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고궁

(묵던에서 넘어옴)

瀋陽故宮, Mukden Palace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한글베이징과 선양의 명·청 시대 황궁[1]
영어[2]
프랑스어[3]
국가·위치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선양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1987년, 2004년(확장)
등재기준(i)[4], (ii)[5], (iii)[6], (iv)[7]
지정번호439bis

1 개요

중국 랴오닝 성 선양 시내에 있는 궁궐이다. 후금 때는 정궁이었다가 청나라 때는 별궁으로 사용되었고, 1924년 이래 궁전의 기능을 상실한 뒤 동3성박물관(東三省博物館)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개방했다가 1955년 선양고궁박물관(瀋陽故宮博物館), 1986년 선양고궁박물원(瀋陽故宮博物館院)으로 개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기존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던 자금성과 함께 2004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면적은 자금성의 12분의 1 크기로 아담한 편(…).

2 이름의 유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선양고궁의 영어명은 'Shenyang Palace'이 아니라 'Mukden Palace'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선양이라는 도시의 역사상 명칭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명나라 때의 심양(瀋陽)은 후금이 점령한 후 수도로 삼고 만주어 묵던(Mukden)으로 개칭했다가 이걸 다시 중국식으로 바꾸어 성경(盛京)이 되었는데, 성경고궁을 영어식으로 읽어 '묵던 팰리스'가 된 것.

3 역사

3.1 입관 전

1625년(천명 10) 누르하치는 수도인 허투알라(興京, 흥경)에서 선양으로 천도하여 성내 중심에 궁전[8]을 짓기 시작했다. 1626년(천명 11)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청태종이 즉위한 뒤 1631년(천총 5)부터 5년 동안 궁전을 개건했다. 1636년(숭덕 1) 청태종은 공사가 끝난 선양고궁을 정궁으로 삼아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개칭했다.

3.2 입관 후

하지만 청나라가 산해관을 통과해 중국을 지배하게 된 뒤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자금성을 정궁으로 삼으면서 선양고궁은 정궁에서 행궁(行宮)으로 지위가 낮아져 강희제건륭제가 지방을 순행할 때 머무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780년(건륭 46) 건륭제는 1773년(건륭 38)에 완성한 <사고전서>를 보관하기 위해 자금성의 문연각을 본떠 선양고궁의 서로(西路)에 문소각을 신축했다.

3.3 중화민국

1912년 신해혁명으로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중화민국 정부와 청 황실 사이에 체결된 '청황실우대조항'에 따라 선양고궁은 자금성 기타 다른 궁전들과 함께 중화민국의 보호를 받는 청 황실 소유의 재산이 되었다. 하지만 1924년 장훈이 일으킨 정사복벽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선통제는 자금성에서 쫓겨났고 청황실우대조항도 폐기되어 선양고궁도 중화민국 정부의 재산으로 바뀌었다. 1926년부터는 박물관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는데 동3성박물관(東三省博物館), 펑톈고궁박물원(奉天故宮博物院), 국립선양박물원(國立瀋陽博物院) 등으로 개칭되었다.

3.4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5년 선양고궁박물관(瀋陽故宮博物院)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1986년 명칭을 선양고궁박물원(瀋陽故宮博物館院)으로 바꿨다. 그리고 기존에 지정되었던 자금성에 추가되어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4 주요 건축

4.1 동로(東路)

사진설명
대정전(大政殿)
선양고궁의 정전이자 동로의 중심 건물로 처음 건설되었을 때의 명칭은 대전(大殿)이었으나 1636년(숭덕 1) 독공전(篤恭殿), 강희제 때 대정전으로 개칭했다. 팔각형으로 된 특이한 구조라서 언뜻 보면 정자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정전이다. 유목민의 이동식 텐트를 본떠 지었다고. 황색 유리기와로 지붕이 덮여 있으며 정면의 두 기둥에는 금도금한 용조각이 감겨 있다. 누르하치, 청태종, 순치제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심양택시, 갖가지 조형물에도 나오는 한 도시의 상징.
십왕정(十王亭)
길이 195m, 너비 80m의 대정전 광장 양쪽 좌우에 있는 열 채의 전각. 동쪽에는 좌익왕정(左翼王亭)·양황기정(鑲黄旗亭)·정백기정(正白旗亭)·양백기정(鑲白旗亭)·정람기정(正藍旗亭)이, 서쪽에는 우익왕정(右翼王亭)·정황기정(正黄旗亭)·정홍기정(正紅旗亭)·양홍기정(鑲紅旗亭)·양람기정(鑲藍旗亭)이 있다. 좌익왕과 우익왕, 팔기의 집무실로 사용된 공간이었다.

4.2 중로(中路)

사진설명
대청문(大淸門)
선양고궁의 정문으로, 오조문(午朝門)이라고도 부른다. 황색의 유리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이 출입에 사용되었다.
숭정전(崇政殿)
청태종이 사신을 접견하던 장소였으며 청나라 역대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양고궁에 머물 때 이곳에서 정사를 돌봤다. 정면 5칸이며 전각 바깥의 정원 좌우에 비룡각(飛龍閣)과 상봉각(翔鳳閣) 7칸이 있다.
봉황루(鳳凰樓)
원래 이름은 상봉루(翔鳳樓)였으며, 청녕궁 내원의 문루이다. 3층으로 되어 있으며 선양고궁에서 가장 높은 전각이다. 입관 전에는 황제가 주연을 베풀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입관 후에는 실록·옥첩·어진·옥새 등을 보관하던 공간이 되었다.
청녕궁(淸寧宮)
원래 이름은 정궁(正宮)이었으며 청태종이 즉위하기 전에 왕부(王府)가 있던 자리였다. 청녕궁에는 청태종과 황후가, 부속전각인 관저궁(關雎宮)·인지궁(麟趾宮)·연경궁(衍慶宮)·영복궁(永福宮)은 청태종의 후궁과 궁녀들이 거처했는데 이 중 영복궁에서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 1613.3.28~1688.1.27)가 살면서 순치제를 낳았다.
동소(東所)
1756년(건륭 11)에 지어졌으며 이화전(頤和殿)·개지궁(介祉宮)·아가소(阿哥所)·경전각(敬典閣) 등의 건물이 포함되어 있다. 황제가 선양을 순행할 때 황태후와 미성년 황자들의 거처로 사용했다.
서소(西所)
동소와 같은 시기인 1756년(건륭 11)에 지어졌으며 적광전(迪光殿)·보극궁(保極宮)·계사재(繼思齋)·숭모각(崇謨閣) 등의 건물이 포함되어 있다. 황제가 선양을 순행할 때 황제와 후비들의 거처로 사용했다.
태묘(太廟)
정면 3칸의 전각. 원래는 도교 건축인 경우궁(景佑宮)이었으나 1778년(건륭 43)에 선양의 태묘를 여기로 옮기고 청 황실의 선조인 조조(肇祖)·흥조(興祖)·경조(景祖)·현조(顯祖)의 신위를 모셨다. 동서 양쪽에 배전 3칸이 있다.

4.3 서로(西路)

사진설명
문소각(文溯閣)
사고전서를 보관하기 위해 1781년(건륭 46)에 세워진 정면 6칸의 전각이다. 자금성의 문연각(文淵閣)을 본떠 지은 북4각[9]과 남3각[10] 중 하나이다.

5 같이보기

  1. 2004년 선양고궁이 추가되어 세계유산목록에는 이 명칭으로 등재되어 있다.
  2. Imperial Palaces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n Beijing and Shenyang
  3. Palais impériaux des dynasties Ming et Qing à Beijing et à Shenyang
  4.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5.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6.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7.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8. 현재의 대정전과 십왕정.
  9. 문연각, 문원각(文源閣), 문진각(文津閣), 문소각
  10. 문종각(文宗閣), 문회각(文匯閣), 문란각(文瀾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