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Meuten
원어로는 사냥개 혹은 폭도를 뜻하는데, 대명사로 쓸 경우 나치 독일 시기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활동한 반체제 청소년 모임을 뜻한다. 아예 '라이프치히 모이텐(Leipziger Meuten)' 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1 개요와 활동
독일 서부에서 자생한 에델바이스 해적처럼 라이프치히의 모이텐도 주로 초등 교육만 마치고 바로 노동 일선으로 투입된 청소년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활동상도 대부분 에델바이스 해적과 일치했는데, 기본적으로 퇴근 후 공원이나 술집 등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주말에는 시 근교의 호숫가나 휴양지로 가서 유행가를 부르며 휴식을 만끽하는 친목 모임이었다.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분리되어 금욕을 강요받은 히틀러 유겐트나 독일 여성 연맹과 달리, 관제 단체가 아닌 자발적인 모임이었으므로 소년소녀 간의 교제도 거리낌 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쾌락주의에 주로 경도된 북독일의 스윙 청소년이나, 마찬가지로 쾌락주의 노선을 걷다가 나치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저항의 강도를 높여나갔던 에델바이스 해적과 달리, 나치 집권 이전에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었던 공산당의 레토릭을 일찌감치 자신들의 모임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의 좌파 공화군을 지지하거나 소련의 동향을 전하는 외국 방송을 몰래 엿들으면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서로 만나면 소련 공산당 전위대처럼 "준비 완료!(Seid bereit!)" 라는 문구로 인사를 대신했다.
라이프치히 게슈타포 지부가 정기적으로 상부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약 1500명의 청소년이 이 모임에 가담한 것으로 추산되었고, 모이는 지역에 따라 크게 클라인쇼허 지구의 훈데슈타르트(Hundestart), 린데나우 지구의 레퍼반(Reeperbahn)[1], 로이드니츠 지구의 릴(Lille)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2 나치의 탄압
물론 나치는 이들의 모임을 결코 방관하지 않았는데, 특히 자신들이 이미 쓸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던 '빨갱이식 언어와 사고' 가 청소년들에게 만연해 있다는 것에 충공깽을 느끼고 1938년 무렵부터 게슈타포를 동원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수괴로 지목된 청소년들은 형사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청소년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단순 가담자로 분류된 나머지 인원들도 법적 제재에서 삭발 등을 통한 공개적인 모욕, 엄중 경고 조치 등을 받았다.
이렇게 초기부터 철저하게 탄압했기 때문에 라이프치히 모이텐은 1939년 무렵 '공식적으로' 소멸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1942년 무렵에 기존의 모이텐과 다른 형태의 청소년 모임이 창궐했는데, 다만 대놓고 좌파적 사고관을 보여준 모이텐과 달리 스윙 청소년처럼 일부러 미국 스타일로 옷을 입고 다니고 나치가 금지한 미국의 스윙 재즈를 즐겨듣는 등의 일탈을 행했다. 이들은 자조적으로 자신들을 브로드웨이 갱스터(Broadway-Gangster)라고 칭했고, 모이텐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어오던 히틀러 유겐트와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 역시 게슈타포의 탄압을 받았다.
3 종전 후의 재평가
종전 후 주요 활동지가 동독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 빨리 이뤄졌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동독 집권당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과 정부는 정식 공산당원이었던 희생자들만 부각시켰을 뿐이었기 때문에 동서독 양측에서 20년 가까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오히려 재평가 작업이 빨랐던 것은 서독 쪽이었고, 1970년대 후반 무렵에 이들의 활동을 담은 사료를 연구한 논문과 저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좌파 성향이 강했고 다른 청소년 모임보다 일찍 사그라든 점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2차대전 직전에 일찌감치 나치의 독재에 대한 저항을 시도했다는 점 자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