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고로

1 실존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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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고로(三浦梧楼)
1847년 1월 1일 ~ 1926년 1월 28일

1.1 개요

일본의 군인 정치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우는 국제적으로도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이며, 정계의 막후로 활동하면서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 성립에 관여함.

조슈 번에서 출생했고, 에도 막부 타도운동에 참여하여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후 신정부의 군인이 되었다. 1878년 육군중장이 되었고 1888년 예편 후 1890년에 귀족원 의원을 거쳐 1895년 주한공사로서 조선에 부임한 그는 10월 8일 새벽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군과 경찰 및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태워 버리는 국제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중범죄를 저질렀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니라 않고, 살해된 명상황후가 마치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시켜 명성황후를 폐서인 조치를 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궁궐에 있던 미국인 다이(M.W.Dye)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H.N.Sabatin)이 현장을 보게 되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살해 혐의로 일본에 소환되었고 잠깐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1] 이후 공을 인정받았는지 1910년 추밀원의 고문관이 되었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한국 식민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일본 정계의 배후 조종자로서 흑막의 역할을 담당했고,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를 설립하는 데에 관여했다.

그러다가 1926년 80세의 나이로 요독증[2]으로 인해 지옥으로 갔다. 이 놈이 한 짓에 비하면 저것도 안락사다.

1.2 왜 을미사변을 일으켰는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고종 32년 8월 21일 새벽 일본군, 경찰과 낭인들을 동원해서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국제적 범죄인 을미사변의 총책임자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은 조약을 맺고 청나라에 배상금을 부과시키고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략을 경계한 러시아 제국이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저 새끼 밟아버려야 함"이라고 협의했다. 그렇게 나란히 손잡고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를 포기하도록 일본에 요구협박을 했고 결국 집단 다굴에 굴복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납하게 되었고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파악한 조선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내정에 깊이 관여해왔던 일본 세력을 날려버리고 독자적으로 개혁 노선을 가지려는 움직임을 시도하였다. 이때 조선 왕실과 친러 인사들이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비밀 접촉을 하게 되자 당황한 일본은 러시아에 조선 분할안을 제시하기도 하였고, 300만원의 기증을 제의하여 조선 왕실을 매수하려는 등 조선에서의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이에 초조해진 일본은 조선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파악하고 조선 주재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일본으로 소환하였다. 대신에 이노우에 가오루의 추천을 받아 외교에는 무지한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를 파견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이 암살의 목적은 궁중의 실세이자 조선과 러시아와의 접근을 주도하고 있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청일전쟁으로 대만+배상금+요동+(사실상) 조선을 얻어냈는데 문제는 요동은 삼국간섭으로 잃고 조선마저 인아거일로 잃을 위기에 처하자 인아거일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암살하려고 했고 이노오에가 정부의 승인 아래 큰 계획을 세우고 미우라가 세부 계획을 세워 실행했다고 하면서 이노우에에서 미우라로 공사가 바뀌고도 보름 넘에 같이 지낸 것이나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한 것으로 든다.

1.3 진행 상황

새로 부임한 미우라는 참선승을 자처하며, 남산의 일본공사관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였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를 통하여 은밀히 명성황후 살해를 계획했고, 마침내 8월 16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스기무라, 조선궁내부 및 군부고문관 오카모토(岡本柳之助), 포병중좌 구스노세(楠瀨幸彦) 등이 실행방안을 확정하였다. 당초에는 8월 23일 거사하려 했으나 "시간 끌면 위험하니 빨리 빨리 합시다"라며 누설될 것을 염려해서 이틀을 앞당겨 실시하였다.

사태가 일단락되면서 궁궐은 일본군 수비대와 이 사건에 이용된 훈련대가 장악하였고, 고종은 사태수습을 일본공사에게 의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미우라는 친일파를 중심으로 내각을 급조하였다. 미우라 고로는 당시의 사태를 훈련대에 의한 궁문돌입사건으로 몰고 가면서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훈련대 난동 시 일본인이 혼입하였다는 소문에 대하여 사실여부를 규명해줄 것을 외부에 요구하는 등 위장된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이미 자신의 지시에 따라 시해된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 조치를 내리게 했다.

그러나 을미사변 발생 당시 궁궐에 머물러 있던 미국인 고문 다이(Dye, W.M.)와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Sabatin, G)이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었다. 이들로 인해서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미국 대리공사 알렌(Allen, H.N.) 등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을미사변의 진상이 폭로되었고 미우라 고로의 살해가 일본이 계획적으로 시도한 살인 사건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일본은 국내외로부터 빗발치는 여론의 비판과 항의를 받게 되었다. 사태가 불리한 것을 깨달은 일본은 고무라(小村壽太郞)를 변리공사로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하는 체하고, 이노우에를 왕실 문안사로 파견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어 미우라, 스기무라, 오카모토, 고바야카와 등 외교관, 고문관, 군인, 순사, 신문기자, 낭인들 거의 45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였다. 이는 잠시 국제 여론의 비판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 동안 일본 공사의 위세에 눌린 김홍집 내각도 국내 주재 외교 사절들의 항의를 받아 문제가 된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폐서인이 된 명성황후를 복위시켰다. 을미사변은 국외내적으로 많은 파문을 가져왔다 일본은 남의 나라 황후를 아무렇게나 죽여대는 국가로 찍혀서 위신이 추락했고, 조선에서는 "어찌 황후를 살해할 수 있느냐"면서 분노했고 결국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해 을미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사실은 이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말한 놈이 이완용이었다. 그리고 을미사변 이듬해 고종아관파천하게 된 것도 일본의 과도한 내정 간섭과 을미사변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그리고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된 미우라 등 범죄인들은 일본이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2 만화 캐릭터

미우라 고로(바쿠만) 문서로.
  1. 춘생문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 "봐 다른 열강도 다 조선에 간섭하잖아. 근데 왜 우리만 욕해?" 라며 석방시켰다.
  2. 신장의 기능이 감소하여 정상적으로 신장을 통하여 소변으로 배출되어야 할 노폐물(요독)이 배설되지 못하고, 체내에 축적되어 발생하는 다양한 증상들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