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95년 11월 28일, 조선에서 발생한 사건. 친미·친러파가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해 미국 공사관으로 데려가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아관파천으로 이어지게 된다.[1]
2 배경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촉발한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 및 요동반도의 할양을 얻어냈다. 그러나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에 러시아가 반발했고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 할양을 무위로 돌린다.(삼국간섭)
이 사건은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성황후의 측근들인 민씨 척족들도 러시아와 친밀한 상황이었다.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등을 앞세워 갑오개혁으로 조선 식민지화를 추진하다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러시아와의 연대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김홍집 내각이 실각하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 모의로 수배되는 등의 사태에 일본은 극단적인 사태를 일으킨다. 바로 을미사변이 그것.
명성황후를 암살하고 고종을 통제하면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세력을 유지할 것으로 여겼다.
3 사건의 진행
고종은 일본이 언제 자신을 암살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심지어 일본의 독살을 염려해 서양 선교사들이 공수한 통조림으로 연명할 정도였다.
한편 김홍집 내각과 친일세력의 반대파들은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하여 김홍집 내각의 실각을 노렸다. 소위 정동파로 불리는 친미파와 친러파들이 이를 주도했는데 구체적으로 시종 임최수와 참령 이도철 등이 계획을 수립하고 시종원경 이재순과 정동파 이범진, 이윤용, 이완용, 윤웅열, 윤치호등이 직간접적으로 호응했으며 친위대 중대장 남만리, 이규홍 등 장교들까지 가담했다.서양 선교사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도 돕겠다고 나섰다.
11월 28일, 임최수 등 30여명이 훈련원에 들어간 후 친위대 병력 800여명이 경복궁으로 움직였다. 당초 계획은 건춘문을 뚫고 들어가 고종을 동소문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었으나 여의치 않아 북장문과 춘생문 사이의 담을 넘어갔다.
그러나 이미 사전에 친위대 장교인 안경수가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고종을 궁 밖으로 빼내려한다고 밀고 했고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했다. 이에 궁궐의 숙위병들이 거세게 저항했고 어윤중이 친위대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해 결국 거사는 실패했다.
4 사건 이후
수사과정에서 사건의 배후에 반 김홍집 내각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법무대신 장박이 재판장으로 나서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재편결과 주범으로 몰린 임최수와 이도철은 사형에, 이민굉, 이충구, 전우기는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이재순, 안경수, 김재풍은 태형 100대 후 징역 3년에 처해졌다. 이재순만은 이후 종친이었던 까닭으로 사면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국왕탈취사건으로 역선전을 가하고 명성황후 시해범들을 석방하는 논리로 이용했다. 즉, 자신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이나 이 사건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어거지 논리였다. 결국 명성황후 시해범들은 모두 무죄석방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일어난지 3개월여 후 결국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도움을 청해 러시아 수병들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호위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관련자들은 전원 신원된다.- ↑ 실제로 아관파천은 춘생문 사건을 거울삼아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