半跏思惟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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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px |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
공식명칭 | 한글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
한자 |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
영어 |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 ||
분류번호 | 국보 78호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
시설 | 1구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제작시기 | 신라, 6세기 중엽 |
410px |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
공식명칭 | 한글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
한자 |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
영어 |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 ||
분류번호 | 국보 83호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
시설 | 1구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제작시기 | 신라, 6세기 중엽 |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
공식명칭 | 한글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
한자 |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
영어 |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 ||
분류번호 | 국보 118호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리움미술관 |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
시설 | 1구 | ||
지정연도 | 1963년 3월 30일 | ||
제작시기 | 고구려, 6세기 후반 |
1 소개
기본적으로는 반가부좌를 틀고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상념에 잠긴 미륵보살을 표현한 모든 형태의 불교공예품을 가리키는 유물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해도 국보 78·83·118호, 보물 331·643호 등 여러 점이 있지만, 본 항목에서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영어로는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또는 그냥 간단히 Pensive Bodhisattva라고도 한다.
다만 이것이 미륵보살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누구냐 넌 일부 학자들은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고뇌하는 모습, 혹은 출가를 막 결심한 모습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하여 태자(太子)사유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이라는 설은 일본에서 비롯된 것인데, 정작 일본에는 관음보살 반가사유상도 있다! 현재는 미륵보살이라는 설이 가장 대중적이지는 하지만 일부 권위 있는 학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등 떡밥은 충분한 상태.
불상 전파에는 크게 두 가지 루트가 있는데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 일본에 전해지는 경로와 티베트 위쪽의 실크로드(사막)를 거쳐 대륙으로 전파되는 경로다. 전파되는 루트에 따라 인도 내의 발상지가 다르고 종파가 다른데, 여기서 불상의 여러 모습이 갈린다. 가령, 유명한 간다라 지역 불상은 헬레니즘 영향을 많이 받아 서양인 즉, 그리스인 석상의 특징을 많이 가졌다면, 마투라 지역이나 굽타 왕조의 불상에서는 인도인 석상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불상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보이고 미륵 반가상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불상의 모습, 정확히는 옷이나 관 그리고 손가락 특징에 따라 불상의 성격을 추측하는데, 문제는 저 반가사유상이 취하는 자세가 석가모니불이 보리수에서 번뇌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사유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 같은 경우 일부 반가사유상은 불상에 태자사유상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전자가 맞다고 공인되며, 일부 반가사유상은 혼란기인 위진남북조 시대에 미륵신앙 유행과 함께 등장하였으므로 미륵불일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문제는 한반도에서 등장한 반가사유상은 어떤 불교 교리와 함께 등장한 것인가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
이에 여러 학설이 분분하지만 공통으로 삼국 시대에 등장한 왕즉불 사상인 호국 불교에서 출현했다고 본다. 전쟁이 연이었던 삼국시대에서 미래에 부처가 혼란한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유행한 것이다. 또한, 각 왕실에서 이를 수용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신라는 왕족들의 이름을 석가모니 가족들의 이름과 동일하게 짓거나 불교에서 성왕으로 묘사되는 전륜성왕으로 왕자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특히 신라는 화랑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여겼으며 화랑들이 전투를 했던 영역에서 거대 반가사유상이 발견된다. 봉화 북지리 같은 경우에는 하반신만 남아 있지만, 복원 추정컨대 2.5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반가사유상이다. 삼국의 반가사유상이 미륵불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결론 내리기에는 정확한 기록들이 적지만 당시 남아 있는 기록과 유행하던 신앙, 그리고 혼란한 시대상을 추측건대 한반도에서 기술적으로나 심미적으로 완성된 형태의 반가사유상이 수적으로 많이 발견된 것은 미륵불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염원했던 민중의 바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1]
이 두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여느 문화재와 같이 단체착석된 것이 아니라 방 하나를 떡하고 차지하고 있는, 국박에서 제일 귀하디귀하신 두 분. 국박에 와서 이 작품을 못 보면 바보 천치로 여길 정도로 국박을 먹여 살리는 불교 문화재계의 슈퍼스타다. 특히 "지치고 힘들 때마다 보러 온다"는 열성 팬 마니아 그룹까지 생겼고, 박물관 큐레이터가 유물을 설명해주는 '큐레이터와의 대화' 시간에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유물이다. 모 회사원은 "반가사유상을 보고 있으면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으니, 국내에서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둘 다 6~7세기 만들어진 유물로 삼국이 한창 피 터지게 싸우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대 불교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힌다.
본래 2개 모두 한 번에 보여줄 수도 있지만, 문화재의 특성과 관리로 인해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로테이션을 도는 것처럼, 한 불상이 6개월 동안 전시되는 동안 나머지 하나는 수장고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연구대상이 되거나, 또는 보존실로 모셔져 특수 약품 사우나처리를 받으러 간다.[2]
한번 해외로 나갈 시에는 문화재 보험에 들게 되는데[3], 이때 보험금이 1990년대 말에 이미 약 300억 원, 2013년 미국 반출 때는 약 500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통상 보험평가액은 실거래 금액의 10분의 1 정도로 산정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이 반가사유상 2점은 수천억 원을 호가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말이 수천억이지, 그 역사성, 작품성 등을 따진다면 이미 돈으로 가치를 논할 수가 없다.
2 과연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하지만 이런 슈퍼스타도 딱하나 옥에 티 아닌 옥에 티를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고향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 즉 이 두 보물은 어디서 따로 출토되어 소장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도굴했던 걸 박물관 측이 거액을 돈을 주고 사 온 것이다.
83호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입수 기록에는 "국보 83호는 1912년 당시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2,600원(지금 돈으로 약 26억 원)을 주고 구입했다"고 적혀 있다.[4] 78호는 일본인 골동품상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바쳤던 걸 총독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지금의 국박) 기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이 출토된 지역이 어디냐에 대해서 매우 논란이 많다. 백제 지역(충청도 지역)의 사람들은 자기네 지방에서 만든 것이었다고 우기고, 신라 지역(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은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고 있으며, 이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5]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불상을 처음 발굴한 인간들이 일본의 도굴꾼들이기 때문. 도굴꾼들의 우두머리인 가지야마 요시히데는 누구에게도 이 불상이 어디서 출토됐는지 밝히지 않았다. 때문에 세키노 타다시는 1933년 발표한 논문에서 경주시 남쪽 오릉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이네다 하루미즈는 1915년 발표한 논문에서 1910년 충청도 벽촌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불상의 출토지가 엇갈리고 있다. 시험에 나온다면 고구려로 쓰면 10점, 신라로 쓰면 20점, 백제로 쓰면 50점, 삼국시대로 쓰면 100점이 된다 카더라[6][7]
3 흑역사
이렇게 출처가 불분명하다 보니 흑역사 또한 존재한다. 아사가와 하쿠교의 논문을 보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 불상 표면에 두껍게 호분이 발라졌고 그 위에 면상을 먹으로 그렸는데, 꼬불꼬불한 수염에 처진 눈꼬리, 빨갛게 칠한 입술로, 그야말로 더럽혀진 흰 벽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왕가박물관 관장 스에마츠 구마히코는 불상을 더운물로 닦아내고 젖은 거적으로 싸서 겨우 원래 모습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불상능욕.
다만 불상에 호분을 바르고 그 위에 먹과 물감으로 이목구비를 그리는 것은 다른 불상 등에도 행해지는 불상을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보존기법 중 하나이긴 하다. 허나 위에 쓰여 있듯이 '더럽혀진 흰 벽과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지저분하게 수염 등의 이목구비가 그려졌다고 하는 걸 보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자들이 정말 막 해버린듯 하다.
4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
일본 국보인 고류지(廣隆寺(광륭사), 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1960년, 한 여대생이 우연히 작품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내는 바람에 연구자들이 복원하려고 그 재질을 연구해보니,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소나무였다. 목조 반가사유상은 재질, 양식, 형태 모두 삼국시대의 목조 불상과 비슷해, 백제나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신의 물방울에서도 거론된 바 있었다.
물론 현지에서는 불상 전체가 소나무가 아니라 일부 부분에서 일본에서만 자라는 녹나무를 쓴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전해진 재료를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쇼토쿠태자가 신라에서 받아온 귀한 불상을 모셔 절을 지을 것을 명하고, 이 명을 받는 사람이 신라계 도래인인 하타씨(秦氏) 일족의 하타노 카와카츠(秦河勝)이기 때문에 신라에서 온 불상이라는 설이 더 강력하다.[8]
그러나 메이지 시대, 약 100여 년 전쯤 얼굴 부분을 고쳐서 얼굴이 달라졌다. 미묘한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국 그 미묘함이 한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므로, 이는 일본의 이 상을 평할 때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점이다. 또한, 일본의 이 상은 한국의 반가사유상과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도 관찰된다.
덧붙여 우리나라에는 언론 기사 등을 통해 종종 일본의 국보 1호라고 소개되는데, 정확히는 '미술품 조각 부문의 제1호'다. 여기에서 말하는 1호라는 것은 일본의 유무형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청에서 매긴 내부 관리용 지정 번호일 뿐이며 1호라고 해서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대표성, 상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달리 숫자에 민감해서 국보 XX호의 숫자를 마치 문화재의 중요도로 착각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에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유력시되는 목조 불상이 일본의 국보, 그것도 1호라고 하면 이보다 더 좋은 민족 자긍심 고취 소재는 없을 것이다. 국내 언론이나 정보 매체 등에서 일본의 목조반가사유상 얘기를 할 때 '국보 1호'라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9]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 방법은 일제강점기를 거친 탓에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국보 1호 숭례문과 같이 번호를 매기는 것 또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국보의 명칭을 대외적으로 표시할 때 번호를 붙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내부 관리를 위한 번호라서 국보 명칭에 XX호 등의 숫자를 붙일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청 직원을 제외한 보통의 일본인들 중 국보가 몇 호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내부 관리를 위한 지정 번호를 국보의 명칭과 함께 필히 표시하고 있어서 국민들에게 '국보 1호=우리나라에서 제일 소중한 문화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고류지에는 이 반가사유상 외에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이 하나 더 있다. 구분을 위해서 위의 반가사유상은 보관미륵, 뒤의 반가사유상은 우는 미륵(엉엉의 그 우는 게 맞다)이라고 부른다.
덧붙여 역시 한일간 역사 논쟁 유물 중 하나인 칠지도는 '미술품 고고(考古)자료 부문의 제15호'다.
5 트리비아
- 얼굴 부분에다 담배를 합성한 짤방이 유행한 적이 있다. 주로 답이 없는 상황에서 그 심경을 묘사할 때 쓰였다.
-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997호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양식 면에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매우 흡사하다. 국보 제83호를 확대해서 돌로 만들었다면 딱 이 석조반가상처럼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석조반가상은 상반신과 발이 인위적으로 파괴되고, 현재 하반신과 연꽃 모양 발 받침대만이 남았다. 그런데 이 하반신만 해도 높이가 1m 60cm라 상반신까지 있었으면 말 그대로 심히 크고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대 박물관 제7전시실에서 항시 전시 중이니 대구에 거주하고 있는 반가사유상 덕후라면 일부러라도 가서 꼭 볼 것을 추천한다. 실물로 보면 그 웅장함과 섬세함에 입을 다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물 부순 천하의 개쌍놈들의 명치를 매우 치고 싶어지겠지
- 11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소유자는 삼성전자 회장인 이건희. 이건 고구려의 불상으로 공인되어 있다.
- 굽시니스트가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반기문을 풍자할 때, 시사인 455호 '반총장어의 생태'편에서 반가사유상으로 패러디하기도 했다(...)
- 한 아티스트가 사탕을 먹고있는 '반가감유상(半跏甘惟像)'로 패러디했다. #
- ↑ 출처: 2015년 한림대 사학과 고고미술사학회 학술집에서 내용 요약(여러 논문을 참고해 만든 것으로 모든 참고문헌을 다 열거할 수 없어 학술집 이름을 대표로 남깁니다. 강우방과 황수영 그리고 국립박물관 서적들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 ↑ 이것 말고도 해외 문화교류로 외국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총 9번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2013년 10월 말에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신라 특별전 전시를 위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반출되었다.
반구대 덕후로 알려진 당시 문화재청장이 반출을 불허하고 레플리카를 미국으로 보내려다가, 문광부가 직접 개입하는 소동 끝에 반출이 이루어진 것은 공공연한 비밀. 그리고 그 청장은 숭례문 부실복원 문책으로 해임 크리. - ↑ 이 정도로 국보급 유물일 경우 보통 빌려 가는 국가 정부에서 직접 보험금 지급 보증을 서는 경우가 많다.
- ↑ 당시 쌀 한 가마를 돈을 주고 살 시에 가격은 1원이다. 즉 당시 2,600원이면 쌀 2,600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다.
거기에 보너스로 몇 가마 더 얹어 줄 수도 있겠지... - ↑ 참고로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지낸 강우방 박사는 78호 사유상에 대해서 문화 전파경로와 고구려에 전해진 북위 불교미술 양식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구려 불상으로 판단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 ↑ 실제로 두 불상 모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모의고사에서 특정 지역을 연결하면 틀린 답안으로 취급되며, 삼국시대라고 뭉뚱그린 경우에만 정답으로 인정된다.
- ↑ 현재, 특유의 미소와 형태가 백제양식으로 판단되어, 백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 ↑ 이 하타씨의 한자가 진나라(秦)의 진이기 때문에 진시황제의 후손이라는 개드립도 있는데 시대를 생각해보자...
- ↑ 그러나 현지에 가보면 고류지도 뜻밖에 이 국보 1호라는 걸 강려크하게 강조하고 있다. 역시 마케팅에서 1호는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