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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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維新
Meiji Rest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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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개요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개혁

19세기말 일본에도 막부가 서양의 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쿠로후네 사건으로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한 막부 타도 세력과 왕정 복고 세력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1867년의 대정봉환) 덴노 중심의 국가로 복고된 대 사건을 말한다.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 연호가 시작 된 1868년으로 본다.

한자음 그대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그냥 유신이라 하기도 한다. [2] 일본어로는 '메이지 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고 발음하며 영어권에서는 Meiji Restoration이라고 쓴다.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로 대표되는 신흥 지식인 세력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해외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러모로 이와쿠라 토모미가 최강의 흑막. 물론 그 배후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3]

분명히 당초 목표는 존왕양이를 하면서 막부를 타도하고 덴노를 중심으로 쇄국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는데, 왜일까 도중에 방향이 바뀌더니 막부를 타도한 다음에는 개국을 해버린다는 괴이한 결론이 나와버렸다.

다만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변을 주도한 것은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인데, 사쓰마는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4]를 이유로 영국 상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쟁하였다. 조슈 역시 사쓰마를 배신자로 몰면서 막부와의 대결에 치중. 존왕양이를 추구하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양선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얼마 후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도 이 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서양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많은 걸 배웠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고, 결국 일본은 폐번치현, 신분제 폐지, 국민개병제 등 전면적인 서양화에 착수했는데 이 판단이 옳았다. 구 체제 하에서 개방을 추진했던 청은 반 식민지 종속국이 되었고, 대한 제국은 아예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구 세력의 저항은 있었다. 단발령과 도검소지금지령에 항거한 무사들은 특권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이다.

2 한국에 미친 영향

이 때 국서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덴노(천황)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미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에 얻어 맞고 있었다. 중국은 개항한 이후였기 때문에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춰 조약을 체결하여 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아직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조선에선 '천황'이라는 호칭에 심히 불쾌해 하며 국서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 간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 조-일 관계가 막장화된 시점이었던지라,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힘을 얻게 되고, 그 이후 조선침략이 본격화 된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정한론은 찬반이 나뉘었지만 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일 뿐, 이미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의 급격한 중앙집권화로 인한 몰락 사무라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해외 식민지 건설을 통해 부국강병을 모색하면서 '언젠가' 조선을 침략해야겠다는 게 대세였던 듯.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인 10월 유신의 유신을 명치유신에서 따왔다고 한다.

3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차이

21세기의 기준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구 체제를 완전히 엎었거나(= 개혁) 혹은 최고 권력자가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느냐(= 혁신), 그렇지 않았느냐(= 쇄국)가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건 막부를 전복시키서, 어설픈 개방으로 서양의 침략을 부추겨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가는 것을 하급 무사와 관료가 중심이 된 사쓰마, 조슈 등 소위 네 개 번의 실력자들이 저지하는 데 성공하는, 즉 구체제 자체를 갈아 엎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꾸지 않은 것은 덴노 뿐이었고, 신격화만 시킨 뒤 실권은 다 빼앗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완벽한 서양화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당장 보수로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만 해도 개방 자체는 동의하되 좀 더 천천히 하는 한편, 사무라이 주도 체제를 유지하자는 입장이었을 정도다. 이는 조선 내에서 가장 개혁적인 인사들조차 동도서기론을 내세운 것과는 대조적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는 일본의 막부에 해당하는 세도정치 가문이 기득권 세력으로 건재했으며, 이들에 비해서 차라리 막부는 양반이다 싶을 정도로 답이 없었다. 물론 안동김씨가 조선에서 천주교에게 우호적인 집단이었던 점, 김조순 본인이 고증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점 등으로 볼 때 어느 정도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외부 세력의 통상 요구를 정중히 거절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국가 정책이었다. 그나마 김옥균 등 일부만이 다소 깨어 있었다지만 이들은 독자적으로 개혁을 하는 게 아니라 일본을 끌어들여 개혁을 하고자 한 점에서 한계가 명백했다. 만일 고종이 병인양요신미양요의 승리[5] 로 잠시 조선의 이미지가 개선된 점을 이용. 대원군 실각 직후 일본식 개항을 전격 결정하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문물을 받아들여 전면 근대화에 나서 1870~80년대 아직 일본이 내부적으로 부단히 정비하던 시기를 이용했다면 그나마 최악은 피했을 거라는 평가도 있지만 애초에 그게 가능했을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나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다. 이른바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 같은 이름 있는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 이제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오히려 이들은 개화의 영향으로 인해 굉장히 이른 시기에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에서 개화를 외칠만한 개혁적인 인사들은 세도정치를 거치면서 거의 다 사라진 상황이고, 흥선대원군도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역시 개화파를 길러내지는 못했다.

또한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보아서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일본은 16세기인 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정부 단위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를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근대식 무기를 도입하였고,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난학을 통해 지배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서양의 문물과 근대적인 사상이 천천히 주입되며 중화사상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서양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단지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와 동의어인 화혼양재가 기준이었을 뿐이다. 아니, 애초에 그래도 수준이 넘사벽이었던 것이, 사쓰마같은 일개 '번'도 증기선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양무호광제호가 전부(...).

추가로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에도 막부 중후기에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일반 민중들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를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대충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더욱이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통번역해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병인양요 등의 사례를 보듯이 서양의 언어를 알아 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사실상 교류는 커녕 의미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따라서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를 직접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양상이 더 짙었다. 특히 중국 남부지방과 조선 남부는 끊임없이 골고루(...) 왜구들이 활개치고 다닌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양의 교역선이 조선에 거의 도달할 수 없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표류해 온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그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하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벨테브레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천우신조의 기회가 있었지만 같은 사례가 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양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양인들과의 대화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고 그들로 인해 서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일본은 에도 이래로 경제력 역시 조선보다 더 괜찮았다. 가령 기후적인 관점에서[6] 조선은 일본보다 농사 짓기가 어려웠으며 이는 경신대기근 등의 사태로 증명된다[7]. 메이지 유신 당시 시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경제력 차이는 4:1에 달했다. 일본과 조선은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국토의 면적에 따라 인구수 차이가 크게 날 수밖에 없는데, 일본과 조선은 애초에 2배 가까운 국토의 면적차이를 보인다. 일본에 미개척지가 많았다고 하나, 조선도 북부 4군 6진 지역이나 개마고원 일대는 사실상 불모지라... 실제로 인구에서 나오는 농업생산력과 잉여노동력을 활용한 경제력 덕분에 임란시기(전국시대를 거친 직후에도!)일본은 조선을 한참 추월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부재정 규모를 볼 경우 일본은 통상 35%[8], 조선은 10%[9]을 좀 넘기는 바 정부재정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했다. 조선은 대단히 빠듯하게 재정을 운용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잉여재정이 거의 나오지 않았고, 이는 급작스러운 외부의 위협에 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워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정부가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한다는건 농민들에겐 더 좋았겠지만...[10]

4 관련 항목

4.1 시대적 사건

4.2 조직

4.3 사상

4.4 인물

  1. 위 그림은 대정봉환 당시를 묘사한 그림은 아니고, 이로부터 22년 뒤 일본제국 헌법 제정(1889년)을 묘사한 그림이다. 엄밀히 말해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막부 말까지만 해도 저런 서양식 제복을 입은 일본 관료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므로 저 그림이 메이지 유신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2. 유신이라는 말은 시경(詩經)의 "周雖舊邦 其命維新(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개혁으로) 그 명을 새롭게 하다)"이라는 구절에서 땄다. "유신"이라는 이름은 10월 유신에도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유신이라는 키워드는 문호 개방을 정당화하는데 쓰이기도 했다. 가령 서양식 의복의 도입은 옛날 고대의 복장이 이러이러했는데 서양식 의복이 지금 그 성질에 부합하니 서양식 의복을 도입하는 것은 유신에 부합한다라는 식으로.
  3.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1회 "조슈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편(2014년 3월 15일 방송) 참고.
  4. 사소한 무례라고 표현하였으나, 당시 기준으로써는 전혀 사소한 무례는 아니었다. 발단은 1862년 9월 18일, 사쓰마 번주(藩主, 쉽게 말해 다이묘)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 1817 ~ 1887) 행차의 선두를 4명의 영국인들이 말을 타고서 가로지나가려고 한 것이었다. 현재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도지사의 의전행렬을 왠 듣보잡 외국인이 차타고 가로질러 간다고 생각해보자.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교통통제를 하는 것이지만.당시에는 그냥 목이 잘려 마땅한 행위였다. 참고로 시마즈 히사미츠의 아버지, 형, 아들은 사쓰마의 번주였으나, 정작 자신은 되지 못했다.
  5. 엄밀히 말하면 승리도 아니었다. 그냥 미국이랑 프랑스가 목표로 삼고있던 개항을 못시켜서 넓은 의미로 승리라 하는거지 두 양요 모두 전투에서는 완전히 쳐발렸다.
  6. 일본의 경우 특이하게도 연교차가 크면서도 강수량이 고른 기후라 농사짓기 수월한 편인건 사실이다. 대신 그 습도때문에 한여름에는 답이 없다(...) 강수량이 한철에 집중되어있어 가뭄이나 홍수 걱정을 해야 하는 중국, 한반도, 남유럽(남유럽은 겨울에 강수량이 집중됨)이나 강수량이 고르긴 하나 연교차가 지나치게 작고 석회질 토양이 대부분이라 땅이 쉽게 척박해지는 서유럽, 북유럽과는 다른 조건인 셈.
  7. 물론 일본도 텐메이 대기근 등 타격이 없진 않았지만 6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수에 큰 차이가 없는 등. 조선에 비해서는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8. 원칙적으로는 4공 6민 내지 5공 5민으로 4~50%이나 실제 과세 기준액이 하향되었다.
  9. 공식적인 세수는 그 반이나 여러 이유로 잡세가 붙었다.
  10. 조선 후기 민란의 잦은 발생은 외부의 위협에 따라 갑자기 과중한 세금이 부여된 탓도 있다.
  11. 주일 영국 공사로서 에도막부를 지원하고 있던 프랑스와 경쟁해 조슈와 사쓰마 등 웅번 연합을 지원하였다.
  12. 해리 파크 휘하의 영국 외교관, 항목참조
  13.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주름잡던 Jardine & Matheson Co.란 영국 상사의 직원으로 일본에 와서 무기 밀수를 포함한 다양한 밀무역을 활성화 시켰다. 글로버는 회사의 자본과 네트워크를 동원해 사쓰마와 조슈에 최신 무기를 넘겨주는 한편, 당시 그 어떤 일본인도 에도막부의 승인 없이 국외에 나갈 수 없었음에도 사쓰마와 조슈의 청년 인재들을 영국에 몰래 보내주기도 하고(이토 히로부미가 그 중 한 명이었다.) 무역에 특혜도 주었다. 일본 제국이 성립된 이후 일본 정부는 그에게 제국 해군을 위한 첫 증기선 군함의 사업권을 주어 호의를 갚았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남아 오늘날에도 일본 최대의 기업집단이 되는 미쓰비시의 설립에 관여하는 등 산업화에 기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