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용사

NISI20131018_0008836661_web.jpg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비.

無名勇士. Unknown Soldier.

1 개요

전쟁에서 전사했으나 개인정보를 파악할 수 없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전쟁에선 전투 중에 일일히 주검을 수습하기가 쉽지 않고 수습해도 총상이나 열상 등으로 시체의 훼손이 심하여 누구인지 파악하는 게 어려울 때가 많다. 그 때문에 이들을 무명용사로 통칭하여 부른다. 행정적 차원에서 편하기도 하고 참전자들을 한 사람이도 빼놓으면 추도의 형평성 차원에서 문제가 생길 테니까. 그 때문에 대체로 전몰자를 추도하는 시설엔 무명용사를 위한 시설이 따로 있다. 세계 각국의 무명용사 추도 시설

행정 시스템이 낙후했던 지역에선 전쟁에 참전했고 무사히 돌아왔는데도 군적이 꼬이는 바람에 무명용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무명용사비에 실종자 이름을 새겨넣거나 그런 경우에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가기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중에 이런 경우가 간혹 있다.

또한 전시 상황에서 시신을 찾을 수 없는데 사망이 확실시되는 실종자도 무명용사로 처리한다. 그나마 대구경 화기를 얻어맞고 일부만 날아갔으면 어떻게든 신원확인을 할 수는 있겠지만 중포격 혹은 항공폭탄급 IED 공격에 휩쓸려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되거나 하면 결국 사망을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게 된다. 다만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전사로 분류되어 있기에 국립묘지에 시신은 없고 전사자 명단으로만 남은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여 그 이름이 새겨진 사람인데 묘지가 없다면 거의 대부분 포격 등에 휩쓸려 산산조각났거나, 가매장된 뒤 시신을 찾지 못했거나, 소수이지만 북한에 포로로 끌려간 뒤 거기서 비참하게 죽었거나 셋 중 하나다. 북한군 포로가 되었다면 포로교환 때 돌아오지 못한 이상 적대계층이 되므로 죽은거나 마찬가지라고 봐도 된다.[1]

1.1 불명예스러운 무명용사

위의 무명용사와는 전혀 다른 케이스로 전쟁 등에서 전쟁 범죄(살인, 강간 등)를 저지른 뒤 처형된 군인들의 묘가 있기도 하다. 프랑스의 페르앙타르드느와(fere en tardenois)에 위치한 우아즈에슨묘지(Oise-Aisne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에는 플롯 E(Plot E)라는 묘역이 있는데 전쟁 중에 살인, 강간, 학살 등의 죄를 지은 뒤 군법에 따라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된 미군이 묻힌 곳이다.[2]

800px-Plot_%22E%22%2C_Oise-Aisne_American_Cemetery.jpg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 학살. 민간인 임의처형 등 고의적 살인이나 전지강간 살인, 약탈치사 등으로 처형된 미군 94명이 묻힌 플롯 E. 처형된 미군들은 원래 처형지 근처에 묻혔으나 나중에 분위기가 좀 가라앉자 미군도 그건 너무하다 싶었는지 1949년에 이들의 유골을 수거하여 이곳으로 옮겨 정식 장례절차를 밟아 매장했다. 다만 이들의 군적이 소멸됐기 때문에 무명용사로 처리했지 신원은 2009년에 공개되었다. 이곳의 유골들은 유족이 요구해도 옮겨갈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전쟁 범죄자들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이들의 혐의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의 우아즈에슨묘지 플롯 E 항목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대부분이 강간살인이다. 대부분 피해자가 1명이지만 증거 은폐를 위해 다른 가족이나 친구까지 살해한 경우도 있었고, 희생자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나왔다.

- 어니스트 리 클락 상병, 어거스틴 M 구에라 일병 : 15살 소녀를 집단강간하고 살해
- 윌리엄 해리슨 일병 : 7세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
- 로버트 L 피어슨 상병 : 75세 노인을 강간하고 살해
- 블레이크 W 마리아노 일병 : 20대와 50대의 두 여성을 강간. 이외 최소 한 명을 총으로 살해.[3]
- 로버트 L 스키너 : 9세 여아를 강간하고 살해. 여아와 함께 있던 다른 남성도 살해[4]

유럽에서의 전쟁 기간이 고작 1년도 안 되었음을 감안하면 미군의 규모를 생각해도 상당히 많은 사형이 이뤄진 셈인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전쟁이 길어지면서 초기 자원입대자가 아닌 강제징집병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5] 이 과정에서 질 나쁜 병사들도 대거 전장에 배속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흉악범은 아니지만 탈영죄로 처형된 에디 슬로빅도 원래라면 징집이 되지 말아야 했는데도 워낙 전쟁이 길어지니까 입대 영장이 날아온 경우였던 것. 따라서 미군에도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럽 지역의 민심이 전쟁 이후에도 중요한데다 어설프게 처리하면 나치 독일이나 소련이 그걸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에 미군으로서는 이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 원래는 95명이었다. 에디 슬로빅(Eddie Slovik)만이 살인이나 강간이 아닌 탈영죄로 처형됐는데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흉악범이 아님을 감안하여 그의 유족들이 유골을 미국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였다. 위키백과 에디 슬로빅 탈영병이 왜 위키백과에 있냐면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 탈영한 군인은 2만 1천명에 이르고 49명이 총살형 판결을 받았지만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오직 탈영만으로 사형을 당한 건 이 사람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1. 아주 희귀한 경우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전사 처리되었으나 사실 포로가 되어 북한에 생존해있던 노인이 탈북하여 돌아온 사례도 있다.
  2. 전쟁 중에 범죄를 저질렀는데 전쟁이 끝나고 판결이 난 경우는 추가바람.
  3. 위키피디아 해당 항목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두 명에 대한 강간은 확인됐지만 살인이 문제인데, 41세의 누가 살해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살해하는 걸 목격한 것인지, 아니면 강간 피해 여성을 살해한 것인지가 확실치 않다. 다만 살인까지 저지른 게 아니면 집단항명 등의 중죄가 아닌 한 사형집행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았다는 점에서 미군 당국이 군법재판에서 그를 살인죄로 다룬 것은 확실하다.
  4. 남자 친구라고 되어 있음.
  5. 태평양 전선의 경우 자원입대가 원칙이던 해병대가 전장의 주축이 되고 육군도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현지인들과의 접촉도 드물었기에 그렇게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