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300px
젊었을 때의 모습늙은 후의 모습(1916년)
대한제국의 역대 내각총리대신
(내각제 실시)1대 이완용2대 박제순
2대 박제순3대 이완용(폐지)
성명이완용(李完用)
생몰년도1858년 7월 17일 - 1926년 2월 12일, 일제강점기 조선(67세 6개월 26일)
비고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이완용은 조선문신이자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이다. 경기도 광주부[1] 낙생면 백현리(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2]에서 출생했다.

젊어서는 촉망받는 인재였지만 친미, 친러, 친일 코스를 차례로 거쳐 친일파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기유각서,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주도하였다. 그 때문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모두에 분류되었다. 아무리 총명한 천재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면 어찌 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매국노라고 하면 바로 이완용으로 연상되고, 세대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이완용을 주로 기억해낸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된 우봉 이씨 족보를 보면 족보에 이완용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삭제한 듯하다. 빈 칸으로 남아있고 연필로만 간단히 적혀있어 사실상 집안에서도 배척되고 있는 듯 하다.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 같은 경우도 이러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악질인 매국노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후손들 중에는 조상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3] 국가로부터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2 생애

해당 문서 참조.

3 이완용의 성품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어서 미국인 선교사의사호러스 뉴턴 알렌은 후에 이런 평을 남겼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그밖에 자신의 치부에도 열심이었다. 민씨 척족 수구파 관료출신인 민영휘가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이었는데, 이완용이 2번째였다.

그런데 1위인 민영휘의 재산이 당시 돈으로 6,000만원으로 이완용의 20배다. - 친일인명사전, 현재 돈으로 450억원 가량이고 민영휘는 9,000억이다.

생전 보유한 자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450억원 가량 된다. 지금 보면 얼마 안 되는것 같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벤틀리루이비통급의 고급 브랜드나 사치품이 많던 시대가 아님을 고려하자.

엄밀히 따지면 둘 모두 1910~20년대에는 있었다. 다만 구미나 유럽에서는 있었을지언정 그것이 바다건너 대륙건너 조선과 일본까지 미처 오지는 못했을때였겠지만. 참고로 루이비통은 1854년에 설립, 벤틀리는 1919년 설립.

물론 호의호식하던 이완용 일가는 벤틀리까진 아니어도 진짜로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사실 1900년대 초기에 벤틀리는 페라리같은 경주용 차량 제작사로 더 유명했다. 고급 승용차도 만들긴 했지만 후일 대공황때 8리터라는 최고급 승용차를 만들었다가 안 팔려서 롤스로이스로 넘어갔고, 2000년대 초에 롤스로이스와 분리되어 폭스바겐 AG로 다리를 옮겼다.

당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 왕실용 어차를 들여왔는데[4] 고종과 순종과 왕실을 위한 어차로는 캐딜락다임러[5]오버랜드[6]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자신은 위슬리[7]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외 이완용과 송병준을 포함한 고관대작들도 뷰익이나 포드쉐보레 등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수입차/국내 생산 차량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이마저도 조선 국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요 고급품이었다. 기록 사진으로 당시 고관들이 탔던 고급 자동차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진 장면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써는 어느 정도 값나가는 차를 타고 다니긴 한 셈.

게다가 이완용이 살아 있던 시대,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도 안해주고 안하무인격으로 갑질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며 큰 공분을 산 일이 있기도 했다.[8] 참고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미미하고[9]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소유한 땅은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 2배 면적을 보유했으며, 집을 여러 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이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m2(3천평 남짓)인데, 이는 그의 땅의 1% 정도였다. 몰수원칙상 그가 받은 은사금과 이자를 고려한 금액만 몰수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4 이완용에 대한 각종 논란

  • 이완용이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정작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이었던 광무개혁 시행 당시 이완용은 파직되어 고향에서 은거하던 상황이었다.
  • 이완용의 평판이 나빠, 아들 이승구[10]가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서 그걸 안 아들이 남 보기 부끄럽다고 자살한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해당내용은 매천야록에 나와있으며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늑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병으로 사망했다.해당기사
  •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복권자 중에선 윤원형처럼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이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이 대표적이었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이 있었다. 상당 수는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다. 이 취급의 발단은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으로,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하던 상황이었다. 아래는 그 명단과 당파.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즉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으므로 무시하는게 좋다.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대북),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를 모독한 노론),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계유정난에 반대한 장군),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감역(監役) 허욱(許煜),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승지 정해(鄭楷),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준론),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이조 참의 윤연(尹),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지평(持平) 윤지(尹志, 나주 궤서사건의 주모자로 소론),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대사헌 심악(沈),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지평 이동양(李東讓),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승지 이중술(李重述),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승지 이보욱(李普昱), 승지 김호(金浩), 현감 박필현(朴弼顯),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감역(監役) 정권(鄭權),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승지 이재화(李在華), 정언 이우화(李宇和), 주서(注書) 권숭(權崇),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감사 정사효(鄭思孝,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정언 권집(權䌖),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승지 박홍도(朴弘道)이다.
  •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 어찌되었던 총장급 인물로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적혀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덕분에 성균관대는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라고 놀림 받는다.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적으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고종 때 와서는 그어느 정도 실력만 되면 대사성 직함을 붙여줬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실제 저 페이지로 들어가보면 고종대의 대사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평균적으로 보자면 고종 재위 15,886일/대사성 344명=1인당 평균 46.18일 재직. 1달 반 정도다.
  • 80년대 동시대를 다룬 KBS 대하사극 독립문에서는 故 김진해씨가 이완용으로 열연했다. 역시 이 드라마에서는 매국노 시전을 적절히 보여주었다. 후대의 사극 명성황후에서는 충신으로 나오지만.
  • 이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대상으로 같은 집안인 것 뿐인 역사학자 이병도는 물론이고, 이완용의 고향이 아닌데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전라도,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삼성그룹의 창시자 이병철 등이 있다. 누구는 저걸 트집 잡아 특정 지역을 반역의 땅 운운하고, 누구는 특정 기업을 깎아내린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인터넷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가 아니며 오히려 30촌이나 차이나는 사실상 성씨만 같은 남남이다. 그리고 이완용 후손 중에 이병철이란 사람이 있지만, 그 이병철과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별개의 인물이다. 애초에 본관이 아예 다르다.
  • 배짱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 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 곳에 2번 떨어지는 건 더 드문 일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 이덕일은 이완용이 노론의 최후의 수장으로 노론 세력을 대표해서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노론이었으면 위의 인물들을 사면복권 시켜줄 리 없다. 사실 조선 말기부터 외척의 세도 정치가 활성화 되면서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어 서인/동인/남인/북인/노론/소론/대북/소북/벽파/시파 따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아예 외세에 놀아나게 된 근대화 시기인데 뭐.
  • 일설에 따르면, 조선 근대사에서 가장 관상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완벽한 천재의 상이며, 재물을 얻어도 탈이 나지 않고 처신에 복이 되며 평생 돈과 관직이 함께 할 상이라고... 관상가들 말에 따르면, 국록을 먹고 좋은 일을 하라고 준 상이란다. 일제의 국록과 일제한테 좋은 일 참고로 이와 반대되는 평생 아주 천하고 비참한 삶을 살 팔자란 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다. 기준을 일제로 잡으면 의외로 맞아 떨어진다...?

5 관련 어록

구문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들어갔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 이완용 사망에 대한 기사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아서 누리지 못할 것누린 자[11],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 1926년 동아일보 전면 기사, 이완용의 사망 2일 후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폴란드 같은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12]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때는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송태조 조광윤에게 바치는 영일시를 인용해 일본을 찬양한 구절

오호, 조선 동포여. 세상 말에 죽음 중에서 삶을 구한다는 말이 있더니 지금에 조선인민은 삶 중에 죽음을 구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얼핏 알아듣기 용이하도록 일언을 진하노니 제군은 잠깐 정신을 수습하고 잘 듣기를 바라노라.

(중략)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이 허설許說이라 망동이라 하는데 대하여는 각 유지인사의 천언만어가 끊이지 않아도 일향자각치 못하니 근자에 여余(=이완용)가 다시 말해도 제군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스스로 의심하여 췌언(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거니와
(중략)
처음에 무지몰각한 아동배가 선동하고 그 후에 각 지방에서 역시 소문을 듣고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이 진압하려면 피해가 없겠냐마는 몰각자 부류를 돌아가게 하고 관대한 수단을 사용하여 일차 유고諭告와 이차 유고가 내려와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기자기질其子其姪(어린 것들)이 여전히 몰각한 행동이 있어 일차 효유하고 효유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그것을 책責하니 책한 후에 따르지 않으면 필경에 달지초지撻之楚之(매를 들어 때린다)는 어린 것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어린 것들을 선도코자 함이요, 둘째, 다른 어린 것들에게 오염치 못하게 함이라.
이차 유고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관청을 침범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니 당국에서 엄중이 조치함은 부득이한 것이니라. 근일에 모모처에서 듣기로는 많은 인민이 죽고 다쳤다하니 그 죽고 다친 인민 중에는 혹 주창한 자도 있겠지마는 그 다수는 부창부수한 자로 여余는 믿고 있노라. 농사 때가 임박하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 즉 안락이 있을 것이요, 망동을 따라하면 즉 죽고 다침이 목전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함이 아닌가. 자신이 삶 중에 죽음을 구할 뿐아니라 망동함으로 인하여 그 부근에서 횡액으로 죽고 다침에 이르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눈뜨고 못 볼 일이오, 귀로도 듣지 못 할 일이로다.
(이하 생략)
1919년 4월 3.1 운동 당시 발표문.#

6 기타

웃기는 사실로는 생전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데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등과 대화할 때는 반드시 영어로 했다고 한다. 처음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도 큰 활약을 못했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 보다 좋았다. 때문에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그나마 할 줄 아는 일본인과 일했다. 알고 있는 일본인 인맥도 넓지 않아서, 이토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가 1906년 학부대신(일종의 교육부 장관)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칭찬했다.

근대 문물에 관심이 있었고 의외로 검약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13]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그렇게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14]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정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

조선 4대 명필 중 한 사람이었다.[15] 실제로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 하지만 행적 때문에 글씨의 수준과 관계없이 가격은 바닥을 긴다.[16] 또한 재테크에도 뛰어나 조선 팔도 곳곳에 이완용의 사유지를 늘려갔다. 그가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 원이 넘는다고 하며 자기 재산의 3배를 늘렸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 어쩐다 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단 몇몇 양심적인 후손들은 이에 반대하며 자신의 성을 바꿔가면서까지 반대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도 매국노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중화민국 북경 정부 시절 양사이(梁士詒)라는 사람이 내각을 조직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이게 당시 말 많던 산동반도의 소유권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중국 사람들이 내부에서 반발이 심헀다. 당시 오패부(吳佩孚)[17]라고 그 당시 직예파(直隷派) 쪽 군벌이 이를 비난하면서 전보를 날리고 양사이를 과거 중국의 여러 매국노와 더불어 이완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욕을 날린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양사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양사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하였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양사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18]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19]

저렇게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면 당대 중국인들이나 식자층도 이완용 = 나라 팔아 먹은 사람 이라고 인식이 되었고 이름도 유명했다는 이야기.[20]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충격적인 사실은 이완용배향공신이 되어 최소 5년간 종묘에 모셔진 대참사가 실제 일어났다.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21]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인 한창수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 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고[22],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하였다. 그러나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23],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하였다.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출향되었고, 김병시, 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 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完用). 그냥 이씨 가문의 완용이라는 이름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하다 보니 다른 동명이인들의 삶이 망쳐졌다. 즉 이완용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내에서 부정적인 상징이 돼버린 셈이다. 당장 이완용이란 이름 가진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이니(……)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꼭 성씨와 이름 3자가 다 일치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이름만이라도 일치하면 마찬가지로 영 좋지 않게 된다.[24]

2011년 5월 20일 이완용에 대한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출판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을 위해 용기를 내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이로 인해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이완용을 재평가한 것이라는 이상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윤희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의 이성을 비판 없이 충실히 따라갔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괴물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바로 근대에 대한 비판을 가하려고 한 것.

2013년 1월 중순경 위키피디아 한국어 버전 이완용 항목에 이완용을 매국노로 평가한 부분을 삭제하고 조선을 근대화시킨 위인이라는 류의 내용을 추가한 지속적인 반달이 행해졌다. (정보없음 부분) 이후로도 잊혀질 때마다 특정인들에 의해 문서가 훼손되고 있으며, 이는 본 문서도 마찬가지다.

전북 부안군에는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 다만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세워진거라... 대략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은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는데, 이후 이완용이 천하의 개쌍놈이 됨으로서 이러한 공덕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자연스럽게 광복 후 이 공덕비는 수차례 수난을 당했고, 본래 서 있던 자리가 아닌 줄포면 면사무소 뒤편에 반파된 채로 보관되고 있다고.

일제시대 화장실 낙서에는 이완용 욕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고 한다. 당시 화장실 낙서들

7 대중매체에서의 이완용

GTA경성에는 플레이 가능한 3 캐릭 중 하나로 등장했지만[25] 게임 클래스와의 시너지가 겹쳐, 결코 좋게 그려지지 않았다. 뭐, 애초에 절대로 좋게 그려질 만한 작자가 아니다.

초장에는 권위를 악용해서 지나가던 일본 순사를 두들겨패질 않나, 기생집에서 기력 회복을 해 댄다. 염천교 거지패를 처리하라는 퀘스트를 받아 이동을 해야 하는데 조작법 실수로 김첨지의 인력거를 뺏어 직접 끌고 가는 신세가 되고, 전투에 들어가서 무기를 준비하는데 자꾸 삑사리가 나서 깻잎과 불로초만 들다가힐링용 허브? 그 와중에 김춘삼의 낭심샷 집중공격에 고자가 된다.

그 다음부터는 기생과 어울릴 수 없게되는 바람에 [26] 악랄한 짓을 벌이다가 고자의 무서움을 보라구 등장한 각시탈에게나타났→다↗, 각시→탈↘! 총을 쏘며 저항하지만 쇠퉁소에 총알이 다 튕겨나가고, 겐지? 가뜩이나 없는 곳을 계속 가격하는 이크에크샷(…)으로 응징당한다. 얼쑤 절쑤

GTA 3.1절편에도 최종보스로 재등장하는데 플레이어 캐릭터인 독립운동가가 버튼 액션에 실패하자 마구 패지만, 시간을 넘어 등장한 윤형빈의 주먹에 한방에 뻗는다.

친일파 암살작전을 다룬 영화 암살에서 과거 장면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역관 없이도 일본말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이버 웹툰 스페이스 킹의 등장인물 안용이는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이완용과 비슷한 행보를 걷는다.
  1. 당시 광주부(광주군)는 현재의 성남시, 하남시, 강동구, 잠실을 제외한 송파구강남구 등도 관할하고 있었다.
  2.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으로 곧 판교지역이다. 생가는 백현동 226-1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판교신도시가 개발되면서 같이 철거되었고, 현재 그 위치에는 백현8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상태다.
  3. 이승구의 후손은 부친의 매국노 짓에 경악해서 자결했다.
  4. 이 때의 어차가 한국 최초의 어차는 아니다. 이미 몇년 전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해 시범 용도로 왕실에 들여온 포드 A형 차량이 최초였는데 생긴게 지금과 많이 다르기도 하고 초기의 자동차인지라 진동이나 소음이 심해 고종도 당시엔 한두번만 타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프랑스 영사관에서 쓰던 르노 자동차를 왕실에서 들여 운행하기도 했다.
  5. 현행 재규어의 고급브랜드. 2000년대 동그란 눈의 재규어 XJ때만 해도 8기통 모델 중 다임러라는 최고급 에디션이 남아있었다. 당시엔 벤츠 S600 급은 되는 최고급 차량이었다고.
  6. 현행 크라이슬러에게 인수된 브랜드. 크라이슬러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스페셜 버전 중 하나도 이름이 오버랜드다.
  7. Wolseley. 현재는 망한 영국 브랜드
  8. 출처: <임금님의 첫 자동차>, 전영선 저
  9. 한일 신협약 때 10만원, 합병 때 15만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다.
  10. 협성회등 구한말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구국활동에 전념했다.
  11. 이 어록은 후에 리그베다 위키 사유화 사태청동을 비판하는데에도 쓰였다.
  12. 다만 이완용의 생애 행실을 보았을 때 이완용이 부강하게 하겠다는 국가가 조국이 아니라 강한 서구열강(즉 대한제국을 열강에 팔아먹겠다는 의도)일 가능성도 없지않아 있다.
  13.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14.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니고, 임금을 비롯한 중전, 대비급의 인물들이나 할 수 있었고, 실제 선조 대 서인 정철의 경우, 후궁이 이런 짓을 한다고 대놓고 깠다가 역관광당한 예가 있다.
  15. 나머지 3명은 김정희, 한석봉, 이하응(흥선대원군)
  16. 물론 그가 원체 명필이었던 까닭에 가치가 아주 없는건 아니고, 인사동 같은 곳에서도 4~50만원에 가끔씩 거래가 된다고 한다. 다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저 가격이 언뜻 보면 비싸보이지만 이완용의 행적만 아니었으면 수백만원에서 천만원은 했을 글씨라는 얘기도 있으니... 전술했다시피 거의 바닥인 셈.
  17. 물론 오패부 역시 무슨 애국심에 불타는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당대의 평범한 군벌 중 하나로, 양사이를 비판한 이유는 양사이 내각이 봉천 군벌인 장작림계의 지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대개의 군벌들이 장제스의 북벌로 세력을 잃은 뒤에 친일적인 태도를 취한데 비해서 그는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서도 최소한 항일의식만큼은 있었던 것으로 과히 나쁘지는 않은 평가를 내리기는 한다.
  18. 북송시대 대신으로 금나라 병사가 개봉을 포위하자 화전을 주장하고 강왕과 함께 금나라로 인질로 갔다가 괴뢰황제로 세워진 인물이다. 참고. 보면 알겠지만 나라를 주도적으로 팔아먹은 이완용과 나란히 놓기엔 애매한 부분이 제법 있는 인물이다.
  19. '만주군벌 장작림' 中
  20. 당대 중국에서 일본 관련해서 조선 문제가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기도 했었다만...
  21.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3일자 '四人抄啓別單書入之意敢稟答曰知道' 4인을 초계하여 별단으로 들이니 품의에 대해 답하시기를 알았다.
  22.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9일 '下敎曰忠文公金炳始忠肅公李耕稙姑爲保留內 閣總理大臣李完用添書以入' 하교하기를, 충문공 김병시, 충숙공 이경직을 보류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추가 기재하여 넣으라.
  23. 종묘숙직일지(宗廟宿直日誌) 1940년 3월 11일, 12일, 13일 기사
  24. 이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식의 동명이인들이 까이는데 예를 들자면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도 독립전쟁이 끝난 지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자국내에서 까이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 진회가 여기에 해당되서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를 넣지 않는다.
  25. 게임 캐릭터와 플레이어 배우 모두 김민교.
  26. 고자가 되기 전에는 맞을 때마다 사과하더니 스 미 마 셍 고자가 된 후에는 일본 순사들도 그를 적대한다. 조 또 마 떼 하지만 출동만 하고 잡지는 못하고내가 친일파인데 어쩔거야? 권총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