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26대 진평왕 김백정 | ← | 27대 선덕여왕 김덕만 | → | 28대 진덕여왕 김승만 |
250px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안치된 선덕여왕 어진.[1] | ||
시호 | 선덕왕(善德王) | |
칭호 | 성조황고(聖祖皇姑) | |
연호 | 인평(仁平) | |
성 | 김(金) | |
휘 | 덕만(德曼) | |
생몰년도 | 음력 | ? ~ 647년 1월 8일 |
양력 | ? ~ 647년 2월 17일 | |
재위기간 | 음력 | 632년 ~ 647년 1월 8일[2] |
양력 | 632년 ~ 647년 2월 17일(15년) |
1 개요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자 호부견녀 막장암군.
한국사 희대의 거품이자[3] 신라 상대 말 위기의 시작을 알린 왕.
신라의 제27대 왕. 연호는 인평(仁平).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로 사실 역사서에서는 모두 “선덕왕”으로 기록하는 데도 선덕여왕으로 부르는 것은 37대 왕인 선덕왕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될것이다. 본 항목은 한자가 善德王이고 37대 왕은 宣德王이다. 다만 삼국유사 기이 제1의 '선덕왕 지기삼사'에서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라는 표기도 나온다.
왜인지 모르게 '지혜로운 여왕'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4] 실상 전반적인 통치는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지혜 그딴 거 없이 안습의 극치를 내달렸고 특히 백제에겐 진짜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선왕인 진평왕 때 그런대로 버텨 나가며 힘을 비축하던 신라는 이 여자의 치세가 시작되면서 국제적으로 호구 취급을 못 면하여 별의별 수모를 다 당하였고, 이때부터 신라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까지는 백제와의 경쟁에서 내내 수세에 내몰렸으며, 그동안 정말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닌가 하면서 온 나라 백성들이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벌벌 떨고, 부처님 앞에 엎드려 양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빌고 또 빌어야 했다. 이 시기 신라에서 불교가 융성한 건 사실 백제가 초래한 묵시록적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부처님 제발 살려주세요 엉엉
2 생애
2.1 즉위 이전
정사와 야사의 기록이 다른데 삼국사기에는 장녀, 화랑세기에는 차녀로 기록되어 있다.[5]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외부의 혈통이 전혀 섞이지 않은 성골들만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성골이 계속 줄어들다보니 성골끼리의 근친혼으로 겨우 대를 잇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이미 다른 남성 성골들이 모두 대가 끊긴 상황에서 진평왕마저 아들이 없어서[6] 남성 중심 사회였던 고대 동아시아 환경에서 여성이었음에도 성골이란 이유로 그녀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서동 설화의 내용을 생각해보자면, 조카가 계속 신라를 침략하는 바람에 싸워야 하는 구도가 성립한다. 선화공주의 아들인 의자왕은 선덕여왕의 조카가 되므로. 물론 서동 설화 역시 신빙성 논란에 휩싸여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국서(여왕의 남편)는 삼국유사에는 음갈문왕(飮葛文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음(飮)을 반(飯)의 오기로 보아서 진덕여왕의 아버지인 갈문왕 김국반이 선덕여왕과 혼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로 위서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김용춘, 흠반, 을제 3명의 남자가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써 있다.
그녀가 왕위에 오르기 전년에 대규모 반란기획 사건이 있었다. 진평왕 53년 "여름 5월,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칠숙·석품의 난) 임금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쪽 시장에서 목 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으나, 처와 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총산(叢山)까지 돌아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것이 단순한 반란인지 아니면 여성인 선덕여왕의 즉위를 반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진평왕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았을 때 진평왕이 몸이 좋지 않고, 후계자로 선덕왕이 지목된 상황이라 유추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진압한 것은 진평왕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진압에 여왕과 김춘추가 동참 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흔히 선덕여왕의 자비롭고 따뜻한 모습과 달리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을 몰살 시킬 만큼 용의주도하고, 냉혹한 일면을 가진 전제군주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칠숙과 석품은 싹수가 노란 여왕이 초래할 재앙을 막기 위해 몸을 내던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자로 재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2.2 불심으로 대동단결...?
선덕여왕이 정확히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선왕이자 아버지인 진평왕이 굉장히 오래 재위한 것과 조카인 태종무열왕이 603년생이었던 것으로 보아, 왕위에 올랐을 때 아무리 나이를 젊게 잡아도 40대 중후반의 장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 580년대 중반에 태어났을 것이다. 또한 국인들이 바친 칭호라는 '성조황고(聖祖皇姑)'에서 굳이 '할머니'를 뜻하는 姑자를 쓴 것을 지적해서, 이 칭호도 선덕여왕이 즉위했을 때 고령이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단순히 존경의 의미에서 굳이 姑자를 썼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고령이었기 때문인지 재위 5년(서기 636) 3월, 임금이 병이 들었는데 의약과 기도가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즉위한 뒤 기록으로 남을 만한 대사면을 단행하여 자신이 왕이 된 것을 널리 알렸다.
그밖에도 흉흉한 민심을 다잡고자 불심으로 대동단결하려고 했던 듯 불교를 팍팍 밀어주었는데, 우선 재위 3년(634)에는 분황사를 건립하였다. 나중에 신라에서 신라십성[7] 중의 하나로 추앙 받는 자장율사가 활약하기 시작한 때도 선덕여왕 시대였다. 재위 5년(636)에 자장을 후원하여 당나라로 유학 보내 불법을 배우고 오도록 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재위 14년(645)에는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후에 신라삼보의 하나가 되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8]. 영묘사를 건립한 것도 선덕여왕 시대의 일이었다. 망월사도 선덕여왕 시대에 건립되었다. 그밖에도 선덕여왕 시대에 건립되었다는 사찰들은 많이 있으니, 참으로 불교에 돈을 많이 퍼다준 왕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이 불교계의 호감을 샀을 것이야 당연하고, 삼국유사로 대표되는 불교발 소스들에서 선덕여왕이 신통한 능력을 가졌다느니 지혜롭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지만...[9]
한편으로는 재위 4년(635)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인정 받음으로써 일단 국제적으로도 자신이 여왕이라는 것 자체는 인정 받았다.
그러나...
2.3 내우외환, 암군의 시대
선덕여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이라는 사자성어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상하게도 한국 대중들 사이에는 선덕여왕을 두고 '지혜로운 여왕'이라는 이미지가 제법 퍼져 있는데, 실상 들여다 보면 그냥 전형적인 암군이었다. 아마도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이 부여하는 신비로운 느낌과 더불어 불교 세력이 만들어낸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급의 뜬소문들 때문에 생긴 이미지인 듯하지만,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감히 꿈도 못 꿨을 수식어였다. 전쟁 실패, 외교 실패, 인사 실패, 내정 실패, 전반적으로 명확하게 실패로 얼룩진 치세였다. 정말 어딜 어떻게 봐도 그냥 전형적인 암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일단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남성 중심 문화가 여왕의 권위를 쉽사리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성별의 문제가 선덕여왕의 실정과 큰 관련은 없었다. 선덕여왕이 병크 한 번 터뜨릴 때마다 "저거 여자라서 그래." 라는 비아냥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그거야 애초에 본인이 병크를 안 치면 되는 거고, 병크도 선덕여왕급이면 굳이 여자 아니라 남자라도 병신 소리를 못 면한다. 무엇보다도, 신라는 기본적으로 남존여비 사회이긴 했지만 그걸 압살하는 게 바로 골품제였다. 여자고 남자고 간에 성골이기만 하면 그 밑의 것들은 아무리 남자라 해도 성골 여자보다 아래의 존재였고 그렇기에 실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10] 선덕여왕이 첫 번째 여왕으로서 이런 끔찍한 선례를 남겼는데도 다음 왕으로 추대된 사람은 진덕여왕이었고, 그 이유는 그 여자가 잘나서가 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성골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례 없는 여왕이란 존재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씌우기도 좋았을 거라는 지적도 있다. 가령 부여 같은 경우는 가뭄이 들면 '이게 다 왕 때문이다'라고 왕을 죽이기도 할 정도였다는 것. 그러나 선덕여왕의 시대와 부여의 시대 사이에는 무려 수백 년 이상이라는 간격이 존재하고, 옛날 사람들이라고 머저리가 아니었기에 신라는 당연히 부여보다 왕권이 훨씬 더 강한 사회였다. 그러니 부여에 대고 비교하는 건 무리다.
더군다나 문제는, 설령 그런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씌우기에 좋았을 것이다'라는 추정이 옳다고 쳐도, 선덕여왕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썼다기엔 정치를 정말 엉망으로 한 게 맞기는 했다는 것이었다. 병크 한 번 터뜨릴 때마다 여자라서 어느 정도 가산점 붙는 게 있기는 했겠지만 그거 거르더라도 정말 답이 없는 수준이었다. 평타만 쳐도 모자란 상황이었는데 내내 하타도 못 치고 삽이나 푸는 지경이었으니 그 연이은 실정 속에 아래로는 백성들이나 위로는 귀족들이나 끝내 질려버리고 말았으며 그 인내의 끝이 바로 비담의 난이었던 것이다.
2.3.1 연이은 실지와 붕괴된 서부 전선
진평왕 즉위 40년대부터 시작된[11] 고구려와 백제의 맹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와중이었는데, 선덕여왕은 국토 보전 그런 거 없었고 그냥 날만 되면 쳐발리는 송나라 비슷한 신세가 되어 전반적으로 병크를 거듭 터뜨렸다.
고구려와 대치 중인 북부 전선은 그런대로 봐줄만했다. 칠중성[12] 일대에서 대장군 알천의 사력을 다한 방어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나마 비벼볼만한 당나라로 통하는 유일한 외교 및 교역 창구 당항성[13]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칠중성이나 당항성이나 끝내 고구려나 백제에게 넘어간 건 아니었다.
재위 7년(638)의 칠중성 방어전에서 알천이 마침내 승리하니[14], 그 다음 해인 재위 8년(639)에 선덕여왕은 고구려와 접한 하슬라주[15]를 북소경으로 삼고 군사를 배치하는 등 북부 전선을 보강하였다. 재위 11년(642)년에 당항성이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눈앞에 둔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자 도무지 대책이 없었던 선덕여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살려달라고 빌었고 이에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에게 "거기까지만 해라. 당항성까지 건드리면 재미없을 거임." 이라는 협박을 하니 그 두 나라가 일단 한 발 물러나는 덕분에 한 고비는 넘길 수 있었다.
다만 애초에 당시 고구려의 주전선은 신라와 대치 중인 남부 전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는 통일 제국과 대치 중인 서부 전선이었다는 점[16], 그리고 고구려가 불과 얼마 전에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손에 꼽을 정도의 이른바 '문자 그대로의 백만 대군'이라는 초대형 침략을 연이어 막아낸 관계로 국력의 소모가 꽤나 상당하여 외정보다는 내정에 주력하고 있었다는 점, 그런 마당에 통일 제국 당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며 서부 전선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던 관계로 신라를 건드릴 여유가 그다지 없었다는 점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칠중성 공방전 이후 불과 7년 뒤에 당나라가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문제는 백제와 대치 중인 서부 전선이었다. 여긴 그냥 말이 필요 없다. 선덕여왕은 정말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선덕여왕 시대 기준으로 늦어도 여왕 재위 2년(633) 때부터 백제의 공세가 시작되는 와중에 재위 5년(636)에는 장군 우소 이하 백제군 500명이 독산성을 치기 위해 서부 전선 근처의 옥문곡에 숨어서 쉬던 중에 걸려서 격퇴 당하기도 하였다. 그 유명한 개구리 설화가 여기서 나온다.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 측근들에게 "개구리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경에 옥문곡[17]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고 들었다. 이웃 나라 군사가 혹시 이 골짜기에 잠입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 장군 알천과 필탄으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수색하게 하였다. 그 곳에는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숨어 있었다. 알천이 이를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5년(636).
일단 정사인 삼국사기에 실린 이야기가 이렇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지는 여러분의 자유. 신라: 여왕님 관심법 쓰신다 어쨌든 막아낸 건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재앙의 시작일 뿐이었다.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이 달(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재위 11년(642)이 되자 의자왕이 직접 칼 들고 달려드니 미후성을 비롯하여 서부 전선의 성이 무려 40개나 무너져 내렸고 그 40개에 더하여 백제의 명장 윤충은 서부 전선 최중요 요충지 대야성으로 쳐들어갔는데[18], 전술상의 병크도 아니고 인사상의 병크가 터진 바람에 대야성이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선덕여왕이 낙하산으로 보내놨던 당시 성주 김품석이 도대체 뭐하는 놈이었는지, 그리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김품석, 대야성 등 항목 참고. 이후 여제 양국은 여세를 몰아 당항성까지 집어 삼키려고 들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당나라의 협박을 받고 일단 거기서 만족하며 물러났다. 포로로 잡은 수많은 신라 백성들과 함께 말이다.
대야성이 함락 당한 뒤에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건 연이은 병크 속에서 그나마 좀 봐줄만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 두 사람이 잘난 건 1차적으로 이 두 사람이 잘난 것이거니와, 지금까지 선덕여왕이 저지른 과를 덮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나중에 가서 대장군 김유신이 백제의 추가타를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딱 거기서 끝이었고, 선덕여왕의 치세 기간 동안 실지를 회복하는 데에는 끝내 실패했다. 재위 13년(644)에 김유신이 백제의 성 7개를 잠시 빼앗았지만, 그 다음 해에 여당전쟁이 벌어지자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에 3만 군대를 보내 쳐들어갔을 때 백제의 공격을 받아 그 성들을 도로 다 토해내야 했다. 더군다나 전쟁은 나당 연합군의 패배로 막을 내렸고, 3만 대군과 거기에 들어간 물자만 허공에 증발했을 뿐, 잃어버린 성 7개를 대신할만한 성과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삼국사기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심각한 전황이 불과 한두 줄로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신라가 백제와의 전쟁에서 이겼을 경우에는 "ㅇㅇ성에서 싸워 이겼다." 로 '성이 하나하나 묘사되며' '여러 줄에 걸쳐서' '비교적 자세한 정황 설명까지' 나온다. 당장 위에 나온 알천의 칠중성 공방전 같은 걸 봐도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신라가 백제와의 전쟁에서 졌을 경우에는 "성이 ㅇㅇ개 함락되었다." 로 '여러 성이 숫자 한두 자로 뭉뚱그려져서 묘사되며' '한두 줄로 줄여서' '별다른 정황 설명 없이' 나온다. 춘추필법을 연상케 하는 이런 극도의 신라 편향적 서술은 후세의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 신라의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으며 반대로 당시 백제가 얼마나 날아오르고 있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더군다나 과정이야 어쨌든 삼국통일전쟁의 최종 승자는 어쨌거나 신라였으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이렇게 바꿔 보았다.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ㅇㅇ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1년(642).
이제 선덕여왕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기에 칠중성 공방전이나 가잠성 전투처럼 전투 과정이나 일화들도 하나하나 추가해본다면 40줄도 턱없이 모자라다. 대야성[19] 같은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성이라는 건 본디 지키라고 만들어진 것. 신라 지도부가 전부 다 붕어가 아니고서야 40개나 되는 성들에다가 자동문만 달아놓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 전투의 규모도 상상 이상으로 어마무시했을 것이고, 신라의 출혈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사자, 부상자, 포로[20],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 약탈, 기타 등등, 모두 다 말이다.
그렇다. 조선에 원균이 있었다면 신라엔 김덕만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졸렬한 지휘 하에 이렇듯 크게 기울어진 대세는 더 이상 자력으로는 어떻게 수습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21]. 무려 40개나 되는 서부 전선의 성들이 이런 식으로 모조리 다 떨어져 나가고 화룡점정으로 대야성에마저 백제의 깃발이 내걸렸으니 이제 서부 전선은 그냥 끝이었다.
그러니 이때부터는 그냥 백제에게 털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자동문이 되어버린 서부 전선을 넘나들며 백제는 날만 되면 약탈하고 백성들을 잡아가고 성을 빼앗아갔는데 김유신이고 김춘추고 그딴 거 없고 신라는 그냥 당해내지를 못하였다. 걸핏하면 성이 7개, 10개, 또 몇 개, 정말 마구마구 터져 나가는데[22] 천하의 김유신도 손 쓸 도리가 없어서 그저 이마빡이나 두들기며 탄식이나 겨우 할 따름이었고[23], 655년에 백제, 고구려, 말갈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성이 무려 33개나 와장창 나버린 사건은 그러한 멸망의 위기에 가히 정점을 찍은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24]. 그리고 이때도 선봉에서 칼 들고 덤벼든 건 의자왕이었다. ???:니놈 왕 되고 지난 20년 간 우리 신라는 하루도 편할 낼이 없었데이!!!
그리하여 선덕여왕이 죽은 뒤에도 당나라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직전까지 이 시기 백제와 신라의 전쟁을 보면 신라는 철저하게 수성 측이고 백제는 철저하게 공성 측인데, 신라가 자기네 성 몇 개 겨우 지켜내고[25] 한숨 돌리면서 "우리는 여기서 누가 싸웠고 어떻게 싸웠고..." 이러고 있을 때, 백제는 1 단위도 아니고 아예 10 단위의 신라 측 성들을 우르르 털어가고 있는 코즈믹 호러를 찍게 되었다. 이 시기를 두고 삼국사기의 서술 자체가 굉장히 신라에 편향되어 있는데도 나타나는 게 이 모양이다. 이후에도 김유신이 몇 번 반격은 했지만 당나라가 개입하기 전까지 실지를 회복하는 데에는 모조리 다 실패했고 본인도 본인 임지로 쳐들어오는 백제군이나 겨우 막아내는 막장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여간 이러한 선덕여왕의 지혜가 있었기에 신라는 당나라 군대가 기벌포에 발 내리는 그 순간까지 오줌을 다 지리도록 벌벌 떨면서 백제에게 머리끄댕이 쥐어 잡히고 있는대로 쥐어 터져야 했던 것이다.
2.3.2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
우리 임금께서는, 상황은 급하고 대책이 없으므로 급한 사정을 대국에 말하여 나라의 보전을 바라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2년(643), 신라 사신이 당태종에게 구원병을 간청하며[26].
선덕여왕 11년(642), 성이 무려 40개나 무너지고 거기에 더하여 대야성마저도 함락되었다니 이대로 있다가는 진짜로 죽겠구나 싶어진 선덕여왕은 바로 그 해에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김춘추를, 불과 얼마 전에 싸웠던 상대 고구려에 보내, 백제를 쳐야 하니 군사 좀 빌려달라고, 즉,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보장왕[27]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예전에 통수 쳐서 뺏어간 죽령 서북쪽을 토해내기 전까지는 그런 거 없어." 라는 비웃음 뿐이었다. 애초에 지금 신라가 무슨 꼴이 나고 있는지 모를 사람도 아니었으니 명백한 도발이 맞다. 게다가 김춘추는 엄연히 사신이었음에도 영창에 처박히는 수모를 당했다. 다만 기지를 발휘하여 간신히 살아나 도주할 수 있었으니, 자세한 건 김춘추 항목 참고. 이때 김유신이 빡돌아서 3천[28] 내지 1만[29] 군사를 이끌고 한강 유역까지 올라가 고구려 앞에서 무력 시위를 했다는데, 통일 제국 수나라 백만 대군의 침략을 지켜보고 당나라 수십만 대군의 침략을 살아생전에 모조리 다 막아낸 불세출의 명장 연개소문[30]이 그거 보고 콧방귀나 한 번 뀌었을지는(...). 실제로 다음 해 연개소문이 신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천조국 당나라의 사신을 면전에 두고 뭐라고 했는지를 놓고 보면, 전혀 신경 안 썼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괜히 고구려한테 능욕만 당한 선덕여왕. 바로 그 다음 해에는 곧장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군사 좀 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런데 그때 당태종이 "내가 너희 나라 살아날 방법을 알려줌." 이라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시절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 명을 보내 너희 나라의 임금을 삼겠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너희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 나라에 맡겨 스스로 나라를 지키도록 할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3년(644), 당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당태종이 바보가 아닌데 신라에서 정말 이 말대로 따를 거라고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고, 그냥 면전에 대놓고 비웃은 거라고 보면 된다. 말본새만 놓고 보면 이건 오히려 보장왕보다도 더했다. 그런데도 신라 사신이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예아." 하면서 어버버거리고 있으니 당태종은 "똥줄 탄다는 놈들이 저딴 걸 사신이라고 보내 놨네. 어휴, ㅉㅉ..." 하면서 또 비웃었다[31](...). 아무리 당나라가 상국이기로서니 이런 능욕을 당하고도 선덕여왕은 워낙 상황이 거지였던지라 삼국유사에서 나타나는 지혜고 신통력이고 그딴 거 없이 찍소리도 낼 수 없었으며 그저 사신 따라서 "예아." 할 수밖에. 이제 국운은 통째로 외국의 변덕에 내걸린 채, 적군한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아군한테까지, 국제적으로 정말 찐따가 다 된 것이다.
그래도 당태종은 굳이 신라 때문이 아니더라도 동아시아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고구려를 박살 내려고 일찍부터 칼을 갈고 있던 터였으므로 고구려처럼 신라 사신을 쫓아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신이 김춘추처럼 대범하게 나오든 아니면 좀 모자라게 나오든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고, 그 다음 해(644)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상리현장을 보내 "신라는 운명을 우리 나라에 맡기고(...) 조공을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그만 좀 쪼아." 라고 압박을 했다. 그러나 상리현장을 맞이한 자리에서 연개소문은 "수나라랑 전쟁할 때 그것들이 통수 쳐서 가져간 땅 5백 리를 내놓으면 가능[32]." 이라고 대답했고, 이에 상리현장은 "찌질하게 지나간 일 가지고 그래." 라고 대답하자 연개소문이 "껒." 으로 응수함으로써 협상 결렬.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여당전쟁이 터졌다.
당연히 이걸 두고 딱히 선덕여왕이 지혜로워서 선덕여왕만이 해낼 수 있었던 그런 일이었다든가, 선덕여왕의 외교적인 업적 같은 걸로 보기엔 대단히 미묘하다[33]. 왜냐하면 그 안습한 모양새도 모양새이거니와, 신라가 아예 없었다 해도 당나라는 고구려로, 그리고 그 고구려와 연계하고 있던 백제로 쳐들어갔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대당 친선 외교라는 건 당시 신라는 물론이고 백제, 심지어는 고구려[34]조차도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바보 아니고서야 누구라도 세우던 외교 방침이었다. 딱히 신라가 똑똑하거나 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건 전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외교 방침에 고구려가 방해였기에 그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 위의 말도 마냥 남의 속 긁는 개소리로 치부하기만도 많이 어려운 것이, 바다 건너에서 사정 모르는 애들이 보면 진짜 웃길 만도 했다. 당나라가 보기에는 불과 선대 왕이 다스리던 때에만 해도 별 탈 없이 잘 해나가던 애들이 별안간 여자가 왕 노릇 하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병신이 되어 나자빠져서는 사방팔방에서 얻어 터지고 있다면서 쫄래쫄래 달려와 징징대는 꼴이었다. 전화나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자세한 사정이야 알 도리가 없었고,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 보기에는 "여자가 왕 노릇하니까 저 꼴 나네. ㅉㅉ..." 소리가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선덕여왕이 정말로 나라를 망치고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평가였다. 선덕여왕이 여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그 다음의 문제일 뿐. 그렇다고 해서 선덕여왕이 여자라서 나라를 망쳐버렸다는 평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선덕여왕은 그냥 선덕여왕이었기에 나라를 망쳐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상술한 바와 같이 이 1차 여당전쟁 당시 선덕여왕은 당나라의 명령에 따라 3만이라는 대군을 박박 긁어 모아 북으로 보냈지만, 결과는 역시나 상술한 바와 같다. 그나마 역사에 남길 변호의 여지조차 완전히 날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덕여왕이 빅엿 한 번 먹여보려고 했던 고구려는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 즉 무열왕이 죽고 심지어는 연개소문까지 다 죽고 난 다음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 시대에나 겨우 망한다. 안습. 그리고 그 다음에 발해...
2.3.3 내정 실패와 비담의 난
외정에서 그렇듯 모조리 다 말아잡수시면서 실정을 거듭하고 나라의 위신을 똥통에 빠뜨리셨는데 내정도 딱히 잘한 건 없었다.
전쟁이고 외교고 뭐 하나 되는 게 없고 하루하루 능욕만 당하는 이런 엿 같은 상황에서 이제 비빌 데라고는 부처님 엉덩이 뿐(...). 일찍부터 여왕이 즉위했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는데 정말 우려가 현실이 되기 시작하니 내외의 공포가 가중되었고, 이에 선덕여왕은 맨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불교의 힘을 빌려 이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절도 많이 만들고 탑도 많이 세우고 스님도 중국에 보내보고 부처님께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이런 호불군주의 행보 때문인지 스님 일연이 쓴 삼국유사를 비롯한 불교발 야사 및 설화들에서 선덕여왕은 지혜로운 군주였다고 포장되고는 하지만, 이러니까 야사는 야사이고 설화는 설화일 뿐인 것이다[35]. 나라가 기울대로 기우는 와중에도 불사에 돈을 있는대로 처들이는 짓만큼은 빠지는 일이 없었으니 스님들 입장에서야 어찌 나쁜 소리가 나오겠는가?
그런 행동들의 정점이 바로 황룡사 9층 목탑이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오늘날에는 근사하게 들리겠으나, 실상은 현시창을 못 참고 모랄빵이 터진 여왕의 삽질로 보는 게 더 합당할 지경이었다. 재위 12년(643) 3월, 서부 전선이 사라지고 불과 6개월 뒤에 선덕여왕은 왕이라는 작자가 황룡사에 무려 9층이나 되는 초대형 목탑을 때려 박으라는 명을 내렸다. "요즘 사방에서 여왕을 자꾸 쪼지요? 이건 제가 당나라에서 유학할 때 어떤 신인이 한 말인데요. 목탑 하나 크게 올리십시오. 외적이고 귀족이고 목탑 한 방이면 여왕의 위엄이 바로 서서 다들 깨갱하고 다시는 못 개길 겁니다." 라는 이뭐병스러운 어느 중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는데 그 중의 정체는 짜자장이었다. 물론 당연히 그런 거 없었고 그냥 또 하나의 삽질이었다.
진짜 아무리 선덕여왕이 불교에 선덕 좀 베풀어줬기로서니, 암군 중에서도 보통 암군이 아니었던 이런 왕을 이렇게까지 쉴드를 쳐주고 오늘날의 거품을 만들어낸 걸 보면, 이 사람들도 정말이지 얼굴에 보통 철판을 깐 사람들이 아니며, 참으로 글 쓸 줄 아는 자들의 무서움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 하나 세워지고 탑 하나 올라갈 때마다 들어가는 돈과 자재는 결코 부처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주는 것이 아닌지라, 가뜩이나 전란, 그것도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패전의 연속으로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민생에 더욱 막중한 부담이 가는 거야 당연지사였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지라 불교 인사들의 대책 없는 후빨도 선덕여왕의 병맛 나는 능력치와 막장스러운 신라의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었으며, 불사에 들인 노오력에도 불구하고 신도 부처도 없었는지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사람 자체가 이미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시대를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였는데 하늘도 이 사람을 버렸다. 극심한 가뭄이 들어 굶주릴대로 굶주린 백성들은 자식을 내다 파는 지경에 이르렀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여러 재해가 끊이지를 않았다. '지혜로운 여왕의 다스림'? 백성들에게는 그런 거 없었다.
안 그래도 여자가 왕 노릇 한다니까 불안해 죽을 지경이었는데 나라를 정말 아주 말아잡수시고 계시니 백성들이나 귀족들로서는 가히 경악을 금치 못할 따름이었다. 참고로 이 시대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게 상식처럼 통하는 시대였다. 당시 사람들 입장에선 분명 망조도 이런 망조가 없었을 터. 이때 반발이 엄청 심하여 민심을 달랠 필요가 있었던 듯 선덕여왕은 재위 14년(645) 11월, 황룡사에 무려 9층짜리 거대 목탑이 완전히 올라간 바로 그 해 말에[36], 반대파의 중심 인물이자 진골 귀족들 중에서도 대단히 명망 높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담을 나라의 최고 관직인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지만 나라가 박살나고, 자기들이 망하게 생긴 귀족들이 참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끝내 반발을 억제할 수 없었고, 결국 1년 조금 뒤인 재위 16년(647) 1월, 하필이면 그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난을 일으키니 바로 비담의 난이었다. 그렇게 미친 여왕의 학정으로부터 이 나라 종사와 가여운 백성들을 구해내겠다는 일념으로 들고 일어난 비담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37].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6년(647), 비담.
참으로 리얼팩트 반박불가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사 병크가 터진 것이었다. 이때 나라 안에서 호응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반군들이 10일 동안이나 왕성 대문을 뚜들겨 대는데 그 김유신이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한 채 그저 대문 걸어 잠그고 감히 나가 싸우지를 못할 따름이었다. 조선으로 치면 반란군이 경복궁을 에워싼 채 10일이 넘도록 광화문을 뚜들겨대고 있었던 것이니 이거 아주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이런 골 깨지는 상황을 김유신이 어떻게 극복해낸 건지 그 자세한 상황은 비담의 난 항목 참고.
그런 와중에 선덕여왕은 난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결국 죽고 말았다. 위엄을 세울 수 있을 거라는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에 무려 9층이나 되는 목탑 하나 거하게 올리고 불과 2년조차도 채우지 못한 뒤의 일이었으며[38], 보위에 오른 이래로 죽는 그 순간까지 어지러움과 위기, 그리고 쇠퇴의 연속이었던 그 혼란한 16년 치세의 마지막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선덕여왕이 죽은 뒤에 김유신 등이 가까스로 난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다음 왕으로는 선덕여왕의 사촌이자 마지막 성골 김승만이 추대되었다[39].
선덕여왕이 신라의 앞길에 싸질러 놓은 이 푸짐한 똥을 치우기 위해 진덕여왕[40]이 감내해야 했던 수모와 굴욕, 그리고 무열왕과 김유신 이하 충신, 열사들이 바쳐야 했던 피와 땀과 눈물은 정말이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덕여왕의 그림자를 거두어 내기에는 그조차도 턱없이 부족했다.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한 국운을 자력으로 다시 일으키기란 절대 불가능했고, 그러한 시국에서 진덕여왕이 칼 대신 비단 뽑고 써내린 것이 바로 차마 눈 뜨고도 못 봐 줄 희대의 애널 써킹 치당태평송[41].Aㅏ...
2.4 죽음과 관련한 의문들
선덕여왕의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선덕여왕이 죽은 날을 1월 8일이라 기록하고 있고, 진덕여왕조에선 "비담이 1월 17일에 목이 베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김유신 열전에서는 "비담과 김유신이 10일간 공방전을 벌였다"고 전한다.
일단 선덕여왕은 비담의 난이 아직 끝나지도 않은 와중에 죽은 게 확인된다. 그러니 이 기록의 내용으로 본다면 선덕여왕이 반란 도중 난의 주동자인 비담 일파에 의해 시해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즉위 초부터 나이가 많이 들었고 약과 기도도 효험이 없었다는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노환으로 죽을 날이 다가오자 이를 노리고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충격을 받아 승하했다는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난이 터지기 전부터 이미 본인으로서는 스트레스 받을 일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가능성은 더더욱 높고, 더군다나 시해 주장이 사실이라면 왕이 반란군 칼에 맞아 죽은 대사건인데, 그게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도 많이 이상하다. 삼국 중에서도 가장 기록이 풍부한 나라가 바로 신라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또 다른 가능성은 비담과 염종이 화백회의에서 선덕여왕의 퇴위를 결정하자, 자신의 입지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김춘추가 정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42] 실제로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분이 "여왕이 무능하다." 라는 것이었으니, 잇따른 나라의 혼란으로 귀족 세력들이 선덕여왕을 퇴위시키고 비담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건 가능성일 뿐.
2.5 부록: 여자라서 망했는가?
모처럼 등장한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 이런 암군이었다니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분명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선덕여왕의 치세가 혼란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선덕여왕 본인의 성별과 고대 국가의 성격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주장에 따르면 이렇다. 고대 국가의 왕은 뛰어난 장수이기도 해야 했는데, 문제는 당시 신라의 왕이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여자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43][44] 다행히 초창기에는 알천이, 중후반기에는 김유신이 활약을 해서 이를 어느 정도 대처하였지만, 왕이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효과가 떨어졌을 것이다.[45]
문제는 지휘 능력이야 어떻든 고구려와 백제가 이를 얕잡아보거나 구실삼아 자주 침략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실제 선덕여왕이 즉위한 직후부터 고구려와, 특히 백제의 외침이 급증하여 어려움을 겪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와 우호 관계에 있던 당나라조차도 신라의 왕이 여자라 주변에서 이를 업신여겨 외침을 자주 당한다고 하면서 은근히 내정 간섭에 나서려고 했다.
다만 성별과 관계 없이 초래된 혼란이라는 반론도 따른다.
주장에 따르면 이렇다. 전반적인 전황이 열세에 내몰리고 패착을 거듭하는 와중에서도 몇 번의 승전 역시 있기는 있었다. 뭐 딱히 대단한 건 아니고, 그야 최소 40판 이상을 내리 발리고 있는데 한 판 정도는 이겨도 되잖아... 알천이 거둔 칠중성의 대승이라든가, 김유신이 지휘한 방어전의 성공이라든가. 즉, 여왕이 친정하지 않아서 나라가 혼란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칠중성 방어에 성공한 후 신라가 하슬라주의 군사력을 배치했다는 기사가 있기에 칠중성 전투로 신라가 군사력을 고구려와 대치중인 북쪽에 집중시켰고, 상대적으로 서쪽의 방위력이 떨어졌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틈을 노려 백제가 총공격을 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낙하산 인사인 김품석의 실책이 맞물려 대야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백제가 고구려와 같이 당황성을 함락하려고 했다. 이때 신라 사신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 왕은 일의 형편이 궁하고 계책이 다하여, 오직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선덕여왕 개인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형편이 궁하다 했으니, 신라의 국력으로 백제와 고구려 두 강대국을 동시에 막기에는 역부족이라 할 수 있다.[46]
이러한 점에서 선덕여왕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강대국을 상대하는 것이 신라로서 상당히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고구려가 나제동맹의 힘에 밀려 점차 국경선을 뒤로 물린 것이나, 아버지 근초고왕을 도와 백제의 전성기를 도모한 근구수왕이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에 여러 번 북진의 좌절을 맛보았다는 것은, 한 나라가 두 나라를 맞이해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선덕여왕은 여왕이었기에 무능했는가, 아니면 선덕여왕이었기에 무능했는가 하는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이유 중의 하나로 이런 설들이 있다는 것 정도로 알아두면 된다. 아니면 그냥 안 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내려갔다고 생각하면 가장 편하기는 하다.
2.6 얼굴마담 설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재위할 당시 정계의 실권자는 진골 중에선 그나마 혈통이 성골에 가까웠던 김용춘, 김춘추 부자일 가능성이 있다.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성골에게만 왕위 계승권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실권은 김용춘이 갖고 있었다는 것. 참고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성골의 수를 늘리기 위해 남편을 3명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김용춘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가설에 대해선 반대 근거도 만만치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선덕여왕의 20살 때의 모습을 본딴 것이라 추정한다. 신라의 왕즉불 사상과 더불어 추측해 본다면, 덕만공주(선덕여왕)를 보살에 비유한 것은 진평왕의 후계 작업이라는 추정인 것이다.[47]
그 당시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던 상태다. '덕만'이라는 이름 자체도 불교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3 기록들
3.1 삼국사기의 기록
一年春一月 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대신 을제가 정치를 총괄하다
一年夏五月 가물다가 비가 왔다
一年冬十月 백성들을 진휼하다
一年冬十二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七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秋八月 백제가 침략하다
三年春一月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다
三年 분황사가 완성되다
三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四年 당나라에서 왕을 책봉하다
四年 영묘사가 완성되다
四年冬十月 이찬 수품을 보내서 위문하다
五年春一月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왕이 병이 들다
五年夏五月 옥문곡에서 백제의 군사를 치다
五年 자장이 당나라에 들어가다
六年春一月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삼다
六年秋七月 알천을 대장군으로 삼다
七年春三月 큰 돌이 저절로 옮겨갔다
七年秋九月 누런 꽃이 비처럼 내리다
七年冬十月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七年冬十一月 알천이 칠중성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우다
八年春二月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삼다
八年秋七月 동쪽의 바닷물이 붉게 되다
九年夏五月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을 청하다
十一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一年秋七月 백제가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다
十一年秋八月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빼앗으려다 당나라의 경고를 받고 물러나다
十一年秋八月 대야성이 함락되다
十一年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다
十一年 김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삼다
十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二年春三月 자장이 돌아오다
十二年秋九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 당태종이 상리현장을 고구려에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다
十四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四年 김유신이 백제의 침입을 막다
十四年春三月 황룡사 9층 목탑을 창건하다
十四年夏五月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다
十四年冬十一月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六年春一月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다
十六年春一月八日 왕이 죽다
선덕여왕부터 삼국사기 5권이 시작된다.
3.2 영묘사 건축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선덕여왕 때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영묘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3.3 첨성대 건축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끝부분에 선덕여왕이 영묘사와 첨성대를 건축했다는 내용이 살짝 나온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한 것은 『양지사전』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별기』에는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라고 했다.
3.4 황룡사 9층탑 건축
《삼국유사》 탑상 편에 수록된 이야기다. 자장법사라는 스님이 당나라에서 수도를 하는 중 신인을 만나서 신라에 외래가 침략함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신인이 말했다. “그대 나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고 있는 것임ㅉㅉ 돌아가서 황룡사 9층탑을 만드셈"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9층탑을 지으라고 진언했다. 선덕여왕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해서 탑을 건설하게 하고 김용춘이 공사를 주관했다. 아비지가 처음 찰주를 세운 날 밤, 그는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고 일손을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당문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아비지는 후회하면서 탑을 완공시켰다고 한다.
3.5 지귀 설화
'삼국유사 제4권 의해'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공이 영묘사의 몇몇곳에 새끼줄을 둘러치고 3일 후에 풀라고 하였다. 과연 3일 만에 선덕여왕이 영묘사에 방문했을 때, 지귀가 탑을 불태웠으나 혜공이 새끼줄로 맨곳은 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지귀'라는 귀신과 영묘사 탑의 화재 사건만 살짝 언급할 뿐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조선시대 책인 '대동운부군옥'에 지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선덕여왕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48] 지귀가 선덕여왕이 불공 드리는 절에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탑 아래에서 지쳐서 잠이 들자, 선덕여왕이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금팔찌를 지귀의 가슴 위에 놓고 갔다. 지귀는 너무 기쁜 나머지[49], 가슴부터 온몸이 불타올라 탑까지 태우고 결국 불의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모에사 선덕여왕은 <지귀주사(志鬼呪詞)>를 짓게하여 지귀의 화재를 방비했다.
사실 이 설화는 중국의 불교 설화인 '술파가설화'의 표절이다.
3.6 밀본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
《삼국유사》신주 편에 기록된 이야기. 선덕여왕이 병에 걸리자 흥륜사의 스님 법척을 불러서 병간호를 하게 했으나 낫지 않았다. 그래서 밀본법사를 불러 경을 읽게했고 밀본은 경을 읽은 뒤 막대기를 침실로 던졌다. 그러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이 찔려 쓰러지고 왕의 병이 나았다.
3.7 선덕왕지기삼사
삼국유사에서는 이른바 '지기삼사(知幾三事)'라는 고사로 알려진 신이한 능력을 지닌 여왕으로 묘사되는데, 당태종이 나비 없는 모란꽃 그림을 보내자 벌과 나비가 없음을 보고 향기 없는 꽃임을 맞추고[50] 나아가 자기가 여왕이라는 걸 비웃는다고 간파했다[51]. 또한 백제의 별동대가 서라벌까지 잠입하자 개구리가 우는 걸로 이를 간파해 내고는 특공대가 숨어있는 곳을 가르쳐줘서 섬멸했다든지,[52][53]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에 써달라고 하여 낭산에 장사지냈더니 후에 문무왕이 선덕여왕릉 밑에 사천왕사를 워 선덕여왕의 예언이 적중했다[54]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거 봐서는 대무당이었을지도 모른다.
3.8 선덕여왕의 남편(국서)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고, 삼국유사 왕력 선덕여왕 부분에 '왕의 남편(국서)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4 선덕여왕릉
해당 항목을 참조.
5 각종 매체에서의 선덕여왕
삼국사기에는 정작 선덕여왕 본인은 결혼을 했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에 남편이 음갈문왕(飮葛文王)이었다는 기록때문인지, 이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배역을 담당할 당시 죄다 유부녀들 뿐이다. 반면 맡은 배우들이 대부분 동안이라,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는 이미 최소한 40대 후반, 많으면 할머니에 해당하는 나이였는데 대체로 각종 매체에서는 너무 젊고 탱탱한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5.1 삼국기의 선덕여왕
김혜정이 선덕여왕 역을 맡았다. 아마 선덕여왕이 나오는 드라마 중 거의 유일하게 역사 속 선덕여왕과 비슷한 연배의 배우를 캐스팅한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김혜정이 전원일기의 복길이 엄마로 유명한 배우다 보니, 시골 아줌마가 갑자기 공주니 여왕이니 하며 나오는 것에 당황하는 시청자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진평왕의 첫째공주로 등장한다. 아버지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서 총명한 첫째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하지만, 여자가 즉위하는 것에 거부감 느끼는 귀족들 때문에 선덕여왕으로서는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깊고 인내심 강한 인물이라 그런 상황에 조바심 내기보다는 조용히 자기 세력을 키워나간다. 즉, 정계에서 주변인물로 취급받는 조카 김춘추[57] 및 신흥세력 김유신[58]에게 은근히 힘을 실어주며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진평왕의 승하로 마침내 즉위하지만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역사에 기록된대로 여왕이라는 점 때문에 귀족들은 은근히 반발하고 당나라 황제는 자기 친척과 결혼해서 왕위를 그 친척에게 넘기라고 하며 대놓고 비웃는 등 수모를 겪는다. 그런가하면 조카인 백제 의자왕마저 즉위하자마자 이모네 나라 신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빼앗는다.[59]
차츰 노쇠해가던 중에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하자 병석에 누운 채 유폐된다. 다행히 김유신이 보낸 장수와 병사들이 비밀통로로 궁궐에 들어가 선덕여왕을 구출하고 반란도 진압된다. 그러나 그렇잖아도 병들어 약해진 상태에서 반란의 충격을 극복 못 하고 결국 승하한다.
5.2 연개소문의 선덕여왕
배우는 배미자. 역대 선덕여왕 중에 가장 고령으로 등장한다. 비주얼로는 거의 할머니이다.(...) 정치에는 아예 관심을 놓고 불사에만 치중하는 전형적인 혼군, 암군으로 나온다. 모든 대소사는 화백회의에서 관장하고, 선덕여왕은 그저 얼굴마담, 심지어 연개소문이 신라의 상황이 개판이라고 뒷담화를 할 정도로 나라 꼴이 말도 아닌걸로 표현되었다. 아니 어떻게 얘들이 가장 고증을 잘했을까?
5.3 드라마 선덕여왕의 선덕여왕
선덕여왕(드라마) 항목과 선덕여왕(선덕여왕) 항목을 참조.
5.4 대왕의 꿈의 선덕여왕
배우는 박주미 → 홍은희(아역 : 선주아). 진평왕의 차녀이자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공주의 여동생이다. 김유신과도 외사촌 사이이다. 그래서 작중에서 김유신을 부를 때 공식 석상이 아닐 때는 격의 없이 "유신아"라고 이름을 부른다.[60]
항상 나라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신중하고 사려깊은 행동으로 아버지인 진평왕으로 부터 무한신뢰를 받고 있으며, 백성들로부터도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광기를 보이는 삼촌인 국반 갈문왕과의 혼인도, 본인의 안위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생각에서 결정했던 것. 진평왕이 덕만공주가 아들이 아님을 한탄할 정도. 또한 극중에 진평왕이 덕만공주의 자문을 구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된다.
극 초반의 모습만을 봤을 땐 청순가련형의 캐릭터 같았지만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나, 그 누구도 꼼짝하지 못했던 증조할머니 사도태후 앞에서 자기 할 말을 다하는 등, 상당히 강단있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해당 역할을 맡고 있던 박주미가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하차가 불가피해지면서 담당 배우가 홍은희로 교체되었다.
뭔가 즉위 전후로는 비담의 이간질에 순간적으로 흔들리거나, 다소 어긋난 애국심과 지나친 혈기로 독선적인 행보를 보이는 비담을 통제할 엄두도 못내다가 화가 쌓여서 성질을 내는 등, 미묘하게 무능한 인상을 준다.(…) 고증 실패다. 실제로는 미묘한 게 아니라 확실하게 무능했으니까
홍은희가 박주미에 비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주미가 일찍 하차하게 된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다소 있다.(…)
5.5 점프의 선덕여왕
추가바람.
5.6 외국 서브컬쳐에서의 선덕여왕
놀랍게도 WOD 시리즈의 제작사인 화이트 울프 사의 Exalted와 werewolf :The Appocalypse에 등장한다. Sondok, Queen of Silla로써... 물론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창작 캐릭터로 변신여우 종족의 여왕이다.
5.6.1 햄버거(?)
드라마의 붐을 타고 등장한 햄버거 상품. 희한하게도 햄버거빵 부분이 고로케로 되어 있다. 덕분에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기름이 뚝뚝 떨어진다고 한다.
참고로 캐치프레이즈(?)는 드라마의 그것을 패러디한 "빵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시대의 몸짱이 된다."
5.6.2 디아블로3
2.1패치로 등장한 전설 보석 신속의 곡옥에 그녀의 언록[61]이 쓰여 있다.
6 기타
의외로 발음하기 상당히 어려운 이름인지라 발음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헷갈린다. '선더겨왕'이라고 읽는 사람이 많지만, 국어사전을 보면 [선덕녀왕] → [선덩녀왕]이라고 한다.- ↑ 1990년대에 전각을 다시 지으면서 유황(당시 경북대 교수)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것이다.
- ↑ 재위기간이 정사와 야사에 5년정도의 차이가 있다.
- ↑ 만만치 않은 거품 논란이 있는 광해군은 최소한 태자 시절 업적은 확실했다.
- ↑ 정사는 아니고 주로 불교발 소스들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하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읽다 보면 알게 된다.
- ↑ 다만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가 의심되는 상황이라...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 ↑ 여기에 대해서 진위가 검증되지 않은 화랑세기는 "진평왕이 마야부인과 사별한 뒤 새로 승만부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승만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들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 ↑ 신라에서 가장 잘나가던 10명의 스님들이다.
- ↑ 근데 이것도 욕 쳐먹어 마땅한 짓이었다. 왜인지는 하단 참고.
- ↑ 반면에 연개소문은 기존의 불교 세력을 위축시키고 도교 세력을 밀어줬기에 삼국유사에서
궁댕이에 불이 터져 나오도록까인다. 참고로 삼국유사의 저자는 스님 일연이다. - ↑ 이걸 가지고 '신라는 그래도 동시대 다른 나라들보다는 사상이 조금 트인 나라였다'는 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실상은 그저 골품제라는 게 그 정도로 엄청나게 강했다는 증거일 뿐이지 사상이 트이고 그런 거 전혀 없었다.
- ↑ 즉, 선덕여왕이 여자라는 이유로 사방에서 우습게 보아 덤벼들었다는 주장에는 이를 근거로 반론이 따른다. 이미 공세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 ↑ 오늘날의 파주 적성면이다.
- ↑ 신라의 삼한일통이라는 것이 누구 덕에 가능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여기를 뺏긴다는 건 그냥 망국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신라가 여기만큼은 정말 기를 쓰고 지켜내려고 한 것이다.
- ↑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걸 보아 대승이었다.
- ↑ 오늘날의 강릉이다.
- ↑ 당시 세계 최강국을 둘씩이나 연이어 상대해야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 ↑ 여기를 두고 삼국유사 등을 기반으로 경주 근처의 여근곡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위치의 문제도 그렇고 특히 '독산성을 치려고 하였다'는 정황을 보면 여근곡은 말이 안 되고, 그냥 서부 전선의 어딘가로 보는 게 옳다. 옥문곡이라는 표기는 삼국사기에서, 여근곡이라는 표기는 삼국유사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신종원 등의 주장에 따르면 '옥문(玉門)'과 '여근(女根)'이 둘 다 여성의 음문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일연이 그냥 여길 여근곡이라고 대충 비정해버린 듯하다고 한다.
- ↑ 여기가 뚫리면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아도 낙동강 이서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이후에 나타난 결과와 같이 말이다. 그나마 선덕여왕 뒤의 신라는 당나라가 있어서 살아났는데 진성여왕 뒤의 신라는 당나라가 없어서 그대로 새가 되어버렸다.
- ↑ 참고로 이 대야성은 이 당시 백제에게 털린 그 수많은 성들 중 거의 유일하게 따로 지면을 할애해 주면서 묘사되었다. 제 아무리 춘추필법으로도 도저히 쉴드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무열왕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는 문제도 있었겠지만.
- ↑ 즉, 농사 짓고 나라 지킬 노동력의 유출. 농경 사회에선 특히나 심각한 문제다.
- ↑ 냉정하게 말해서 신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당연히 김춘추나 김유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당나라의 외교 방침 때문이다. 신라가 괜히 연호도 버리고 복식도 버리고 별의별 굴욕을 다 감내하면서 개 노릇 한 게 아니다.
- ↑ 이것도 그냥 성 7개, 10개 이렇게 나온다. 하지만 위의 방식으로 바꿔서 읽어보자. 와닿는 느낌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 ↑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김유신은 백제군을 맞아 싸우는 족족 모두 이기지만 이상하게도 감히 백제 땅으로 넘어가지는 못하고, 실지를 회복하지는 못한다. 반면 백제군은 기록 상으로 도합 수만 명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무슨 좀비떼마냥 끝도 없이 몰려들어서는 걸핏하면 신라 땅을 마구마구 빼앗고 아주 개발살을 내버린다. 이는 선덕여왕 시대 때부터 백제가 신라를 개발살 내던 실제 시궁창 같은 현실 역사와 다름 아닌 김유신의 후손이 망상하면서 쓴 사실상의 판타지 소설 즉 행장을 기반으로 한 기록들이 삼국사기 위에서 요상하게 얽히고 섥히면서 생긴 결과다. 결정적으로 역시 이유야 어쨌든 신라가 이겼고 말이다. 실상은 이겼다기보다는 살아남았다고 해야겠지만,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라는 이야기도 세상에는 있지 않은가.
- ↑ 성이 함락되었다는 기사만 최소 33줄을 할애해야 하는 개막장스러운 부분이었다. 이런 놈들을 삼국통일전쟁에서 결국 이기도록 만들었으니 당나라가 괜히 통일 제국이 아닌 것이고 삼국 전체가 괜히 중국에 조공하면서 뭐라도 하나 더 뜯어보려고 한 게 아닌 것이다.
- ↑ 정확히 보자. 백제의 성을 따낸 것이 아니다. 가지고 있던 성을 지켜낸 것이다.
- ↑ 청병 자체는 선대인 진평왕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옆 나라 백제조차도 곧잘 해온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대책이 없어서 구걸을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 ↑ 이라고는 해도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옹립된 왕인데다가 그래도 나름 삼국의 하나인 신라와의 동맹을 다루는 문제였으니 연개소문의 뜻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다음 해에 당나라 사신 상리현장에게 연개소문이 직접 하는 말이 이때 신라 사신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한 말이랑 똑같다.
- ↑ 김유신 열전 기준.
- ↑ 신라본기 기준.
- ↑ 정치적인 능력이나 국가의 운영 방향은 어쨌든 간에 최소한 군사적인 능력만큼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분명히 인정 받는 위인이다.
- ↑ 반면에 고구려로 갔던 김춘추는 땅 내놓으라는 보장왕의 말에 "그냥 내 목을 쳐라." 로 화끈하게 응수했다. 나중에 조선에서 경신대기근이 터졌을 때 강희제가 조선 사신들 면전에 대고 군약신강 어쩌고 하면서 당시 조선 국왕 현종을 씹었을 때도 당시 조선 사신단에 속해 있던 복선군 이남은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라며 할 말은 했다. 이런 반응에 강희제는 "거지 주제에 따박따박 말대꾸 하네." 라며 뭐라 하기는커녕 오히려 인물은 인물이었던지 대단히 흡족해하였다고. 강희제 못지 않은 천하의 호걸 이세민이 보기에 신라 사신의 저런 반응은 영 마음에 차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내 자식이 빠져가지고 - ↑ 즉, 일찍이 보장왕이 김춘추에게 했던 말과 같다.
- ↑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라가 땅끝 의주까지 밀려나자 선조 이하 중신들은 명나라로 서신을 바리바리 보내거나 아예 직접 찾아가서 엎드려 빌기도 하고 눈물을 질질 짜기도 하면서 명군을 데려와 종사를 보존해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선조의 특출한 업적이나 지혜로움의 발로 같은 거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선조 자신 뿐일 것이다(...).
- ↑ 연개소문조차도 집권 초에는 당나라와 친선을 도모했다. 하지만 당태종에게 고구려는 대당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존재였으므로 실패.
- ↑ 재미있는 건, 그러한 이야기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또 그건 그대로 깔 거 투성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사실이라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만.
- ↑ 그 역사를 단 2년만에 해치웠으니 가뜩이나 고단한 백성들을 볶기는 또 얼마나 들들 볶았겠는가? 아마도 그래서 욕을 엄청 많이 먹었던 모양이다. 백성이 하늘인 줄도 모르고...
- ↑ 원문은 女主不能善理. 근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좀 논란이 있다. 자세한 건 비담의 난 항목 참고. 다만 선덕여왕의 끝을 모르는 실정이 초래한 참사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저 '여자 임금'이라는 게 선덕여왕이 아니라 진덕여왕을 말하는 거였다 해도, 애초에 선덕여왕이 여자 임금으로서 끔찍한 선례를 남긴 게 바로 원인이기 때문이다.
- ↑ 또한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3만 대군을 파병했다가 완벽하게 말아먹고 얼마 뒤의 일이기도 했다.
- ↑ 여왕이 나라를 죽쒀버렸는데 아무리 성골이기로서니 왜 다시 여왕이 나타난 거냐면, 신라에서 골품제란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 심지어는 암군의 선례마저도 씹어 발기는 수준의 어마무시한 힘을 가진 대율이었기 때문이다.
- ↑ 정황을 보면 아마도 그저 김춘추와 김유신이 내세운 바지사장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는 하지만.
- ↑ 분명히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 정도로 처절한 상황이었던 건 맞다. 그리고 그렇게 후장 열심히 빤 보람이 있어서 끝내 삼국 중 최종 승자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보기에 정말 웃기는 건 참으로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산다는 건 그런 거야 - ↑ 다만 만장일치가 기본인 화백회의이기에 선덕여왕의 세력인 알천이 반대했을 수 있다.
- ↑ 당연하게도 고대에 장수를 맡으려면 일단 말을 타고 돌아다녀야 했으니 체력이 남달라야 했다.
- ↑ 참고로 아버지 진평왕은 북한산성에 침입한 적을 맞서 1만 군대를 직접 이끌고 나가서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 ↑ 참고로 김유신이 고대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파워를 지닌 실세로 성장한 것은 왕의 대리로 총사령관으로 전투에 출장한 경력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 ↑ 비단 선덕여왕만 중국에 요청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 진평왕도 수나라의 요청하여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고 하였다. 그 만큼 고구려의 침공도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신라는 정말 너무 구차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선덕여왕 본인의 실정이 초래한 것이었다.
- ↑ 진평왕은 똑같은 모양의 목상을 스이코 여왕이 지배하던 일본으로 보냈으며, 그것이 현재 국보 1호인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세한 것은 반가사유상 항목을 참조.
- ↑ 참고로 당시 선덕여왕의 나이는 40세 이상(...)
- ↑ 만나지 못한 것을 원통해해서 죽었다는 전승도 있다.
- ↑ 당태종이 그러한 그림을 보낸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당나라에서는 모란꽃과 나비가 같이 그려진 그림을 선물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로 여겨졌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모란꽃을 부의 상징으로, 나비를 '영원하지 못함'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모란꽃과 나비가 한 그림에 같이 그려진 것은 '영원하지 못한 고갈될 부'였으며, 선물을 할 때는 반드시 나비를 뺀 모란꽃 그림을 선물했다. 결국 문화의 차이로 생긴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 ↑ 이게 사실이라면 선덕여왕이 외교적으로 아주 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는 또 하나의 안습한 증거도 된다.
- ↑ 삼국유사에 보면, 영묘사에 한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울어대자 선덕여왕이 군사 2천을 보내 여근곡에 숨어있는 백제 군사 500을 섬멸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떻게 아셨냐는 신하들의 질문에 "개구리가 성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다.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은 흰빛이니 흰빛은 곧 서쪽 방위이다. 이로 인해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곧 죽는 것이니, 적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 ↑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백제의 별동대가 서라벌까지 잠입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신라의 국방 경비가 지못미였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 ↑ 도리천은 불교에서 사천왕천의 위쪽을 이야기한다.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릉 밑에 세웠으니, 선덕여왕릉은 도리천이 되는 셈. 일부에서는 문무왕이 사천왕사의 권위를 높이려고 지어낸 이야기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 ↑ 이요원은 결혼을 아주 일찍 했다.
- ↑ 배우 유준상의 아내. 원래 선덕여왕 배역을 맡았던 박주미가 교통사고로 하자하면서 대신 투입되었다.
- ↑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이기 때문에 은따당함
- ↑ 신라에게 망한 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은따당함
- ↑ 이 드라마에서는 진평왕의 셋째공주이며 선덕여왕의 동생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과 혼인하여 의자왕을 낳은 것으로 설정됨.
- ↑ 진평왕과 만명부인은 아버지가 다른 남매 사이다. 진평왕은 만호부인과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 사이에서 낳았고,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동생인 김숙흘종 사이에서 낳았다.
잠깐, 그럼 얘들은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거야. - ↑ "두뇌와 신체가 적보다 빠르기만 하다면, 적보다 강할 필요는 없다." - 선덕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