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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集
(1842년(헌종 8) ~ 1896년(건양 1년, 고종 33년) 양력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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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볼 수 있는 흑백사진. | 복원한다면 이런 모양새. |
1 개요
일국의 총리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요.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
개화기의 정치인. 초명은 굉집(宏集), 호는 도원 · 이정학재. 시호는 충헌(忠獻).
온건개화파이며 갑오경장(갑오개혁[1]) 추진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2]이기도 하다.
사위가 이항복의 후손이며 독립운동가이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다.
2 생애
아버지가 개성 유수였다. 1867년 경과정 문과에 급제, 그리고 정7품직인 승정원사변가주서에 임명된다. 부모님의 상을 5년간 치른 후 종3품 권지승문원부정, 부사과, 훈련도감 종사관을 거쳐서 3년간 흥양[3] 현감이 된다. 그 후 내직으로 승진하여 호조, 경조, 병조, 예조의 참의를 돌아가면서 지내고 1879년 돈녕도정을 지냈다.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이 요구한 인천 개항, 공사 주차, 해관 세칙 등의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한 달간 도쿄에 머물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된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협상은 실패했으나 이때 그가 가져온 책이 청나라 황준헌의 조선책략이었다.[4] 개화를 통한 근대화를 주장했다.
관료와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참판이 되고 곧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통상을 전담하는 당상경리사[5]가 되었다. 한때 위정척사파의 반대에 사표를 썼으나 얼마 안 가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이 되었다(위의 당상경리사랑 같은 직위.).
1882년 3월, 5월 사이에 신헌의 부관으로 미국, 대영제국, 독일 제국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에도 함께 갔다. 그 후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호조, 공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883년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4년 초에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瓣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하여 대외 통상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갑신정변 뒷수습을 위해 좌의정을 겸하고 1885년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종1품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있다가 1887년 다시 좌의정이 되지만 사임하고 수원부 유수가 되어 거기서 일어난 민란으로 좀 고생했다.
2.1 갑오개혁의 총책임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리교섭통상사무가 되어 청과 일본을 중재하면서 민심수습과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강조했다. 드디어 1894년 7월, 일제의 강요[6]로 세워진 초정부적 내정개혁 기구인 군국기무처의 총재관[7]이 된다(제1차 김홍집내각). 이 당시 그의 활약은 놀라운데, 12월에 군국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1차 갑오개혁의 총 책임자가 되어서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했다.[8] 이 시기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때문에 일본의 간섭이 조금 약해지고,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대놓고 쫓아내려고 할 정도로 억압했고, 일본은 도리어 섭정으로 뛰어들었던 흥선대원군을 배제하고자 하면서 김홍집은 가장 의욕적, 독자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시기이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이 일본의 의도대로 끝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가 귀국하면서 박영효와의 연립 내각이 수립되어(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정국의 무게추는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이런 상황 하에서 홍범 14조를 발표하고 제2차 갑오개혁을 시작했다. 이 때 의정부는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로 개편되고 7부의 제정, 군제 개편 등을 하였지만 역시 돈이 딸려서(…) 개혁은 중단된다. 그리고 일본의 지원을 받은 구 급진개화파 박영효, 서광범 등 계파와의 갈등이 심화되어서 결국 사임하기도 하는 등 실권이 없어졌다.(사실상 박영효 단독 내각)
1895년 4월 삼국간섭이 일어나고 박영효 내각이 붕괴된다. 안 그래도 일본 우위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들던 고종은 김홍집을 파면, 1895년 5월 17일에는 갑오개혁 무효를 선언해버렸다. 개혁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다기보다는 일본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느낌의 행동이지만... 이후 임시로 박정양 과도내각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동년 7월 박영효의 반란 음모 사건이 터지면서 붕괴. 이번에는 명성황후가 주도해서 친미, 친러파에 더해서 김홍집과 다시 제휴하여 제3차 갑오개혁을 시도했다.[9](제 3차 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10])
그 후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갑오개혁을 날려버린 고종의 조치는 휴짓장보다 가치가 없어졌고, 김홍집도 다시 구성된 내각에 참여했다.(제4차 김홍집내각) 이 때 참여한 인물이 친일성향이 강한 조희연, 유길준 등으로, 조희연과 유길준이 고종의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까지 추진하니 민중들의 반발이 격해졌다. 이것이 제 3차 갑오개혁, 혹은 을미개혁이다.
이런 틈에 끼어 있던 김홍집은 을미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되었다. 이 때 김홍집은 국모 시해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 했으나 대감이 죽어서 이 일이 해결된다면 모르겠으나 실상은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유길준의 만류로 그만뒀다.
백성들의 일관된 여론인 반일, 반외세에 이제 국모 암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욕까지 먹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김홍집의 운명도 대충 정해졌다. 김홍집은 총리대신으로서 내각에 참여할 것을 수락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총리대신 수락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이 난세에 상감께서 잠을 못 이루고 조르시니 어찌 내 한 몸이나 아끼려고 거부할 수 있겠느냐? 부득이 어명대로 승낙했으니 내 생명은 이미 각오한 바이다. 너희들도 미리 짐작하여라"라고 못박았다고 한다.[11]
2.2 비장하고 숙연한 최후
운명의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이 발생했다. 고종은 공사관에 오자마자 을미사적(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에 덤으로 법부대신 장박[12]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처형을 명령한다.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김홍집은 고종을 직접 배알하여 회심을 촉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다. 지금 나섰다가는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는 일본군을 "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죽는 건 천명이요!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라고 뿌리친 후 직접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일개 순사에게 붙잡혀[13] 정병하[14]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끌려간 다음 분노한 군중들에게 돌을 맞고 집단구타당하다 끝내 숨졌다. 군중들은 이에 끝내지 않고 이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그 시체를 끌고 가면서 그야말로 광화문-종로 거리를 피의 거리로 만들어버렸다[15].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연좌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한 그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한편 살아남은 유길준, 조희연, 장석주는 경술국치 때까지 살아남아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그나마 강직한 유길준은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16]. 조희연은 죽을 때까지 남작 작위를 갖고 있었다(반납해서 세습하진 않음), 장석주는 대대로 작위를 세습했다.
3 평가
김홍집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엇갈리고 있다. 한때 김홍집을 일본을 등에 업고 한 개혁에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친일파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17] 허나 그를 이완용, 박영효와 동급의 친일파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고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시각이라는 견해가 있다. 김홍집을 친일파라 한다면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90%는 친일파라는 것이다.
한때 친일 역적으로 매도되기도 했으나,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재평가되었다. 현재 그는 일본을 모델로 하여 개화를 통한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한 인물로 평가되는 추세다. 그는 주변국 가운데 러시아를 가장 위협적으로 생각했고, 이를 막기 위해 일본과 청나라의 힘을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8] 러시아가 가장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시각은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기 전까지는 타당한 생각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19][20] 때문에 그를 애국적 친일파, 또는 친일적 애국자라 부르기도 한다. 무엇보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으로 도주하여 편안한 말년을 보낸 이들과 달리, 일본 군대의 보호를 거부하고 군중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도 거리에 나선 그의 행동은 사욕을 위한 행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사리사욕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일생 동안 그가 사욕을 채우기 위해 친일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김홍집에 비판적인 이들조차 김홍집이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친일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 세력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위정척사파, 청, 러시아, 미국 세력과 제휴하기도 했다.
애초에 갑오개혁은 일제에 의한 타율적인 개혁이었으나 자주적인 측면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고,[21] 그 책임자들에도 친러파, 친미파가 포함되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김홍집은 그 갑오개혁의 얼굴마담이자 중재자로 계속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과 연립 정권을 구축한 것은 일본이 김홍집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견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이 김홍집을 신뢰하고 있지 않음에도 그에게 공동으로 정권을 맡긴 것은 김홍집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명백한 친일파인 박영효에게 단독으로 정권을 맡길 경우 반발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일본은 김홍집을 얼굴마담으로 이용한 것이다.
줏대가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풍전등화의 정국에서 나라를 살려보기 위해 여러 세력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히려 한 세력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친일, 위정척사, 친러, 친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등용한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영의정과 총리대신을 지낸 것, 그리고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면서도 지속적으로 등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한말 대소신료 중에 정무 능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업무 능력이 탁월한 탓에 별명이 비오는 날의 나막신이라고 불렸으며 일부 골수 위정척사파(최익현)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홍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심지어는 갑신정변에서 살해당한 홍영식을 거만하다고 까던 매천 황현마저도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가 못 되었다"며 "그의 죽음에 세인들은 모두 애석해했다."라고 평했다.
시인이자 사학자로서 죽기 전까지 친일파 연구를 해왔던 임종국씨는 김홍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김홍집의 최후가 이렇게 숙연하거늘 어느 누가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겠는가?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죽는 게 '천명'이라고 갈파한 살신성인의 투철한 정치 책임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김홍집을 '한말의 위대한 정치가'라고 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려대 한국사학과 출신의 구한말 개화기 연구자인 박은숙은 저서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에서 김옥균을 찬양하기 위한 반대급부로 김홍집을 까기도 했다.[22]
- ↑ 여기에 을미개혁(단발령)이 추가되기도 한다.
- ↑ 이후 의정대신으로 개칭되었다.
- ↑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
- ↑ 저 책의 내용을 압축하자면 조선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친중국(중국과 친하고), 결일본(일본과 손을 잡고), 연미국(미국과 연대)을 해야 하며 이 근거로 미국은 정의의 나라니까 조선을 이롭게 만들어줄 거라고 말한다. 사실은 일본을 통해서 조선과 수교하려 했던 미국과 조선의 수교를 중계하면서 조선에 대한 청의 우위를 보이고 싶었던 것이 책의 목적이었다. 실제로 이 책을 계기로 조선은 미국과 수교하고 이후 여러 국가가 청을 통해서 조선과 연결되니 청으로서는 대성공작이었다. (물론 이홍장과의 견해에는 어느 정도는 거리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일본과 손을 잡으라는 대목이 그랬다.) 어쨌든 이 책의 내용을 본 위정척사파들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악을 쓰며 만인소를 쓰는 등 대단히 불쾌해했다.
- ↑ 지금으로 말하자면 외교통상부 장관 계열.
- ↑ 강요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 때 일본은 군대를 이끌고 기습해서 경복궁을 포위했다. 갑오개혁은 이 시점에서 시작되고, 동학농민군이 2차 봉기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 ↑ 양지아문(측량산업에 집중한 오늘날의 국토부)의 으뜸.
- ↑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군국기무처가 활동한 기간이 7월 말부터 12월 초까지였는데 약 120일간 210건, 하루에 2건을 처리한 셈이다.
- ↑ 이 때 친러 혹은 친미파로 유명한 이가 바로 이완용이다.
- ↑ 다만 이 시기의 김홍집은 얼굴마담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이걸 김홍집 내각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하고,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보아서 이 시기와 박영효의 연립내각 시기를 합쳐서 2차 김홍집 내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 김홍집 내각은 총 3차가 된다. 이를 모두 별개의 김홍집 내각으로 인정하면 총 4차.
-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
- ↑ 초명은 장석주이다.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하도 박식하여 '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 혹은 내무실에서 경무청 순사들한테 잡힌 후 참살당했다고 한다. 물론 그 후에 시체가 훼손된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 ↑ 급진개화파로 김옥균과 가깝게 지냈던 인물이다. 이 사람은 단발령 시행 당시에 고종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른 것은 그렇다고 하지만,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들의 침입을 알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한 것까지 고려하면 확신범.
- ↑ 조선 말 선교사였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부인은 길거리에서 온몸이 피에 물들고 눈빛이 무서운 사람들을 보았다고 하면서 알고 보니 그들이 김홍집을 죽였다고 저서인 15Years Among Top-Knots(상투의 나라 조선, 조선 견문록이라고 출판되기도 했다.)에서 서술하고 있다.
- ↑ 본인은 남작작위는 거절했지만, 은사금으로 나온 상금은 받았다. 물론 유길준 일족 중에는 작위를 받은 사람과 골수 친일파가 된 인물이 넘쳐난다.
- ↑ 그 이완용이랑 함께 일하고 그 박영효랑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희연, 장석주의 운명을 보자. 그런데 정작 당시 박영효는 김홍집을 친일파라고 깠다.
- ↑ 이게 바로 김홍집이 처음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온 조선책략의 내용이다. 조선 말기 개화파들의 특징이 자신들이 처음 배운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청나라에 가서 양무운동을 보고 온 사람들은 친청파가 되었고, 일본가서 메이지 유신 접한 사람은 친일파가 되었고, 미국에 보빙사로 간 사람들은 친미파가 되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이런 식이었는데, 김홍집은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친일, 조선책략으로 반러가 된 경우이다. 당시 개화파들의 진정한 한계는 여기에 있다.
- ↑ 러시아가 질 줄은 당시엔 정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자세한건 러일전쟁항목 참고.
- ↑ 이 생각은 이후 고종과 독립협회의 대립과정에서도 다시 재현된다. 고종은 일본을 배제하고 러시아를 포함하여 협정을 맺으려고 했고, 독립협회는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을 포함하려고 했다. 모든 것을 아는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에 더 관심이 많았던 제정러시아가 한반도 본토를 1차 타겟으로 잡고 있던 일본보다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김홍집이 이걸 모른 게 죄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특히 독립협회의 경우는 친미, 친일 세력이어서 자신들의 연줄인 미국과 일본을 옹호하려고 저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 데 비해서 김홍집은 당시에 만일 살아서 정계에 있었다면 그냥 고종의 정부를 위해서 일했을 위인으로 추측된다.
- ↑ 1차 갑오개혁 시행 시기는 청일전쟁 와중이라서 일본이건 청이건 조선의 세세한 부분까지 건드릴 여유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친일내각이 포함되는 것은 박영효가 들어온 다음부터
- ↑ 박은숙의 일방적인 김옥균 찬양에 대한 비판으로 [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