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후백제의 역대 국왕
신라 51대 진성여왕1대 국왕 견훤2대 국왕 신검
묘호없음
시호없음
연호정개(正開)[1]
이(李)/견(甄)[2]
훤(萱)
생몰년도음력867년 ~ 936년 9월 9일(70세)
재위기간음력892년[3] 또는 900년[4] ~ 935년 음력 3월(약 35년 또는 약 43년)

후백제건국 군주.

1 개요

신라 말기의 장군이자 후백제의 초대 국왕이며, 황간 견씨(黃澗甄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군주로 재위한 그는 본래 남북국 시대 신라의 장군으로, 신라 서남해안(전라남도)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거병하여 892년에 무진주 [5]를 점령하였고 왕을 칭했고,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6]에 도읍하여 3백여년 전에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선포한다.[7]

935년 음력 3월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神劍)이 일으킨 정변으로 보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비로소 후백제의 다음 군주로 등극한다.

그러나 고려 태조는 귀순해온 견훤을 선봉으로 세워 십만이 넘어가는 대군으로 총공격을 시작하자 이듬해 음력 9월 8일에 후백제는 끝내 멸망하였고, 등창을 앓던 그는 그 다음날인 936년 음력 9월 9일에 사망하였다.

2 일대기

2.1 출생과 설화

견훤은 867년, 상주의 농부였던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8] 그 출생지는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9]상주의 가은현[10]이었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본래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광계 연간[11]에 가문을 일으켜 지방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했다. 견훤의 본래 성씨는 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이(李)씨였으나 훗날 견(甄)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 사서인 이제가기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에게는 백융부인 사도라는 왕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후손인 작진[12]이 왕교파리라는 여인과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아자개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견훤은 곧 신라 왕실 외척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리 신빙성있는 기록은 아니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견훤에게는 여러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남동생들로는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등이 있으며 여동생대주도금이 있다.[13] 당시 다 이름을 떨쳤다는 사람인데, 그 이름을 떨칠만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어쨌든 견훤 자신과 형제들이 모두 유명했던 듯하다.

2.1.1 출생 설화

한편 견훤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의 비범함을 나타내는 설화를 하나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아자개에게 식사를 날라 주기 위해 포대기에 싸인 어린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는데 지나가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호랑이와 목숨 걸고 싸워서 견훤을 되찾아 왔을지도 모르는 아자개에게 박수를(…)

또한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견훤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푸른 옷을 입은 남자와 밤에 그렇고 그랬는데(…)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위해 남자의 옷에 실을 매달아 따라가보니 연못으로 이어져 있어서 파봤더니 지렁이가 바늘에 꿰인 채로 죽어 있었다더라(…)란 이야기가 있어 토룡(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실제 전승은 지렁이가 아닌 이었지만 패배자를 폄하하기 위해서 지렁이로 격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지렁이가 "토룡(土龍)"으로도 불린다는 점을 참고.

지렁이에 대한 또다른 설은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견훤의 '견'은 진으로도 읽힐 수가 있는데, '진훤'이 발음상 지렁이와 유사하기 때문에 그를 폄하하려는 쪽에서 '지렁이', 혹은 '지렁이 자식'이라고 부른데서 나왔다는 얘기가 있다.[14][15]

그의 출신에 대한 이설로는 신라 토박이가 아니라 백제 멸망 이후에 문경으로 이주한 백제인이란 설도 있다.[16] 위의 지렁이 설화는 광주 북촌이 배경인데, 오기라는 설도 있지만 이를 근거로 모종의 일로 광주에서 도망쳐 나온 집안의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광주(무진주)가 견훤의 근거지 안에 들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왜곡될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 견훤의 배임지라든가 사서에 비추면 이 설의 신빙성은 떠도는 야담 수준으로 낮은 편.

2.2 성장기

견훤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남달리 커졌으며 용모도 비범했다고 전해진다. 장성한 견훤은 갑작스레 고향을 떠나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시로 올라가 무장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데 상주에서 부와 권력으로 제법 큰 세력을 자랑하던 아버지 아자개가 가문의 격을 높이고자 아들을 경주로 보냈다는 말도 있다.[17]

혹은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등쌀에 떠밀려 아버지의 후계구도에서 밀려남으로써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그의 동생들 중에 능애를 제외하면 용개, 보개, 소개 등이 모두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능애 정도만이 친동생이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이복 동생이라 이래저래 눈치밥을 먹고 살아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18]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이 가설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견훤이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군인이 된 이유는 여전히 확실치 않으나, 어찌 되었든간에 견훤은 남다른 용맹함과 비범함으로 빠르게 출세하였다. 서남 해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된 견훤은 창을 베개삼아 적을 대비하였다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기상이 남달랐다. 덕분에 당시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인해 막장 분위기가 짙었던 신라 말기의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2.3 세력을 떨치다

고향을 떠나와 상경하여 군인이 된 견훤은 곧 착실히 경력을 쌓아 비장 벼슬을 받았다. 이후 견훤은 왕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서남해 일대의 호족과 해적의 무리(해상무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호족, 군진 세력)들을 공격하러 나섰다. 한창 명성을 떨치던 견훤이 군사를 일으키자 그가 이르는 곳 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열흘에서 보름 사이에 그를 따르는 무리는 무려 5천 여명이나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강력한 군사력을 손에 넣은 견훤은 마침내 숨겨왔던 야망을 드러내게 시작했다.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은 마침내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무진주(오늘날의 전남 광주)를 공략해 스스로 이라고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19] 그러나 아직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都督) 전무공등주군사(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 (…)라고 자칭했다. 요약하면 신라 서면 전주(완산주), 무주(무진주)의 도독이자 전주자사 대행 겸 어자중승 개국공이며 식읍 2천호의 녹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종 황제의 시호와 신돈의 관직명, 최충헌의 관직명[20]과 함께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긴 이름.[21] 이는 당나라 시대의 도독, 절도사 개념에서 만든 이름이다.

한편 또다른 추측도 있다. 견훤이 비장 벼슬을 얻고 조정의 명을 받아 서남해의 해적과 호족을 소탕한 것은 사실이나, 그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사불성을 근거지로 하여 군사를 일으켜 독립 세력을 이루자 이에 견훤 역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반역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에 아자개가 세력을 일으킨 일은 광계 연간, 즉 885년 ~ 887년 사이의 일이기에 조금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를 점령함으로써 이처럼 큰 세력을 떨치던 견훤은 당시 북원에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려줌으로써 스스로를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자임을 자처하였다.[22] 재미있는 것은 당시 양길이 훗날 견훤의 라이벌이 될 궁예의 주군이었다는 점이다.

2.4 백제 건국

900년, 서쪽을 순행하던 견훤이 완산주(오늘날의 전북 전주)에 이르자 완산주의 백성들이 몰려나와 견훤을 크게 환영했다. 마침내 자신이 인근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음을 알게 된 견훤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23]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黃山)을 거쳐 사비(泗沘)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이 말은 곧 견훤이 멸망한 백제의 뒤를 이어 신라를 무찌르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포부를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당시 완산주 일대는 과거 백제의 영토로써, 이 곳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백제 유민들의 후손인 현지 백성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백제의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처음 견훤이 세력을 일으켰던 무진주(광주)는 오늘날의 전남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5세기까지만 해도 마한의 계통을 이으며 옹관묘 문화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문화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백제의 부흥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반면에 백제에 대한 귀속 의식이 강했던 전북의 완산주(전주)는 백제의 계승을 명분으로 한 후백제의 개국에 딱 알맞는 곳이었기에 나라의 거점을 완산주로 옮긴 듯 하다.

이리하여 견훤은 완산주를 수도로 삼아 마침내 후백제를 건국했다. 이후 견훤은 관부와 정치체제를 갖추고 군사력을 정비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정식으로 왕(王)을 칭하고 국호를 정하는 한편, 편운화상의 부도에서 알 수 있듯이 900년부터 독자적인 연호인 정개(正開)를 사용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고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처음 무진주에서 세력을 일으켰을 때만 해도 스스로를 신라의 부용세력이라 자칭했던 태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견훤은 한편 외교에도 힘을 써서 나라를 세운 바로 그 해에 중국오월에 사신을 파견했다.[24] 이후로도 견훤은 후삼국중에서도 국제외교에 가장 신경을 기울였다.

2.5 궁예와의 대립과 나주 공방전

이듬해인 901년 8월,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러 나섰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견훤은 군사들 돌려 금성(나주) 남쪽으로 옮겨 연해변의 부락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돌아왔다.[25] 이 시기에 북원의 호족인 양길의 수하에 있던 궁예가 마침내 세력을 일으켜 양길의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후고구려(마진)를 세웠는데, 이후부터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특히 이 싸움은 나주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나주 공방전이 중심이 되었는데, 여기서 견훤은 수군에 능한 고려의 장수 왕건에게 번번히 패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26]

903년, 궁예는 장수인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배후를 치도록 명했다.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남해로 내려와 후백제의 해변가를 기습 공격하여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았다.[27]

이 싸움이 견훤에게 안겨준 타격은 엄청났다. 나주는 단순히 해상교통의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후백제의 도읍인 완산주의 근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후고구려는 나주를 발판으로 삼아 언제든지 후백제의 내륙지방에 침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두고두고 후백제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늘상 뒷치기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28]

909년에 견훤은 수군을 이끌고 다시 나타난 왕건과 나주에서 싸웠다. 왕건은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도를 함락시킨 후에 고이도로 나아갔다가 덕진포에서 견훤과 싸우게 되었다. 왕건군의 사기가 워낙 기세등등한 탓에 후백제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왕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을 질러 화공을 감행하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은 또다시 패배하여 500명이 전사하였으며, 견훤은 작은 선박을 타고 달아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즈음에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견훤이 처음 세력을 일으켰던 요충지인 무진주(광주)를 공격해오기도 했다. 무진주의 성주였던 견훤의 사위 지훤이 필사적으로 싸워 이를 막아내기는 했으나 이 역시 견훤에게 있어서는 실로 위기의 순간이었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나주를 10일 동안이나 포위 공격했으나 궁예가 수군을 내어 이를 방어하는 바람에 끝내 나주를 되찾지 못했다. 이후 912년에는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맞붙었으나 싸움의 결과를 전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싸움에서 궁예가 이겼을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며, 선각대사비에 따르면 궁예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견훤을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6 고려와의 쟁패

2.6.1 고려와 화친하다

918년, 궁예가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자 그의 수하였던 왕건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호전적인 궁예에 비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왕건과 화친하고 그 틈을 타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해에 견훤은 일길찬 민합을 보내 축하하고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인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했다.

한편 견훤은 같은 해에 중국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 좋은 을 바쳤는데, 이에 오월은 사신을 보내 답례했으며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관직을 더하여 주었다. 이러한 와중에 상주의 세력가였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왕건에게 투항해왔다. 아자개가 자신의 아들을 두고 고려에 투항해온 이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아자개와 견훤 사이에 불화의 기운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920년 10월, 견훤은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대야성 공략에 성공한다. 과거 대야성을 공격했다가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지 무려 19년 만의 일이었다. 대야성은 중요한 요충지로, 후백제군은 대야성을 빼앗음으로써 신라의 본토를 습격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것이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 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다시 물러났다. 그러나 견훤은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는 고려의 혼란을 이용하여 웅진(오늘날의 공주)까지 진출했다.[29]

2.6.2 조물성의 싸움

924년 7월, 견훤은 아들인 수미강[30]으로 하여금 대야성과 문소성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조물성(오늘날의 경북 김천)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물성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해 8월에는 고려 조정에 사신을 보내 절영도[31]의 준마를 선물로 바쳤다.[32] 이처럼 견훤은 한동한 고려를 상대로 싸움과 화친을 반복했다.

925년 10월, 마침내 견훤은 직접 3천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조물성 공략에 나섰다. 이에 왕건 역시 직접 정예병을 거느리고 나서 맞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세가 워낙 강하여 싸움은 결판이 나지 않았다. 결국 왕건이 화의를 청해 서로 볼모를 교환했다.[33] 견훤은 자신의 조카(혹은 사위)인 진호를 인질로 보냈으며 왕건은 사촌동생인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926년 4월, 고려로 보낸 진호가 죽자 이를 왕건이 죽인 걸로 오해한 견훤은 크게 노하여 볼모로 와있던 왕신을 옥에 가둬 죽이고 만다.[34] 이로 인해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927년 정월, 왕신의 죽음에 크게 노한 왕건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용주(경북 용궁)를 빼앗았다. 이에 상황이 커질 것을 우려한 견훤은 고려에 사신을 보냈으나 왕건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견훤이 간신히 함락시켰던 대야성마저 함락당하고 말았다.

2.6.3 서라벌 습격과 공산 전투, 승세를 잡다

927년 9월, 왕건의 거센 공격을 받은 견훤은 반격을 위해 환갑에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전장에 나타났다. 견훤은 신라의 근품성을 빼앗고 고울부(高鬱府)[35]를 습격했다. 이때 엉뚱하게도 견훤은 북쪽으로 진격하던 군사를 돌려 신라수도서라벌로 칼끝을 겨누었다. 견훤이 직접 지휘하는 후백제군은 파죽지세로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시)로 나아갔다.

이에 신라의 경애왕은 다급히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후백제군은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여 마침내 서라벌에 이르었다. 서라벌에 나타난 후백제군은 궁성을 점령하고 경애왕과 그 왕비를 사로잡았다. 견훤은 경애왕에게 항복의 예를 받은 뒤 그를 자진하게 했다.[36] 경애왕을 죽인 견훤은 경애왕의 사촌동생인 김부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었다. 또한 견훤은 신라 왕궁을 약탈하여 진귀한 보물들과 병장기를 빼앗고 신라왕의 동생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잡았으며 귀족 자제들과 실력있는 장인들도 잡아서 서라벌을 떠나갔다. 신라는 견훤에 의해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경순왕 역시 사실상 견훤이 옹립한 괴뢰왕에 불과했다. 여기서 견훤이 이 시기의 신라 왕족인 박씨에게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박위응을 죽여 없애고 그 자리를 김씨인 김부를 앉힌 것이다. 신라는 견훤 맘대로 왕을 갈아치울 정도로 빈껍데기만 남은 나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경순왕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935년에 스스로 왕건에게 찾아가서 항복했다. 이로서 근 1천년에 육박했던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이에 반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근데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기도 전에 병으로 급사하거나 요절했으면 마의태자가 신라 왕했을려나?옛날에는 현재보다 비교적 인간 평균 수명이 짧았던것을 감안하면..

한편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시중 공훤으로 하여금 1만 대군을 이끌고 서라벌로 진군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견훤은 서라벌을 떠난 후였다. 왕건은 철수하고 있는 백제군의 후미를 쳐서 급습할 계획을 세우고는 신숭겸과 김락 등의 장수들과 함께 정예 기병 5천명을 이끌고 공산(오늘날의 대구 팔공산)에서 견훤의 퇴각로에 숨어 매복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건의 작전을 간파한 견훤은 이를 역으로 이용할 계략을 세웠다. 후백제군은 오늘날의 대구광역시 공산 동수 일대인 팔공산에서 매복을 위해 진격해오던 고려군을 기습하였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일대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고려군은 견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고려군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선봉을 이끌던 김락이 전사하였다. 결국 고려군은 참패를 면치 못하였으며 견훤은 왕건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갔다. 이때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은 스스로 왕의 복장을 갖추고는 목숨을 내던져 백제군을 유인했다. 왕건은 덕분에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으나 신숭겸은 끝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았다.

왕건을 크게 무찌른 견훤은 곧이어 승세를 타고 나아가 대목군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었으며 왕건 역시 견훤에게 답서를 써서 보냈다. 이 싸움을 후대에는 공산 전투라 부른다. 이 공산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 견훤은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위세를 떨쳤는데, 그 영역이 오늘날의 충북, 경북 일대에까지 이르었다.

견훤은 928년 5월에 강주를 공격하여 300명을 죽였으며 장군 유문의 항복을 받았다. 8월에는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빼앗긴 대야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또한 11월에는 부곡성을 공격하여 1천여명의 고려군을 죽이고 장군 양지와 명식 등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직접 5천 군사를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하여 왕건의 심복인 홍술이 전사했다. 홍술이 전사했을 당시에 왕건은 "나의 좌우 팔을 잃었다."라고 말하며 통곡할 정도로 고려의 상황은 심각한 지경에 빠졌다.

또한 비록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 즈음에 견훤은 승세를 타고 과거에 빼앗겼던 나주를 탈환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왕건이 수군을 몰고와서 나주 일대의 군현을 빼앗아간지 무려 20여년이 흐른 후였다. 비록 해전에 능한 왕건이었으나 이미 참패를 당한 상태에서 나주를 구원할 엄두를 내지 못햇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고려사 유금필열전의 '나주를 견훤에게 빼앗겼다'는 언급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로써 견훤은 고창 전투에서 패배를 겪기까지 일생 최대의 세력을 거느리고 한반도 최강의 세력가로 떠오른다. 그때 견훤의 나이는 무려 62세였다.

2.6.4 고창 전투, 내리막길을 걷다

고려와의 싸움에서 연이어 승리한 견훤은 마침내 고창(오늘날의 안동)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견훤은 경상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고려군을 무찔러왔으며, 고창은 경상도에 남아있는 고려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929년 12월, 견훤은 3천명의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던 고창을 포위했다.

후백제군의 군세가 워낙 기세등등하였기에 한창 수세에 몰려있던 왕건은 차라리 고창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게 된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의 명장 유금필이 나서서 왕건에게 고창을 구원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때마침 견훤이 서라벌에서 경애왕에게 저질렀던 만행에 분개해있던 고창의 호족들인 삼태사가 적극적으로 왕건에게 협력해왔다.[37] 이들은 대대로 고창에 살아왔었기 때문에 고창의 지리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던지라 고려군에게 있어 막강한 지원 전력이 되어주었다.

견훤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고창의 병산에 진을 친 왕건과 맞붙었다. 그러나 고창 토착세력의 지원과 희대의 먼치킨명장 유금필의 활약에 힘입은 고려군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군은 참패했으며 8천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고창 일대의 30개 군현이 고려에 투항했다. 이를 후대에는 고창 전투라 부른다.

이 싸움의 여파는 대단해서 신라의 왕도인 경주를 비롯하여 경상도를 거의 다 집어삼키고자 했던 견훤의 뜻은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그에 따라 백제의 속국으로 전락해있었던 신라에 대한 영향력도 거의 상실하였다. 싸움의 주도권 또한 고려 측으로 넘어가 공산 전투 이후로 견훤이 탈환하였던 나주도 다시 고려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에 따라 후백제에 속했던 호족들의 이탈도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견훤은 고창 전투를 치른 다음날에 패하여 물러나는 와중에도 순주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성주인 원봉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성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서 전주로 끌려갔다. 때문에 기록과는 달리 견훤이 고창에서 그리 크게 패하지 않았으며, 피해도 크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2.6.5 바다로의 반격

932년 6월, 견훤의 심복으로써 지략과 용맹이 남달랐던 장군 공직#s-2이 고려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견훤은 공직의 투항에 격분하여 공직의 두 아들 직달, 직서, 공직의 딸을 잡아 뒷발꿈치의 힘줄(아킬레스건)을 불로 지셔서 끊어 버렸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고창전투 이후로 견훤의 세력이 다시 꺾이면서 후백제의 여러 호족 세력이 고려에 투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해의 9월, 견훤은 다시 고려에 반격을 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이전의 싸움과는 달리 배를 이용한 수전이었다. 견훤은 수군장군인 일길찬 상귀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바다를 공격하도록 했다. 왕건은 본래 수전에 능했고 그동안 견훤과 수전에서 맞붙어서는 패한 일이 없었는데 견훤은 오히려 이 점을 노리고 빈틈을 치고 들어간 것이다. 상귀는 서해를 통해 예성강으로 들어와 무방비상태의 고려 수군을 급습하였다. 상귀가 이끄는 수군은 3일을 머무르면서 염주, 백주, 정주 등에 정박해있던 고려의 선박 1천여척을 불지르고 300필의 군마를 약탈해 돌아왔다.

또한 견훤은 장군 상애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대우도를 약탈했다. 왕건은 이에 맞서 대광만세를 보냈으나 그 역시 백제 수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 근방의 백령도에 귀양가있던 고려의 명장 유금필이 인근 어부들과 병사들을 모아 노략질을 일삼는 상애와 맞서 싸웠으므로 간신히 상애를 몰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견훤은 수세에 몰려 있던 중에도 허를 찌르는 계략으로 왕건의 뒷통수를 치고 고려 수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2.6.6 운주 전투, 몰락의 종지부

934년, 견훤은 다시 운주(오늘날의 홍성)에서 다시 고려군과 맞붙었다. 견훤은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군과 대치했는데, 백제군이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인간흉기 유금필이 수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공격을 시도했다.

이로 인하여 백제군은 또다시 크게 참패하여 견훤은 3천명의 군사를 잃었다. 또한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의 용장인 상당과 최필 등이 고려군에 사로잡혔는데, 왕의 최측근에서 보좌해야 할, 왕의 심복들이 사로잡힌 사실은 당시 견훤이 유금필의 기습공격에 밀려 일방적으로 달아나기 급급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 운주 전투로 인하여 고려는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은 반면, 후백제는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다. 공주 일대의 30군현, 동해연안의 110여개의 성이 고려에 투항하는등 호족들의 이탈도 심화되어갔다.

2.7 몰락과 말년

2.7.1 폐위당하다

운주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늙은 견훤은 뒤를 이을 후사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견훤은 평소에 자신이 총애하던 총명한 넷째아들 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견훤의 장남이었던 신검은 이를 알고는 번민하다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찬 벼슬을 지내던 능환은 신검과 결탁하고는 신검의 두 아우인 강주도독 양검과 무주도독 용검 등과 은밀히 음모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 3월에 파진찬인 신덕과 영순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 난을 일으켰다. 신검은 아버지인 견훤을 폐위하여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살해하였다. 이로써 견훤은 왕위를 잃고 말았는데. 892년에 왕을 칭하며 세력을 일으킨지 43년 만이었다.[38] 견훤을 몰아낸 신검은 반발 세력을 억누르고 대왕이라 자처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른 새벽에 견훤이 잠들어있다가 대궐 뜰에서 고함소리가 들리자 웬 소란이냐고 묻자 신검이 나타나 말하기를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애초에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와 군대의 업무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한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금산사 불당으로 아버지를 옮기고, 파달(巴達) 등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는 견훤이 금산사에 감금당한 후에 한 노래가 널리 퍼졌다며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사는 이와 같다.

가엾은 완산(完山) 아이

아비를 잃어 울고 있도다[39]

2.7.2 고려에 망명하다

맏아들에게 배반당해 권좌와 자식을 잃고 금산사에 유폐당한 견훤은 울분을 터뜨렸고, 반드시 빠져나가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감금당한지 3개월만인 935년 6월, 견훤은 막내아들인 능예와 딸 쇠복, 애첩인 고비 등과 더불어 금산사를 탈출했다.[40]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아직 고려군의 수중에 있던 나주로 찾아가서 고려 조정에 입조하여 귀순할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청했다. 이에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유금필과 대광만세 등을 보내 40여척의 배를 거느리고 가서 견훤을 데려오도록 했다.

견훤이 마침내 고려 왕궁에 이르자 왕건은 견훤을 깍듯이 예우하며 모셨는데 그 대접은 거의 파격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나이가 거의 10살정도 많다고 하여 상보(尙父)라 높여 불렀으며 남쪽 궁궐에 숙소를 정해주고 그 지위는 고려 백관의 위에 두도록 하였다. 또한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금과 비단, 병풍과 금침, 노비 40명, 말 10필을 주었다.

이처럼 왕건이 견훤을 환대한 것은 견훤이 후백제 침공을 위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명분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후백제가 연이어 패배해왔지만 아직 비옥한 곡창지대와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고려와 비교했을때 결코 힘이 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견훤의 고려 귀순은 후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또한 견훤이 고려에 귀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라경순왕 역시 그해 11월에 고려 조정에 귀순했다.

2.7.3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 멸망

견훤이 쫓겨난 후 그렇지 않아도 연이은 패배로 혼란에 빠져 국운이 기울던 후백제의 앞날은 더욱 어려워졌다. 건국왕인 견훤을 몰아내고 왕이 된 신검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대단했기 때문이다.[41] 게다가 견훤이 적국인 고려에 귀순하자 후백제는 호족부터 백성들까지 심한 동요에 휩싸였다. 이처럼 혼란한 와중에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였던 장군 박영규는 그 아내와 더불어 왕건과 내통을 하며 항복할 의사를 전해오기까지 하였다.

936년 6월, 견훤은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주청하였다. 왕건은 이에 호응하여 태자인 무(武)와 박술희 등으로 하여금 출정준비를 서두르도록 명하니 마침내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마지막 일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해 9월에 왕건은 앞서 군사를 이끌고 천안에 가있던 무와 박술희 등과 군사를 합쳐 나아갔고, 신검 역시 이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때 견훤 또한 왕건과 함께 출정했다. 신검, 당신의 아비가 돌아왔소, 후백제를 파멸할 것이오!

그해 9월, 고려군은 일리천[42]을 사이에 두고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대치했다. 이미 70이 다 된 나이로 다시 전장에 나선 견훤은 왕건과 함께 고려군을 열병했다. 곧 십만여 명[43]이 넘는 고려군이 행진을 시작하니 마침내 일리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때 자신들이 모시던 왕이 적진의 선봉에 서있는 모습을 본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후백제군의 좌장군인 효봉과 덕술, 애술, 명길 등은 고려군과 견훤의 위세에 겁을 먹고는 무기를 버리고 견훤이 탄 말 앞으로 와서 항복하였다. 이들은 한술 더떠서 신검이 백제군의 중군에 있다는 기밀도 알려주었다.

왕건은 곧 군사를 몰아쳐 신검이 지휘하는 중군을 공격하게 되니 후백제군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 3천 2백여명이 사로잡혔으며 5천 7백여명이 죽었다. 크게 패한 신검은 황산[44]까지 달아났다가 그 곳에서 두 동생인 양검과 용검, 장군인 부달, 소달, 능환 등과 더불어 왕건에게 항복하니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했다.

왕건은 능환이 신검을 꼬드겨 아버지인 견훤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등 반역죄를 저지르게 만든 책임이 있다고 하여 참수형으로 벌하였고 양검과 용검 등도 죄를 몰아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그러나 신검만큼은 남의 강요에 의해 원치 않게 왕이 되었으니 근본적으로는 죄가 가볍다하여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었으며 한술 더떠서 관직까지 내렸다.[45]

2.8 죽음과 사후

2.8.1 사망과 의혹

후백제가 멸망한 후 견훤은 번민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자식들과 벌였던 권력투쟁으로 인해 받은 마음의 상처와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망하게 한데에서 온 정신적인 고통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46] 결국 견훤은 936년, 황산(태조가 '천호산'으로 개칭) 근처의 사찰(개태사로 추정)에서 등창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후백제가 망한지 겨우 며칠 만이었다. 이때 견훤의 나이는 70세였다.

일각에서는 독살 또는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는데, 죽기 직전까지 전투에 참전 할 정도로 혈기왕성한 모습을 보인 사람이 갑자기 등창으로 죽었다는 것은 분명히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실제로 견훤이 타살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다름아닌 왕건이다. 왕건의 입장에서 본다면 견훤만큼 통일왕조에서 걸림돌이 되는 존재도 없었을 것이며. 실제로 통일직후 견훤이 죽어서 구심점이 없어진 후백제 세력들은 그 후 자연스레 도태되었다. 게다가 견훤이 생을 마친 곳은 전주나 개성이 아닌 왕건이 세운 개태사(추정)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뭐 당시에 이미 70이 다 된 노인이었는데다, 허망함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직후에 바로 무너져내렸을 지도 모른다. 거꾸로 견훤이 죽은 자리에 왕건이 이를 애도해 큰 절을 세웠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견훤을 죽이는게 도리어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전라도 지역의 호족들의 불안감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야 되었건 견훤은 후백제의 왕이었으니 동시에 그 지역 호족 대빵급인데 이런 사람을 죽이면? 호족들이 "어? 죽였네? 그럼 이제 우리 차례겠지?" 하며 대들수 있다.

2.8.2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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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이 죽은 후에 그 시신이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견훤이 사망한 황산, 즉 오늘날의 충남 논산에는 견훤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일명 견훤릉이 남아있다. 오늘날에는 견훤왕릉이라 하여 충청남도 기념물 제 26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본래에는 비석에 '견훤릉'이라는 글귀가 있었으나 사극 태조 왕건이 대히트를 치자 지역 사회의 관심이 늘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새로 비석을 세우고 글귀도 '견훤왕릉'으로 바뀌었다.

한편 견훤의 고향으로 알려진 경상북도 상주시에서는 견훤을 산신으로 추앙하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선 후기에 지역 주민들이 견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견훤의 사당은 아직도 남아있는데, 내부에는 '후백제 대왕 신위'를 모시고 있다. 다만 일국을 창건한 왕의 사당 치고는 너무도 작고 협소하여 망국의 한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견훤이 사망한 후에도 그의 후손들은 살아남아 고려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계를 이어갔다. 아직까지도 견훤을 시조로 섬기는 전주 견씨[47][48]가 남아있으며, 무엇보다 견훤의 후손이 가문의 가계에 대해 남긴 기록으로 짐작되는 이제가기(李帝家記)의 일부가 고려 시대에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어 당시까지도 견훤의 가계에 대한 전승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능히 짐작케한다. 아쉽게도 이 기록은 현존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부 내용만이 전해질 뿐이다.

3 가족 관계

견훤의 가족들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견훤 열전과 삼국유사의 견훤 열전 등에 남아있으나 저마다 차이가 있어 그 전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이 여러 처첩을 두어 1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전한다. 이중 이름이 드러나는 인물은 견훤의 장자인 신검과 그의 두 아우인 양검과 용검, 그리고 넷째인 금강 등이다. 또한 견훤이 조물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에서는 견훤의 또다른 아들인 수미강(須彌强)[49]이 등장하며,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하는 대목에서는 애첩 고비(故比),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등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사서인 이제가기를 인용하며 견훤에게 9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견훤의 맏아들은 신검(神劍)[50]이며, 둘째는 태사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는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 청구(靑丘)라고 한다. 또한 딸은 국대부인(國大夫人)이며 이 모두가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이었다고 전한다.

4 평가

4.1 긍정

견훤은 한때 고려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 세우고, 1000년을 이어온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군주였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야전사령관이었고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전술적 면모도 갖추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별다른 빽도 없이 경주로 들어가서 순수한 실력만으로 비장 벼슬을 얻은 것만 봐도 그 실력만큼은 확실하다. 그것도 부정부패가 하늘을 찔렀던 신라 말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대단한 것이다.

특히 군사적 재능만 따지면 왕건보다 한 수 위로 볼 수 있다. 소수의 군사로 남해안을 휩쓸고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것도 탁월하지만 2차례의 조물성 전투에서도 왕건을 밀어붙였다. 특히 걸작이라 할만한 것은 공산 전투다. 신라와 고려의 합작에 의해 전략적으로 상주 지방으로 진출이 봉쇄당하고 북쪽의 고려와 동쪽의 신라, 남쪽의 대야성에 주둔한 김락의 군세에 협공당할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도 고려군의 약점을 꿰뚫어보고는 고려군 전선의 간극을 치고들어가 금성을 유린하고 급히 달려오는 왕건을 요격해 그야말로 박살을 내버렸다. 고창 전투에서도 호족세력들이 왕건의 편을 들기 전까지는 후백제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물론 해전에서는 왕건을 이기기 어려워 나주를 빼앗겼지만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반격을 개시하여 나주를 탈환하고 고려군에게 한방 먹이기까지 한다.

사실 견훤은 아주 전형적인 자수성가적 인물이라 볼 수 있었다. 비록 아버지 아자개가 호족이라고는 하나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말단 군인으로 시작해 불과 몇년만에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아 장군의 자리에 올랐으며, 사실 지방에서 세력을 일으키게 된 계기도 서남해로 발령받아 그 곳에서 스스로 병사를 모으고 힘을 길러 해적과 해상 호족들을 진압하면서 부터였으니 그야말로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켜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성격이 독선적인 면이 강하다고도 한다. 그 결과, 호족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인 신검 대신에 후처의 아들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했다가 뒷통수를 맞았다는 평도 있다. 반면 왕건은 뒷배경부터가 빵빵하다.

재능도 상당했지만 그 끈질긴 근성도 대단하였다. 무려 60대가 넘은 나이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왕건과 맞붙어 수차례 승리한 바 있을 정도였으며, 그 오기와 끈기 또한 대단하여 신라로 통하는 요충지인 대야성의 경우에는 20여년간이나 공을 들인 끝에 점령하였고 왕건이 궁예의 신하를 지낼 적에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빼앗아버렸던 나주를 다시 십수년의 공을 들여가며 키운 해군으로 도로 빼았고 그 여세를 몰아 개경 부근에까지 진출하여 군수물품을 약탈해 왔다는 기록도 있으니 그야말로 근성의 화신이라 불릴 만하다. 육전과 해전 양면에서 고려군을 잘근 잘근 씹어드셨다(...).

또한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견훤의 과격한 행보와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영향으로 대체로 호방한 성격 탓에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호족들을 휘어잡는 솜씨는 호족들의 지역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도와 개호를 반복하고 미륵신앙을 이용해 공포정치를 통한 왕권강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자멸한 궁예를 능가했으며, 나주 지역의 지지를 견훤이 얻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사성청책과 결혼동맹으로 철저한 왕권강화보다 호족간 군신의 동맹을 맺는 1차적 차원에 왕건이 머물렀던 점을 감안한다면 왕건과 견줄만 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던 궁예가 결국 중앙집권화에 실패하여 호족의 대표격인 왕건의 손에 죽고 광종 이전의 초창기 고려가 호족 연합정치의 성격을 띄고 말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4.2 비판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결단력과는 달리 장기적인 비전에서는 부족했다. 완산주에 도읍하면서도 나주의 호족들과 화합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양면전선을 초래했고, 전광석화같이 신라를 급습하고 공산에서 대승을 거뒀음에도 신라에 친 백제 세력을 구축하는데 실패했다. 물론 견훤 딴에야 경순왕을 즉위시키면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이후 경순왕은 금새 왕건쪽으로 기울어버린걸 볼 때 견훤이 신라에 대해 지속적인 영향력을 구축하는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신라의 왕과 귀족을 참살하고 별다른 대책 없이 떠나버린 결과 신라 및 신라 기반 호족들은 더더욱 고려쪽으로 기울게 되고 이는 고창 전투에서 참패의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견훤의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후백제의 세력은 그 결과에 비해 크게 불어나지 않았고 호족 세력을 효과적으로 포섭하는데는 실패했다.

물론 견훤에게도 가장 좋은 삼한통일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왕건의 쿠데타로 인해 궁예가 몰락했던 시기인데 왕조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속에서 친 궁예세력의 이탈이 끝없이 줄을 이었다. 굵직굵직한 것들만 나열하자면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건의 목에 칼을 겨눈 환선길이나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흔암, 공주의 임춘길 그리고 명주(강릉)의 김순식 등등 모두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이다.[51] 철원에서는 끝없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지방에서는 성주들이 후백제에게 투항해 버리는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고려는 공중분해 되고 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최고의 호기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견훤이 '(궁예의) 왕위를 찬탈한 역적(왕건)을 토벌한다'를 구실로 토벌군을 일으켜 고려를 공격했다면 승산이 얼마나 되었을까? 하지만 견훤은 이런 엄청난 호기를 그냥 흘려보내면서 도리어 왕건에게 즉위축하사절단을 보내버렸고 외부에서의 지원이 없자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은 모두 제거 당하였고 왕건의 통치기반은 안정화되었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서도 신료 및 호족들의 반대에도 기어이 장남 신검이 아닌 금강에게 물려주려 했던 것은 치명타였다. 본인의 아집이 결국 마지막 지지세력까지 날려먹은 꼴이 되었다. 결국 본인은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이후 후삼국 통일의 대업은 왕건이 이루고 만다.

삼국사기 열전은 바로 견훤 열전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고려의 통일을 진정한 통일로 보는 김부식의 시각 때문이라고. 김부식은 사론에서 궁예와 견훤을 함께 평하고 있는데, "옛적 중국의 항우나 이밀[52]은 뛰어난 재주를 가져도 결국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했는데, 궁예나 견훤 같은 흉한들이 어찌 우리 태조께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모두 우리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모아준 이들일 뿐이다"라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5 성에 대한 논란 : 훤인가 훤인가

이름을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는 설이 있다. 甄은 성으로 읽을 때 보통 진씨로 읽기 때문이다. 견희로 알려진 문소황후 진씨가 예. 거기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甄의 음을 진(眞)이라고 써져 있는 것도 근거 중 하나... 때문에 이 인물을 다룬 이도학 교수의 책 제목은 대놓고 진훤이라 불러다오다. 과연 올까?[53][54]

이는 피휘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손견의 견(堅)자와 더불어 발음이 같은 견(甄)자를 사용할때도 같은 발음을 피하기 위해 진이라고 읽게 되었고 이것이 신라에도 들어와 발음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냥 그분의 성함을 손진이라고 하면 안 되나? 손견은 오나라에서는 시조 무열황제라는 시호를 받고 황제로 추숭된 인물이며 이 때문에 피휘가 이루어진 것이다. 삼국지에서 피휘의 대상이 되는 인물로는 손견, 조조, 관우, 사마의 등이 있다.

''자의 특성상 견으로 잘못 읽는 사람도 가끔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중국에서 뭐라고 부르든 한국에는 한국 고유의 독자적인 음이 있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예로 김씨가 있다. 金은 중국에서는 금이라는 뜻으로 부르든 성씨로 부르든 발음은 동일하게 jīn 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성으로 부를 때나 지명에서 사용할 때는 김해, 김천, 김제의 예에서 보듯이 항상 김이라고 한다.(다만 금천(金川)이라든가 최근에 金자를 넣어 만든 지명은 예외적으로 금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견씨 족보에 비록 고려시대에 진씨를 견씨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다른 역사적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족보는 원래 조작이 심하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게다가 한국의 족보 자체가 거의 조선시대 중후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족보가 만들어질 당시에 잘못된 사실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김씨도 예전에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며 나무(木)을 이기는 쇠(金)라고 하여 김씨로 바꾸게 했다는 드립이 있었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한국의 견씨가 항상 견씨라 불려온 이상 견훤은 당연히 견훤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뭐라고 부르든 한국에서 견씨(甄氏)를 견이라고 부르는 이상 문소황후도 진희가 아닌 견희라고 불러야 한다는 설 또한 상당히 강력하다. 비슷한 예로 김용, 김일제, 김성탄의 경우 중국 발음에 상관없이 한국에서 金이 김으로 읽히기 때문에 다 김이라고 표기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있어서 금용, 금일제, 금성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소수 존재하고 있다.

더구나 견훤의 경우 甄자를 성으로 썼는지부터가 미지수다. 기록된 그의 가족을 보면 견훤만 甄자를 쓰고 있다. 아버지는 아자개, 동생은 대주도금, 아들은 신검, 금강 등, 모두 견자를 쓰고 있지 않다. 또한 성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신라 말기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견훤의 출신을 생각하면 甄자를 성으로 보고 진훤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급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신 이 시대는 성을 직접 만들던 시기이므로 일말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해도 아들들이 모두 甄자를 쓰지 않는 것을 보면[55] 견훤에게 성이 있었어도 기록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甄자가 성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견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아보인다.

이쪽 견해를 참조해보는것도 좋겠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관용적으로 굳어진 견훤을 사용하는게 가장 무난하다는 것. #

6 대중문화 속의 견훤

6.1 태조 왕건

6.2 천년의 신화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도 고려측의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다. 말을 타고 다녀서 기동력이 높을 뿐만 아니라 공격력이나 체력 등도 다른 영웅 유닛보다 높고 무엇보다 메카닉 유닛은 한 방에 서너대는 날려버릴 수 있는 '발도검기'라는 기술을 쓴다.

6.3 소설 견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동인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동명의 장편 소설을 연재한 적도 있었다. 30년대에 발표되어 5, 60년대까지 재출간된 모양이지만 오늘날에는 절판된지 수십년이 넘었기 때문에 무척 희귀한 서적이 되었다.

그래도 이후에 재출판되었는지 북큐브의 전자책도서관에서 1 ~ 4권 전권이 존재한다. 오늘날에는 저자가 사망한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이기 때문에 위키문헌에서도 전문을 감상할 수 있다.

극중에서 견훤은 소년 시절 하룻밤을 보낸...?![56] 궁예와 야심을 나누는데, 이후 궁예가 왕위에 오른 이유가 견훤의 세력에 대한 열폭의 주이유일 정도로 비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진성여왕이 견훤을 유혹하고 견훤은 별을 보고 궁예의 죽음을 감지하는 등 흡사 조조와 제갈량을 섞어놓은 듯한 먼치킨적 행보를 보여주지만 스승의 예언대로 자식운을 극복하지 못한다.

6.4 맹꽁이 서당

맹꽁이 서당 고려편에서는 훈장님이 위인 궁예에 대해 설명하려 하자 갑자기 서당에 난입해 궁예를 까내리고는 돌아간다.(...)[57]
성씨인 견(甄)씨 때문에 궁예에게 개(견/犬)씨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하고, 이에 질세라 견훤도 궁예를 가리켜 애꾸놈, 땡추라고 응수한다.
전체적으로 궁예보다 포스 있게 나온다. 물론 작품이 작품이다 보니 그게 그거지만... 맹꽁이 서당에서는 견훤이 후백제가 망한 후 막상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없앴다는 자괴감과 허무감으로 인해 마음의 병을 앓다가 사망했다고 나온다.

6.5 태조왕건 스타크버전

태조왕건 스타크버전에서는 히드라리스크로 등장하는데 견훤드라라고 한다.
  1. 태봉궁예도 한때 정개(政開)라는 연호를 썼는데 한자가 다르다.
  2. 성씨로 쓸 때는 "진"이라고 읽는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문단참조.
  3. 칭왕한 해
  4. 공식적으로 후백제 왕조를 건국한 해
  5. 지금의 광주광역시
  6.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7. 당시엔 '후백제'는 '백제'라고 불렸다. 현재 '후'자를 붙이는 이유는 고대 백제와 구분하기 위함이다.
  8. 견훤의 출생년도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9. 이 지역에선 아직도 구비문학 답사를 가면 견훤설화가 나온다 !!
  10. 당시엔 상주가 지금보다 규모가 컸다. 애초에 경상도가 경주의 "경"과 상주의 "상"을 따서 경상도이니...
  11. 885~887년 사이의 시기이다.
  12. 작진은 백융부인의 셋째 아들이었던 구륜공의 손자다.
  13. 사극인 태조 왕건에서의 박술희 와의 로맨스는 사실이 아니지만 이 이름들은 모두 역사에 있는 이름들이다.
  14. 한가지 특기할 사실은 견훤 탄생 설화인 지네 설화가 동북아 보편적인 설화였다는 점이다. 일본에만 지네가 아버지인 설화와 민담이 약 천 여개, 중국에도 수없이 발견된다. 후삼국 시대엔 이미 신화에 의한 지배 이념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단 증거다.
  15. 이 소문이 견훤이 살아 있을때도 있었던 모양인지, 견훤을 치러 가기 전에 왕건쪽에서 소금을 대량으로 뿌리는 의식을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렁이에게 소금은 상극이기 때문.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과 견훤 세력 둘 다 전염병으로 큰 고초를 겪고 있을 때 견훤은 지렁이를 달여먹어 병을 고쳤다는 묘사도 나온다. 여기서는 견훤의 친부가 멀쩡히 살아 등장하기 때문에 태몽이 지렁이였다는 식으로 어레인지했다.
  16. 족보 기록상의 내용이기에 참조정도만 될뿐 신뢰하기는 어렵다.
  17. 비록 아자개가 농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후에 호족 세력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부를 갖춘 부농 정도의 신분이었거나 고향에서 제법 위세를 떨치던 토호 세력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18. 게다가 결정적으로 견훤은 아버지인 아자개의 성씨인 이씨 성을 버리고 견씨 성을 취했다. 이 때문에 분명 견훤이 어릴적부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는 설이 있다.
  19. 후에 견훤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틀 것을 요청하자, 일본 조정에서는 견훤이 왕이 아니라 신라의 도통사에 불과하다는 핑계로 이를 거절하였다.
  20.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
  21.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공식인 고종에 비해서 신돈이나 최충헌, 견훤의 경우는 이것저것 제외해야 되는 것들이 좀 있다. 공신명이나 작위들은 관직명이 아니고, 견훤의 식읍이천호 역시 마찬가지. 공식적으로 따지면 압도적으로 1위는 60자가 되는 고종의 시호인데 이건 거의 불릴 일이 없고, 최충헌이 공신명 등을 제외하면 46자, 견훤이 42자인데 한남군 개국공이 좀 애매하고, 신돈이 총 50자에서 이것저것 제외하면 33자, 대충 랭킹은 이정도다.
  22. 물론 양길은 거부했다.
  23. 지금의 익산이다.
  24. 사신을 보낸것 뿐만 아니라 오월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망해가던 당에게 책봉받았던 신라나(이후 생긴 후당은 좀 멀쩡하긴 했다.) 중국과의 조공 책봉 관계는 아오안이던 후고구려와 고려, 요에게 두들겨 맞던 발해에 비해서 중국 내에서 정통성은 이쪽이 제일 높다. 게다가 오월국이 연호를 제정하고 독립국화했으면서도 오대 제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음을 생각하면 견훤이 "내 등뒤에 중국 황제 있다"라고 해도 100% 뻥카가 아니다.
  25. 아무래도 이후로 나주 일대가 후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간 듯 하다.
  26. 나주 공방전에 대한 기록은 특히 고려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7. 본래 나주는 금성이라 불렸으나 이후로 이름이 바뀌어 나주로 불리게 되었다.
  28. 실제로 909년에 견훤이 중국 오월에 보냈던 사신단이 해상에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잡히는 일까지 있었다.
  29.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두고 견훤이 겉으로는 왕건과 화친하였으나 속뜻은 완전히 달랐다고 비난했다.
  30.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과 동일인물로 추정되지만, 신검이 아니고 동생 금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31.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섬의 이름의 유래는 삼국지 미디어에서 조황비전과 함께 명마로 나오는 절영과 같다.
  32. 고려사에서는 준마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갈기와 꼬리가 푸른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3.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이 전세가 불리해져 화친을 청했다고 기록했지만 고려사는 견훤이 먼저 화의를 청하였다고 기록했다.
  34. 이에 대해서는 최근 진호가 정말로 암살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왕식렴 암살배후설을 썼다.
  35. 오늘의 경북 영천
  36. 고려 측의 기록에는 견훤이 왕을 자살하도록 강요하고 그의 왕비를 능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견훤이 고려에 보낸 서신에는 경애왕이 스스로 죽은 것으로 적혀있다.
  37. 이들 삼태사들은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었는데 훗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들이다.
  38. 후백제를 건국했던 900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재위에 35년간 있었다.
  39. 이 노래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데, 평생의 기업을 망친 견훤의 탄식이라는 견해, 강력한 군주였던 견훤을 잃은 후백제 백성들의 한탄이라는 견해, 부왕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신검 일파의 고뇌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마지막 해석의 경우 신검이 자의로 반란을 일으켰다기보다는 견훤에게 불만을 품은 파벌들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견해와 맞물리는 듯.
  40. 삼국유사에서는 935년 4월에 견훤이 금산사를 지키던 파달 등 30명의 장사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달아났다고 전하고 있다.
  41. 신검은 935년 3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본격적으로 국정을 장악하여 사면령을 내린 일은 수개월이 지난 10월의 일이었으므로 신검에 반대하는 세력이 그만큼 많았음을 뜻한다.
  42. 오늘날의 경북 선산
  43.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진 것이고 고려사에는 8만여 명이라고 적혀있다.
  44. 오늘날의 충남 논산 연산면, 공교롭게도 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바로 그 황산벌이다.
  45.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신검 역시 아우인 양검, 용검 등과 함께 처벌을 받아 죽었다는 설이 있다며 주석을 달고 있다.
  46. 고려사에서는 자신을 배신한 신검이 멀쩡히 살아나가자 이에 울화가 치밀어 병이 들어서 죽었다고 전한다.
  47. 2000년 기준으로 전주견씨는 219가구 총 748명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에도 딱히 크게 벼슬을 했던 인물이 없어 족보 위조의 영향도 적었을테니 아마 실질적인 견훤의 후손들이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을것이다.
  48. 탤런트 견미리가 바로 견훤의 후손이다.
  49. 금강과 동일인물로 보는 학설도 있다.
  50. 그 이름을 견성(甄成)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51. 김순식은 왕순식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왕건 편에 서지만 나머지는 저세상으로 갔다.
  52. 수당 교체기에 활약한 군웅으로 재주가 비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끝내 당태종에게 패하고 죽었다.
  53. 만일 견씨를 진씨로 바꿔 읽는다면 견미리씨와 같은 현대 한국의 견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전부 진씨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견씨들의 개인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듯 하지만, 그동안 역사책 등으로 알려진 조상 이름도 고쳐쓰게 만든 근성의 문화 류씨가 있다.
  54. 견씨 집안에서는 고려왕조의 탄압을 피해 성의 음을 바꿨다고 전해지므로 조상님만 음이 변해도 상관없을듯.
  55. 다만, 맏아들 신검이 '견성(甄成)'이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긴 있다.
  56. 당연히 그건 아니고, 말 그대로 한 방에서 잠만 같이 잔 것이다.
  57. 이때 하는 말 - "위인은 무슨 위인, 말세가 되니 중놈까지 절간을 뛰쳐나와 설쳐댄 거지. 그놈 얘긴 하덜 마슈. 애꾸놈 땜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 나랑 앙숙이라구." 이후 돌아갈 때 묘사를 보면 하늘에서 구름차를 몰고 직접 내려왔다(...), 훈장님은 못막았다고 밖에서 경비서던 마당쇠를 갈구지만 이게 어디 일반인이 막을 레벨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