는 일을 좋아한다. 당연하지만 사회학과생이라고 해서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마르크스가 사회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학의 전부는 아니다. 당장 "사회주의라도 쇠우리(iron cage)행을 피할 순 없으셈 ('ㅅ')"이라고 지적한 사회학 양대산맥의 다른 축 막스 베버도 있고. 사회학은 사실 한때 강경한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이른바 "부르주아 학문"이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었다.

2 사회학의 출현 배경

사회학의 역사는 의외로 짧은 편으로, 본격적인 출발은 18세기 후반 유럽에 두고 있다.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이,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여 그 여파가 유럽을 비롯해 전세계를 휩쓸었고, 그 위력은 가히 수천 년을 이어 오던 전통적인 사회를 통째로 뒤엎을 정도의 것이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소요와 불안정, 정치 및 경제와 생활 기반 변화를 새롭게 이해할 학문의 등장이 절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혁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15세기부터 시작된 과학 발전을 비롯한 통칭 르네상스에서 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세계 패권을 쥐고 있던 유럽의 실질적인 캡짱이었던 기독교[3]의 세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동시에 갈릴레오와 뉴턴 등의 과학자들의 작업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그 이전까지 자연과학=신학으로서 이루어지던 연구가(신본주의) 스폰서인 교회의 경영 부진으로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했다.

자연과학이 본격적으로 신학과 떨어져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인간관도 바뀌게 되는데, 인간은 이성이라는 게 있는 생물이니까, 본능에 충실한 다른 자연 존재와는 다르다능! 인식이었다. 체계적 지식의 정리를 목적으로 하던 계몽주의와 융합하게 되고 이성을 중심으로 모든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인본주의가 발생하였다. 계몽주의는 기존의 가치규범과 정치를 비롯한 세계관을 모두 부정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얻었고,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사회학(Sociology)이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된건,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가 자기의 책 실증 철학강의를 쓰면서부터 생기게 되었다.[4]

2.1 계몽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

계몽주의는 인간의 진보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부르짖었으나, 계몽주의가 휩쓸고 간 18, 19세기 유럽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기존 정치와 경제 시스템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발생한 갈등과 빈곤과 위험 요소는 오히려 사회의 무질서를 불러왔다. 어찌나 상황이 개판으로 돌아갔냐 하면, 가히 현실도피에 가까운 낭만주의가 등장했을 정도다.

낭만주의가 아니어도, 이럴 바에는 그냥 과거 왕정 시대로 돌아가는 게 낫지 하는 주장도 생겨났는데 이게 보수주의이다. 계몽주의는 기존 사회를 구성하던 제도인 종교(정치)와 가족의 축소를 주장했는데, 이는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통제 불능의 극단적 개인주의(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로도 이어지는데,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경계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또한 비합리성이 사회 안정에 미치는 긍정적 역할을 성토하였는데 이는 계몽주의자들의 합리주의, 즉 종교와 전통과 같은 비합리적 요소를 배척하자는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는 구성원들간의 위계질서와 의무와 집합을 위한 이익을 강조하였다. 한마디로 계몽주의가 개인들끼리 알아서 잘 사세요였다면 보수주의는 사회가 잘 돼야 개인이 잘 되지!라는 논리였으며, 이는 사회≠개인과 개인의 총합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더불어 이러한 전체로서의 사회라는 개념은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으로, 이를 거쳐 사회주의라는 용어도 발생하였으며, 계몽주의를 비롯한 진보측에서도 그러한 개념의 사회(해석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다)라는 용어를 차용해 쓰기 시작했다. 사회학은 바로 이 사회라는 개념을 확실히 하기 위한 학문이다.

2.2 근대적 의미로서의 사회

Modern Society 즉 근대 사회는 사람들의 집합체로서의 기존의 사회와는 차별성을 가지는데, 이는 앞서 설명한 산업 혁명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5] 과거에는 국가(정치 및 종교=지배자)와 국민(가족과 개인=피지배자)의 위계적 이원론적 구분으로 사회를 정의했으나, 근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지배자로서의 국가 및 종교의 권력이 약화되고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여, 얘들은 어디로 넣어야 되지?라는 의문점이 생기고 만 것이다.[6] 결국 국가도 아니고 국민이라 하기도 뭐한 제 3의 집합체=사회가 발생하면서 근대 사회의 의미는 과거의 것과 차별화 될 필요가 있었다.

3 역사와 개념

사회학은 서양에서 근대화가 나타나게 되면서 태동한 학문이다. 이 용어를 처음 제시한 게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오귀스트 콩트를 사회학의 아버지로 삼는 것이 학계의 대세이다.

3.1 초기 사회학(18세기 말~19세기 초)

주요 학자들로서는 생시몽, 콩트, 스펜서를 꼽는다. 이들은 모두 프랑스 혁명 당시와 직후에 활동했던 인물들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닌 프랑스 혁명의 참상을 실제로 목격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도, 혁명이 가져온 변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했다. 이제 정부와 정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인간사회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당하고 변하는 입장에 놓였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정치, 즉 국가를 움직이는 사회는 어떤 원리에 따르는가를 정의하게 되었다.

3.1.1 초기 사회학의 공통적 특징

  • 사회의 진화를 정치 변화의 전제로 삼고 있으므로 산업 사회의 정치와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고 시대착오적 보수주의[7]를 비난했다. 유기체로서의 사회의 중요성을 내세웠기 때문에 보수주의에 가깝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 보수주의는 진보주의(=개인주의, 자본주의)의 반명제로서 사회성을 강조한 사회주의로 발전되었다. 사회성을 강조하는 초기 사회학 또한 사회주의로 인식될 수 있으나, 초기 사회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맹점에 대한 비판 선에서 멈추었고 계급 투쟁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일단 구성된 사회를 뒤엎으려는 폭력적 시도에 대한 우려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그래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무진장 씹힌다.
  • 초기 사회학자들의 작업은 거시적인 선, 즉 가이드 라인 제시 정도에 그치고 아직 미시적인 분석에는 이르지 못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초기 사회학은 고전 사회학으로 이행하게 된다.

3.2 고전 사회학(19세기 말~20세기 초)

19세기 말부터 영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지지하던 초기 사회학과는 다른 고전 사회학이 등장하였다. 초기 사회학은 전술한 바대로 사회의 역사적 법칙 규명에 주력한 반면, 고전 사회학은 (어떤 문제가 있든지간에)사회의 근본이 된 자본주의의 생산관계, 즉 노동력과 관련된 제도 및 이데올로기의 총체로서의 사회를 깊게 파고드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이 단계에서 과거에는 뭉뚱그려 다뤄졌던 사회와 경제가 더욱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 시기의 사회학자는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를 들 수 있으며,[8] 이외에 미드쿨리 등에 의한 상징적 상호작용론이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지멜, 베블런, 파레토가 비슷한 시대의 학자이며, 한 세대 뒤의 학자로 만하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3.3 현대 사회학

현대 사회학의 역사적 기준을 잡는 데에는 모호한 점이 많은데, 대개 파슨스(1902~1979)의 사회 체계(Social System) 이론과 AGIL 도식 이론 등장을 전후해서 분류한다. 2차 대전을 전후하여 거시적 - 사회 혹은 사회 체계가 개인(또는 개인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연구 - 사회분석과 미시적 - 개인의 행동체계가 사회를 어떻게 구성하는 지에 대한 연구 - 사회분석으로 나뉘게 된다. 부르디외, 푸코, 루만, 보드리야르 등이 이 시기에 속한다.

3.3.1 후기근대론

최근 사회학 분야에서 가장 각광받는 이론들, 주로 기든스, , 바우만 세 사람을 묶어서 후기근대론자들로 명명한다. 후기근대라는 말에서도 드러나지만 이들의 논지는 탈근대와 유사하면서도 사뭇 다른 입장을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근대와 다르게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거대서사로 설명될 수 없으며, 급속도의 변화와 빠르게 유동하는 정보들로 인해서 멈출 수 없이 달려가는 '저거너트(크리슈나의 수레)'와 같다. 이 과정에서 기든스, 벡은 성찰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9][10]이라는 말로 현대의 다양한 모습들을 설명한다. 즉 진보와 이성을 통해 달려왔던 근대성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위험사회의 모습, 유동하는 사회적 위기와 다시 대면하면서 발전을 꾀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과학의 발전은 원자력 발전이라는 효율적인 발전 수단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핵무기를 만들어냈으며, 핵무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원자력 발전이 만들어낸 폐기물과 안전 사고 등으로 인해서 거꾸로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렇듯 근대가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위기에 대응하며 변화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요 논지이다.

한편, 바우만은 근대적인 성찰성(modern reflexivity)을 근대성 프로젝트(project of modernity)의 핵심으로 짚어내는 데까지는 기든스나 벡의 논의와 유사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프로젝트의 실패를 지적하고, 새로이 탈근대로 나아가게 됨을 역설한다. 특히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즉 비판이론가들 중에서도 베냐민아도르노의 근대성 실패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때문에 근대성의 변화와 대응방안과 긍정적인 예상을 동반하는 전자들과 달리 이미 실패한 근대성을 빠르게 탈근대성으로 대체해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우선 기든스의 기획은 이 후기근대론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써 성찰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그리고 그의 근대 분석에서 특이한 점은 구조결정론과 행위자결정론의 절충인 구조화이론에 있다. 이를테면 이전 같은 경우에는 사회구조에 대한 지식이 일부에게만 주어져있어서 사회구조 일반이 행위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지식의 확산이 활발해져 구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행위자들은 행위양식을 바꾸게 되고 이것이 곧 그대로 사회구조의 변화로 이어져 급격한 사회변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급변하는 사회의 동학을 설명하는 한 축이 된다. 급진적으로 설명하자면, 근대성에 배태된 성찰성을 세심하게 그리고 민주적으로 발현시킴으로써 더 나은 사회로 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벡의 기획은 위험사회(Riskogesellschaft)와 Cosmopolitanism(세계주의 또는 세계시민주의)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현대 사회는 항상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인데, 특이한 것은 경제적 고위층일수록 위험에 대한 회피수단을 다양하게 제시함으로써 위험을 회피할 확률이 높아지지만 경제적 하위층일수록 회피수단의 종류가 협소해져 위험의 부담을 더 많이 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적인 위험(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위험, 예컨대 절대적인 자연재난)이 어떻게 불평등한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당장 일본의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동일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이 가장 피해를 보았을까? 아마 원자력이 점점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살던 삶의 터전을 쉽사리 버리고 갈 수 없는 경제적 하위층들이 아니었을까?

다만, 위험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위협'(danger)과 '위험'(risk)을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는 벡-루만 논쟁의 주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실질적으로 보통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사고나 재해 그 자체는 '위협'이며, 이를 사전에 인지하고 과학적, 정치적, 경제적 논의를 발생시키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바로 '위험사회'라고 한다. 상술된 얘기에도 나와 있지만, 근본적인 위협은 '전기의 부족'이며 이 때문에 재난적 '위험'을 감수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지었다가 재해와 사고를 통해 더 커다란 '위협'이 발생했고 그 자체로 앞으로 지속될 '위험'이며, 더불어 거주지를 떠나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위험'에도 노출된 것이다. 개념으로 요약하면 근대는 결국 '위협'에 대한 대처에 있어 '위험'을 매개로 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새로운 근대적 '위협'과 이에 따른 '위험'을 창출하는 자본주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벡의 설명이다.

기든스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지점이 이상의 설명에서 드러나는데, 벡에게 있어 근대성에 배태된 시스템은 성찰성이라기보다는 근대가 그 스스로 근대적 결과물에 직접 대면하게 되는 재귀성이다. 이를 해결하는 기재로서 비로소 '성찰성'을 등장시키면서 기든스 등의 논의와 합의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마지막으로 바우만의 기획은 유동사회(혹은 액체사회)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현대 사회는 고체처럼 손에 잡히는 근대적 기구들에서 탈피해서 점점 더 예측불가능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액체처럼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전술된 두 사상가와는 달리 명백하게 이는 근대성의 실패(failure of modernity 또는 failed project of modernity)로 설명된다. 이는 '성찰성'에 대해서 바우만의 해석이 정반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가장 대표적인 한 축으로 '개인화'(personalization 또는 individualization)[11]를 들 수 있는데, 벡이나 기든스의 경우 성찰적 개인들의 재합의가 사회의 재결속과 합의과정으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전망한 반면, 바우만은 개인화를 '제도 실패'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전술된 후쿠시마 논의로 설명하면, 재해와 '사고'의 책임 소재가 특정 개인 몇몇에 전가되고, 이후의 수습에 대한 책임과 노동 역시 개인들이 짊어지게 되므로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제도'가 실패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특히 법률적 책임의 문제에서 이토록 파편화된,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단어인 '유동하는' 사회의 정상화는 제도의 실패로 귀결된 근대성으로는 불가능하며 탈근대적으로 '공공성'의 회복어째 비판이론으로 시작해서 비판이론비판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복고주의??!!을 주장하게 된다. 이는 비판이론의 핵심 개념이었던 '공공으로부터의 해방'과 정반대의 결론이 되는데, 이것이 바우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된다. 왜냐하면 당연히 현대에 유지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공공성'이 아니라 바우만만의 탈근대적 '공공성'을 새로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우만에 대한 비판자들은 그의 공공성 개념이 별로 새롭지 않으며, 과거 비판이론들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해방의 대적자인 공공성과 뭐가 다르냐고 까고 있지만...

4 인접 학문과의 차이

서울대 사회학과의 FAQ

5 사회학과

6 한국 사회학의 역사

한국에 사회학이 들어오게 된것은 경성제국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후 대한민국만의 사회학이 펼쳐지게 된 건 한국의 사회학자 중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백 선생이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만들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후 제 2의 사회학과 개설은 다른 서울권 대학이 아닌 대구광역시에 자리하고 있는 경북대학교에서 열리게 되면서 한국 사회학이 시작되었다.

현재는 거의 모든 상위권 대학에는 사회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비록 인기가 엄청 많은 분야까진 아니지만, 다른 학문에 비해 매우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을 소재로 삼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낮으며 특유의 비판적 사고방식 때문에 은근히 마니아가 많다.

7 사회학의 분과

등등 여기에 적지 않은 여러 사회학 분과들도 엄청나게 많다. 그냥 아무 학문이든 간에 뒤에 '사회학'이란 단어만 붙이면 사회학이라고 부를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만큼 분과들이 엄청나게 많다.

8 사회학자

8.1 한국

  • 강정구 : 前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2001년 8월 17일 8·15 축전 때 만경대에 들러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라고 쓰면서 친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 강정한 : 연세대 사회학과 부교수, 서울대 수학과 학사, 시카고 대학 사회학 박사, 수리사회학, 경제사회학, 의료사회학, 전산사회학 분야에 있어서 세계적 수준의 교수들과 국내외 주요 학술지에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는 차세대 사회학자 중 한 명.
  • 김경동 :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한국사회학계에서 민속방법론으로는 원로이다.
  • 김경만 :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시카고 대학에서 멘델 유전학에 관한 과학 논쟁과 합의 형성과정에 대한 과학사회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90년대 이후로는 사회이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국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고 있다. 2009년 경암학술상(인문사회부문)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다. 저서로는 『Explaining Scientific Consensus』(1994), 『과학지식과 사회이론』(2004), 『Discourses on Liberation(담론과 해방)』(2005),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2015),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2015)이 있다.
  • 김두섭 : 한양대 사회학과 교수, 인구관련 분야 권위자, 세계인구학회 학술위원장, 한국인구학회 회장
  • 김문조 : 前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前 동아시아사회학회 회장, 한국의 지멜이라고 불린다. 수업이 매우 지루했다고 한다
  • 김태영 : 성균관대 SKK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스탠퍼드 대학 사회학 박사, 사회조직이론 특히 조직생태학 및 사회학적 제도주의 분야에 있어서 한국인 중 몇 안되는 세계적 수준의 학자.
  •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시민사회학 전공, 역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유명하다.
  • 노명우 :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버밍엄 학파의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 노진철 :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어쩌다보니 지도교수가 니클라스 루만(...)으로[13], 지역 환경 운동[14]과 더불어 위험 사회학 쪽에서 유명하다.
  • 류석춘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며 한동안 우편향 교과서 논쟁을 낳았던 교학사 교과서를 지지하는 등 대표적인 보수적 지식인이다.
  • 박길성 :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경제사회학 전공, 세계한류학회 회장
  • 박명규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장 재직중이며 대표적인 남북통일 전문가
  • 백승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페르낭 브로델 센터 출신의 세계체제론 전문가
  • 설동훈 :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이민과 다문화 정책 연구
  • 송호근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우파성향의 학자로 중앙일보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어서 다른 사회학 교수들에 비해 사회 현안에 대해 많은 목소리를 내는 편. 하지만 우파성향의 그조차도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는 '무정란 정치'라는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 신용하 :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독도학회장
  • 이건 :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 서울시립대 7대 총장
  • 이병훈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이상백 : 한국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학자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만들었으며, 한국사회학회를 만들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역시 여운형 선생과 함께 체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특히 농구에 대해서는 전문 서적도 집필하고 대한민국 1호 농구 국제심판으로 활약할 정도로 기여하기도 했다.
  • 이재열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위험과 재난의 사회학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사회학자이다. 참고로 사회학과에 진학한 계기가 굉장히 독특하다. 위에서 나오는 '사회학적 상상력' 한국판의 서문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시 서적을 사려고 책방에 갔다가, '사회학적 상상력'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읽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사회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 장용석 :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스탠퍼드 대학 사회학 박사 및 사회학적 제도주의 권위자인 존 마이어 (John W. Meyer) 제자, 거시조직 및 국가비교 연구에 있어서 국내 최고 전문가로 평가.
  • 전혜성 : 동암문화연구소 이사장, 문화인류학 전공, 예일대학교의 명망높은 인류학 연구소인 HRAF의 연구소장을 역임했다. 단, 미국에서 결혼할 경우에는 남성의 성을 따르는 관습을 그대로 적용한지라 그녀의 이름은 Hesung Koh 혹은 Hesung Chun Koh 등으로 표기된다.
  • 조대엽 :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사회학 전공. 진보적인 사회 의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 조영식 : 경희대학교 설립자. ‘잘살기운동’과 ‘밝은사회운동’, ‘인류평화운동’, ‘네오르네상스운동’을 제창하여 세계평화를 중심으로 한 사회활동으로 유명하다.
  • 조은 : 동국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 조한혜정 :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문화인류학 전공, 사회운동가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 조희연 : 前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2014년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된 그 인물 맞다. 사회학자이던 시기에는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에 대해 비판하는 논문을 쓰거나 좌파 진영 내에서 발생했던 논쟁들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관련하여 꽤 가치있는 연구들을 많이 남긴 인물, 정치인으로서의 평가와는 별개로 사회학자로서는 학계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인물이다.
  • 최재석 :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가족사회학 전공, 특히 한국가족사를 연구하여 조선 중기까지의 가족 구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면서 임나일본부설에 열을 제대로 받으셨는지 역으로 일본이 백제의 속국이라고 주장한다거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거부하는 것은 죄다 학계의 식민사학적 경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등 다소 환빠스러운 주장들을 하게 되신다. 그러나 잘 알려져있다시피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고고학적 증거나 다른 사료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신뢰할 근거가 없는 것이 맞으며, 일본에게 남아있는 문화적 영향만으로 일본을 백제의 속국으로 볼 필요도 없다. 최재석 교수 본인이 90살이 넘은 노학자로서 아마 일제 식민지의 경험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탓에 이런 민족주의적 편향을 보이는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삼국사기 기록도 취사선택을 하고, 중국사료는 아예 제대로 된 검증도 안 한다. 김현구문서 에서 최현석 논문거부사건을 보면 이분의 연구가 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 한상진 :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중민이론을 주장하여 변혁 주체로서의 한국 중산층의 개혁 성향을 이론화하였다.

8.2 외국

사회학의 삼대장

기능주의 패러다임

사회체계론

갈등론 패러다임

상징적 상호작용론 패러다임

교환이론 [17]

후기근대성론자

세계체제론

그 외

9 관련 항목

  1. 적어도 사회학의 연구대상은 상대방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인간의 모든 행위라 할수 있다. 즉 어떠한 사람의 행위를 해석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
  2. 앤서니 기든스, 피에르 부르디외 등의 이론이 대표적이다.
  3. 더 정확하게는 교황권을 비롯한 천주교를 말한다. 종교 개혁은 천주교의 입지를 위협하는 입장이었다.
  4. 오귀스트 콩트는 학문의 연구방법의 발전 단계로 신학적 단계 - 형이상학적 단계 - 실증적 단계를 제시하며, 사회학이야말로 인간사회 전반을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모든 학문의 최고위에 군림하는 이른바 '초과학(Super science)"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각종 수학적 방법을 도입하기 이전의 철학 수준에 머물러 있던, 스미스나 리카르도 등 당대 정치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시장'이나 '보이지 않는 손' 따위나 주장하는 실증적이지 않은 학문이라고 대차게 깠다. 그 결과는.....
  5. 따라서 이를 서구 사회에 한정된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한국의 전통 사회도 근본적으로 서구 사회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고 그 서구 사회가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서구 사회로서의 개념으로만 한정하기는 곤란하다.
  6. 계층이론에서는 부르주아는 중간계급으로 본다. 중간계급도 또 둘로 나눠서 근대 이전에도 존재했던 자영농이나 자영업 상인 등을 구중간 계급, 근대 이후에 새롭게 생겨난 사무직과 전문직 등을 신중간 계급이라고 한다.
  7. 보수주의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게 아니다. 전술한 바대로 진보주의의 후폭풍에 의해 보수주의가 나올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었다. 종류도 다양해서 반자본주의자들도 많았지만 잘 알려진 초기 사회학자들은 보수성을 띄는 동시에 어느 정도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편에 속했다.
  8. 동시대로 보지만, 나이 및 활동시기 순이다. 영향력으로 따지기 애매하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을 보통 사회학삼대장으로 묶는다. 학계 메타적으로 정반 양측에 끼친 영향력을 합치면 마르크스가 압도적이겠지만, 사회학 본연의 얘기만으로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범위를 좁히면 뒤르켐이 다른 둘을 앞서고, 현대사회학의 패러다임으로, 즉 주류 사회학의 계보학으로 따지면 베버리안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 그러나 다시 얘기하지만 오늘날의 베버리안은 뒤르케미안이면서 마르크시스트일 수도 있고, 안티-막시스트이면서 베버 크리틱일 수도 있다.
  9. 재귀적 근대성이라고도 한다.
  10. 주로 기든스 및 스콧 래시의 reflexive와 reflexivity를 '성찰적인'과 '성찰성'으로 번역하는 반면, 벡의 그것, 독일어로는 reflexive와 reflexivität을 번역할 경우 '재귀적인'과 '재귀성'으로 번역한다. 세 사람은 유사한 맥락에서 해당 단어를 사용했으나 세부적으로 미묘한 차이를 둔다. 당장 번역어 성찰과 재귀는 상호연관되어 있지만 동의어가 아니다.
  11. 두 개념 역시 미묘하게 다르지만 각각의 의미로 모두 근대성의 일환이다.
  12. 미국사회학회의 경우 이들이 모두 독립된 분과로 존재한다
  13. 덕택에 루만 번역서를 보면 빠질데 없이 '경북대 노진철 교수님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란 글을 볼수 있다(...) 심지어 오역많다고 한국 루만빠들이 많이 분노한 사회체계이론까지... 물론 지도교수님 책 번역본은 내신적이 없다. 그리고 레전드 답게 지도교수님을 영감으로 부르신다
  14. 박사학위 수료 논문이 "Oekologische" Problematik und gesellschaftliche Anpassung : aus der Sicht der Theorie selbstreferentieller Systeme, "생태" 문제와 사회 적응 : 자기 시스템의 이론의 관점에서니까 환경사회학 전공이라 볼수 있다. 물론 독일 답게 229페이지 써내셨고 책으로 나왔다
  15. 기능주의 패러다임의 기원은 뒤르켐으로 보지만 사회진화론을 언급한 그의 사상은 기능주의의 맥락에 닿아있다고 보고 있다.
  16. 기능주의의 관점에서 구조기능주의라는 거대이론을 창출해 내었다.
  17.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독립된 학파를 구성할 정도로 독특한 이론 체계를 구성했다.
  18. 감정사회학 권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