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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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홈페이지

1 개요

1985년에 창설되어 현재 한국에 잔존하고 있는 양심수들을 석방하기 위한 인권단체. 상징색은 보라색.[1] 약칭 '민가협'.

산하 기구로는 민가협양심수후원회가 있다.

2 역사

민가협 20년

사실 민가협의 역사는 제4공화국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구속자가족 협의회(이하 구가협)'였다. 당시 초대 회장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공덕귀 여사였다.

이후 1976년에 재발족된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에서 바통을 이어받고 난 뒤 1985년 5월 제5공화국 군사정권 하에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대학생들이 대거 구속되자 학부모들이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를 결성한 걸 계기로 이어 구속노동자가족협의회·청년민주인사가족협의회·장기수가족협의회·유가족협의회 등 다른 민주화운동 가족 모임들이 손을 잡고 그해 12월 12일에 남민전 사건, 재일교포간첩단 사건 등 유신독재시절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던 가족들과 1985년 미문화원 사건, 민정당 연수원 점거농성 사건 등 민주화를 요구하다 구속된 수많은 학생들의 가족들이 모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창설되었다. 초대 의장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였다.

그러나 민가협은 첫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는데, 창설 이후 현판식 과정에서 경찰에게 봉쇄당하고 유치장에 끌려간 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민가협 소속 어머니들은 양심수 석방을 위해 교도소나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다 전투경찰, 경비교도대와 몸싸움이 벌어져 급기야는 구속되거나 전경버스에 실려 외딴 곳으로 버려지는 고난을 겪어야 했으며, 1992년에는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민가협 사무실이 압수수색되기도 했다.

1987년 6.29선언 이후에도 양심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88년에 양심수 문제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대학로에서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 시민가요제'를 개최하고 이근안 국민 현상수배 운동에 나서면서 전두환 구속을 위해 백담사까지 행진하는 데 앞장섰으며, 1989년에는 국민들에게 간첩조작 사건의 실상을 알리고, 진상규명과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간첩조작 이제그만>, <간첩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라는 자료집을 발간하였으며, 10월 23일부터 <전국순회 간첩사건 사례발표회>를 가지면서 장기수문제를 알렸다.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고 80여명의 장기수들이 석방되고도 나머지 50여명의 장기수들이 석방되지 않자 1990년 대전교도소 장기수 석방 운동과 1992년 여름 명동성당에서의 장기수 석방 농성을 계기로 당시 수감중인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렸고, 이는 1991년 왕영안 옹 석방, 1995년 최장기 장기수(45년) 김선명 옹 등의 석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995~1999년까지 장기수 석방을 위해 '하루감옥체험' 행사를 진행하여 수많은 예술인, 영화배우, 교수, 종교인, 방송인, 시인, 만화가 등 사회인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냈으며 그리하여 1999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모든 비전향 장기수들이 석방되었다.

게다가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 이후 양심수와 국가보안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민가협은 그해 9월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목요집회'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 16일 1천회를 맞이한 바 있었고, 여기서는 양심수나 국가보안법 문제를 비롯한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내의 다양한 약자, 소수자들의 인권현안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인권신문고’가 되고자 했다. 또한 목요집회는 국제연대집회, 거리음악제, 퍼포먼스,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를 활용한 선전 등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등 민주주의와 인권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악법철폐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사회안전법(1989년), 전향제도(1998년), 준법서약서(2003년)가 폐지되기도 했다. 특히 국정원, 경찰 대공분실, 검찰 공안부, 공안문제연구소(경찰대학 산하기구) 등 공안수사기구에 대한 감시활동과 문제제기를 해왔으며 이러한 활동은 2004년 7월, 공안문제연구소 폐지를 이끌어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민가협은 인권이슈를 사회공론화하기 위하여 ‘인권콘서트(2002년까지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었음.)’ 공연, 하루감옥체험, 시민가요제, 인권만화전, 인권영화 제작 등 문화적 행동에도 나섰다. 그리고 '양심수는 없다'고 되풀이하는 정부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매년 '정기적 양심수 현황 조사', '국가보안법 실태보고서'를 펴내고 있다.

3 의의 및 비판

추가바람.
  1. 사실 보라색은 1976년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