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륵 신앙이란 미륵불을 주불로 하는 불교 신앙을 말한다. 미륵불에 의해 모순된 세상이 바른 세상이 된다는 점 때문에 주로 사회가 혼란할 때 많이 유행하였다.
극동 지역에 미륵신앙이 처음 전파된 것은 4세기 미륵을 주불로 하는 법상종이 중국에 전래되면서부터이며, 미륵 신앙은 크게 미륵상생 신앙(미륵이 있는 도솔천에서 환생하고 싶다는 신앙)과 미륵하생 신앙(미륵이 현세에 강림하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나뉜다.
2 한국의 미륵신앙
우리나라에서서는 하생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데 특히 세상이 혼란할 때 현실 도피적인 성향으로 미륵 신앙이 크게 흥했다.
우리 나라, 특히 백제 지역에서는 천신 신앙/용신 신앙 등 토착신앙과 결합/흡수하어 인간의 복과 풍요, 그 중에서도 특히 농업적인 이익에 크게 영향을 주는 성격이 두드려졌다. 때문에 <삼국유사>에 실린 미륵 관련 설화들이나, 현재까지 남은 민담들을 보면 돌미륵이 호수에서 솟구쳤다거나, 미륵불을 모시는 사찰을 지을 때 호수나 늪을 메워 만들었다던가 하는 창건설화나 미륵님께 기도를 올리니 좋은 일이 생겼다 등의 기복적 설화도 이런 영향이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미륵하생신앙이 널리 유행했는데, 왕즉불사상과 연계하여 앞으로 올 부처=왕이 누구냐가 중요해졌고 미륵신앙의 유행으로 선덕여왕이 즉위했다. 또한 어느 나라에 미륵이 내려오느냐를 두고 삼국 사이에서 쟁탈전이 발생했다.56억 7천만년 뒤면 그냥 안 내려온다는거 아닐까[1] 선화공주의 미륵사 창건 설화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선덕여왕이 미륵불의 현신으로 여겨지면서 미륵이 점차 여성화되어 가기 시작하는데,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선덕여왕의 자화상적인 작품이라는 설도 있으나 출토 지역 논란 때문에 확정짓기에는 애매하여 정설은 아직 없다.
통일신라 때는 정치의 안정과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한 정토신앙이 유행하면서 조금 주춤하다가 신라 말기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다시 미륵신앙이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궁예가 이 미륵신앙을 기초로 하여 후고구려를 건설하였으나 잦은 실정과 명대사의 남발로불심으로 대동단결 왕건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 고려가 건국된다. 견훤을 비롯한 다른 호족들 역시 미륵신앙을 많이 이용하였고, 그 영향으로 고려시대에는 거대한 야외 석조 미륵불상이 유행하게 된다.
미륵 신앙은 고려 시대의 향도들의 매향[2]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 일본의 미륵신앙
일본에서는 오키나와 지역에 미륵신앙이 많이 발달하였다. 특히 이 지역에는 우리나라 창세가와 유사한 미륵-석가 경쟁담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의 창세가에서는 생쥐가 불의 근본과 물의 근본을 미륵불에게 알려주고 곡식 창고를 털 권한을 얻은 뒤 석가가 나타나 대결하지만, 오키나와 설화에서는 미륵과 석가의 대결 후 화난 미륵이 불의 근본을 숨기고 사라지자 메뚜기가 석가에게 불의 근본을 알려주자 이에 석가가 메뚜기에게 나뭇잎 위에서 편하게 죽을 권리를 준다.
4 중국의 미륵신앙
중국에서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포대화상 신앙이다. 포대화상은 당나라 때 실존인물로 법명은 계차(契此)이며, 뚱뚱한 몸매에 불룩 나온 배를 내밀고 등에는 큰 포대를 매고 항상 껄껄 웃고 다니며 사람들을 도와주었는데, 그를 미륵의 화신으로 추앙하면서 포대화상을 묘사한 불화나 불상을 만들고 복을 비는 신앙이 퍼졌다.
다른 형태는 백련교(白蓮敎)로, 본래 남송 때 승려 모자원(茅子元)이 창시한 진언종 종파인 백련종(白蓮宗)이 미륵신앙과의 결합과 원나라의 탄압을 겪으면서 반원적(청나라 때는 반청적) 비밀 종교단체가 되었다. 백련교 교파 중 하나인 팔괘교(八卦敎)가 훗날 의화단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