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경찰로 민주화 인사와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한 고문기술자로 유명하다. 별명은 박중령과 불곰이며 김철수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는데 1979년 간첩 용의자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자 본인이 저 가명으로 현대중공업에 위장취업하여 7개월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 검거했다고 한다. 비슷한 사람으로 노덕술이 있다.
1970년 경찰에 발을 들인 이후 줄곧 대공분야에서 일하면서 4건의 간첩 검거 유공을 포함 16차례의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순경에서 시작해서 1984년 경감 승진까지 특진으로만 올라갔다. 고문기술이 특진의 비결이었던 셈. 이쯤 되면... 당시 경찰 내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대공수사가 안 된다" 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단체로 민주화청년운동연합이 있었고 현재 정치권과 시민운동, 언론계 인사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이곳 출신인데 이 민청련 의장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김근태를 전기 고문하는 등 많은 민주화인사들과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했다.
심지어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 당시 이근안을 경기도 화성경찰서로 발령내어 대공용의점을 찾아보도록 했다고 하니 그가 한국 경찰 내에서 얼마나 촉망받는 엘리트였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실제로 화성경찰서에서 근무한 적은 있는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근무 년도나 소속 부서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1987년 민주화 이후 급격히 늘어났던 노조설립과 노동운동을 막기 위해 안보강사로써 각 기업에 안보강연을 125회나 나서기도 했다.
1979년 3월 17일 리즈시절에는 조선일보가 주는 청룡봉사상 충벌레 부문도 수상했다. 신원이 드러날까봐 이석우라는 가명으로 보도해줬다고. 물론 이 상을 추천한 것은 경찰 당국일 테지만 이후에도 조선일보 측이 이 상을 취소하지 않은 걸 보면... 또한 이로서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했다.
그 외에 민투위 강도 사건을 해결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의 실체는 지금까지도 논란중이다. 어쨌든 리즈시절의 그는 이 사건으로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비밀결사를 낚아서 훌륭한 공안경찰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길.
1980년 당시에도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피해자들이 고소를 하기도 했으나, 이근안이 직접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 및 진술서등에 은, 는, 이, 가 같은 조사만 제외하고 전부 한자로 작성하여 이를 직접 본 법관들이 이렇게 유식한 사람이 그런 몰염치한 고문을 행했을리가 없다며 고소가 기각당하기도 하였다. 이근안은 조서를 작성할 때 국어사전을 항상 소지하였고, 모르는 한자는 꼭 찾아서 썼다고 한다. 잘못 쓴 글씨가 있을 경우, 대부분의 경찰은 그어버리고 옆에 쓰거나 수정테이프 등을 사용했을 텐데, 이근안은 새로운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썼다고 한다. 흠좀무 글씨체도 좋은 편으로, 왕년에 고시생들에게 추천되었던 이른바 "백강고시체"의 교과서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1]
파일:Attachment/이근안/Example.jpg
아이폰4로 찍었나보다 푸른멍이...
그러나 이근안과 같은 고문기술자들은 수를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경찰에 잡히고 역사에 고문기술자라고 남은 사람은 이근안을 비롯한 극 소수의 사람들뿐이다. 게다가 이근안 단 1명 법정에 세우려고 수십년 동안 유가족과 각종 시민단체가 싸워야 했다. 그래서 정의는 실현되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밑의 서술을 참조하자.
2 고문 수법
이 문서는 사용자에 따라 불쾌감, 혐오감,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 이미지, 외부 링크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열람에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서를 열람하여 발생한 피해는 바다위키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서를 읽고 싶지 않으시면 즉시 닫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고문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몽둥이로 구타하는 것이 가장 견디기 쉬웠다고 할 정도로 그의 고문은 다양하고도 악랄했다. 잠 안 재우기는 물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기본적인 고문으로 시행하였고 날개 꺾기, 통닭구이도 이근안이 처음 개발한 고문이며 관절빼기는 그가 1인자였다고 한다. 남성 피해자들을 가장 괴롭혔던 고문은 요도에 볼펜심을 삽입해서 괴롭히는 요도 볼펜심 고문이었다.
남성의 신체구조상 요도가 여성에 비해 굉장히 길며 병원에서 수술 등의 이유로 소변줄을 끼워본 경험이 있거나 방광염 증세가 있을 때 요도를 통해 내시경을 집어넣어서 방광 내부를 관찰하는 검사를 받아본 남성 위키러라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소변줄이나 내시경은 잘 들어가라고 젤을 발라서 넣는데도 고통이 심한데 이것들보다는 굵기가 가늘다지만 볼펜심을 그냥 생 요도에 끼운다면 그 고통은 말할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소변줄이나 내시경이 들어갔다 나오면 며칠 동안 소변을 보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을 동반한다.[2] 요도는 상처가 너무 쉽게 나기 때문에 출혈이 쉽게 생기고 감염도 쉽게 된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강한 항생제를 처방하기도 한다. 요도 안이 붓는다면 소변을 배출하기가 힘들게 된다. 소변이 방광에서 요도를 통해 배출되지 않으면 방광내압이 올라가고 급기야는 신장으로 역류를 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신장들이 망가진다.
일단 간첩혐의로 잡혀오면 누명을 씌우기 위해 자백이 필요한데 온몸을 구타한 뒤 칠성판에 몸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다음 샤워기를 들이대 숨을 못 쉬게 하는 물고문, 새끼발가락에 전깃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내는 전기고문이 이어졌다. 보통 공안사건에서는 고정간첩으로 활동해왔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나서야 고문이 멈춰졌다고 한다. 또한 이근안은 연행자들 앞에서 한 손으로 사과를 으깨 보이면서 "내가 손대면 입을 열게 돼 있다" 는 등 위협적인 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심리적인 협박에도 능했다.
17대, 19대, 20대 국회의원. 문화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정치인 민병두가 1980년대 '학림사건' 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다. 민병두는 당시를 회고하며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은 이근안은 선데이서울을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수를 올렸다 내렸다" 며 "나 역시 온갖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당하고 동료들의 소재지를 댔다"고 고백했다.
김근태는 당시 상황을 말하기를 그때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치욕적이었다고 하였다. 일부에선 그럼에도 이근안이 체포되자 그를 감옥에 면회 가고 인간적으로 그를 용서하였다(동아일보 1999년 10월 29일자)고 주장하지만 그런적 없다. 당시 고문에 대한 김근태의 증언.[3]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신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며 강한 전류를 또 흘려보내고, 참으면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상태로 돌입했다.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 거렸습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 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기고문은 담금질해서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락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뛰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 (1987년 나온 ‘김근태의 이근안에 대한 기억’)
1971년 어로작업 중 납북되었다가 늘 감시 속에 살았던 김성학 씨는 역시 1985년 12월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을 당하여 척추디스크가 다 녹아내려 장애인이 되었다. 참고로 김성학 씨가 어떤 사람이었냐면 국군정보사령부(AIU) 소속 북파부대[4]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김성학 씨는 침투, 폭파, 암살 등의 혹독한 특수훈련을 받으며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대검으로 몸을 그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이겨내고 복무를 마쳤다.
이런 인간병기 수준의 전사를 이근안은 납북되었다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로 고문하여 굴복시켰다. 옛말에 매에는 장사가 없다지만 작전 중 북한군에게 잡혔을 때 받게 될 모진 고문에도 견디도록 엄청난 훈련을 받은 사람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굴복시킬 정도이면 어느 정도 강도의 모진 고문을 가해야 할 지는 감히 상상이 불가능하다.
주로 당했던 고문으로는 의자에 앉혀놓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물을 따라 숨을 못 쉬게 하거나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내려치는 방법으로 고문하였다고 증언하였다(조선일보 1999년 10월 29일자). 참고로 물수건으로 물고문을 하면 폐에 물이 안 남는다고 한다.
1983년 2월 사업체를 운영하던 함주명씨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63일을 구금 당하며 이근안에게 43일간의 고문을 당하는 악몽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한 일주일동안 잠을 안 재우더군요. 사람이 일주일동안 잠을 안 자면요, 몽롱한 정신상태가 지속돼 마치 꿈처럼 모든 감각이 뒤떨어지고 먹먹해져요. 그런 후에 온몸을 개 패듯이 패요. 인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거의 실신상태가 될 때까지... 이런데도 시인 안 해? 그러면서 퉁퉁 부어 옴쭉달싹할 수 없게 된 양 어깨를 볼펜심으로 쿡쿡 찌르는 거예요. 그래도 부인하면 사람 하나 딱 누울 만한 칠성판에 뉘어놓고 사지를 찢어 다섯 군데로 묶는 장치가 있어요. 그렇게 꼼짝할 수 없게 되면 이근안이 내 가슴 위로 올라타. 그리고 수건을 입에 덮어씌운 다음 샤워꼭지를 들이대면서 시인해! 시인해! 공기는 안 들어오고 물만 들어오는 거지. 그래도 시인 안 하면 새끼발가락에 플러스 마이너스로 전류를 흘려보내요. 온몸에 전류가 흐르면 완전히 죽어나가게끔 돼요. 그때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면 죽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거예요. 그럼 '그만, 풀어줘'. 그런 후 약간 정신을 차리면 조서 쓴 걸 보여줘요. 보면 다 엉터리로 조작돼 있지. 그럼 난 그렇게 간첩질하지 않았다고(원래 그런 적이 없으니까) 주장하면 또 고문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 새끼 아직 정신 못 차렸다면서.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이근안이 왜 고문기술자인 줄 아세요? 딱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기 때문이에요. 죽지 않을 만큼 사람을 괴롭혀서 뭐든 시인하게끔 하는 지옥의 사자. ... 요즘도 내가 잠자다 깜짝깜짝 깬다면 믿겠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실화다. 이런 고문 기술 덕에 그는 종종 다른 기관에까지 출장 고문(...)을 다니기도 했다.
김근태의 수기 '남영동' 에 보면 이근안이 코에 짬뽕을 부어 폐기종을 만들어버리겠다라고 협박했다고 하며 간첩조작이 벌어진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도 수사과정에서 짬뽕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
그의 고문을 받고 수많은 사람이 거짓자백을 하여 간첩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했고 불구가 되었으며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 악명 덕분에 초창기 딴지일보에서는 SM녀 사진에 이 사람 얼굴을 합성한 것을 자료사진으로 쓰기도 하였다.
3 도피와 자수와 처벌
1988년 12월 한겨레신문이 김근태 전 장관을 직접 고문한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의 실체를 얼굴 사진과 함께 처음 보도한 뒤 이근안의 고문 행각이 알려지면서 1988년 12월 퇴직 이후 10년 10개월 동안 도피했으며 경찰 고위 간부 등과 여러 민간인들이 그를 숨겨주는데 가담하였다. 하지만 결국 1999년 10월 28일에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하면서 그의 도피 행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0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확정받았다. 그 뒤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 2006년 11월 7일 만기 출소하였다.
여주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차량에 올라타는 이근안.
출소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라고 출소의 변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 후회가 구라라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4 목사 안수 후의 행적
前 목사. 12년 1월 19일 현재, 교단에서 면직되었고 한번 면직된 이상 복직은 불가하다고 한다.
교도소 수감 중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쪽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밟은 이근안은 2008년 10월 30일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다. 전직: 물고문 전문가, 현직: 물세례 전문가 나중에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버젓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공안기능이 무너져 제대로 잡지 못한다. (중략)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보니 하늘나라를 찾게 됐고 그래서 예수쟁이가 됐다" 고 2010년 12월 국제외교안보포럼 강연에서 언급했다. # 그야말로 공안수사관 시절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표적인 고문 피해자인 故 김근태 의장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날 출소한 이근안과 마주쳤는데 이근안이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근안의 우는 모습에서 너무나 가식이 느껴져 용서해주지 못했는데, 그 일이 마음에 계속 걸린다는 것. 그런데 그 이후에 이근안은 설교 중에 자신이 김근태 의장을 고문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건전지 하나 들이대면서 겁을 줬더니 빌빌거리더라."고 비웃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또다른 병크를 터트렸다. 2010년 1월,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애국자"라고 주장하여 세간의 분노를 샀다.
사실 목사가 된 거 자체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온 것' 으로 악명 높은 김신조도 목회활동을 하고 있으니 최규식 서장의 가족들로서는 분노할 만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신조나 기타 과거에 어떤 일을 하다가 목회자가 된 경우, 적어도 과거와 결별을 하거나 과거의 잘못은 자신을 이 길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앙고백을 한다지만 이근안은 그런 거 없다.
게다가 기독교는 원래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는 종교다. 과거에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죄가 있다고 진술을 조작한 자가 과거의 적들에게 용서를 구하기는 커녕 오히려 고문받던 모습을 비하하고 놀리는데 목사이기 이전에 신자로서의 자격조차 없다할 수 있겠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저건 그냥 사람이 아니다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님이 마지막에 얼마나 처절하게 고문당하셨는지를 안다면 어떤 이유에서라도 고문을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기독교인들을 학살하다가 회개하여 기독교의 교부가 된 사도 바울의 예도 있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박해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미장원을 하는 부인과 학교에 다니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도망다니느라고 가정이 파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극동방송 인터뷰에선 남편을 애국자라면서 국가유공자로 정해줘야 한다느니 하는 아내의 말이 명작이었다. 더불어 극동방송도 열성적인 개신교 신자라면서 이제 용서해주자는 두둔까지 해주었고 아예 목사가 된 뒤로는 종종 나와 찬양해준다. 이 때문에 정교분리, 공정보도 원칙을 기반으로 하여 운영되는 기독교방송은 자사 프로그램, 노컷뉴스 등에서 이근안이 언급되면 인간 말종 짓을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정말 작정하고 까고 있다. 그것을 지켜보는 일부 개신교인들은 다만 안습...
그러나 정형근과 백모씨 등등 남영동에서 같이 고문에 가담한 경정들은 실명이 공개되었음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기야 박종철 사건 때 실제 수사 및 은폐를 명령한 모씨의 경우는 나중에 월간조선에서 스스로를 김삼룡을 처단한 반공투사로 자처해서 충격과 공포를 가져왔다.
프리존 같은 곳에 나와 고문을 한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캄보디아에도 크메르 루즈 고문 기술자 겸 아예 수용소장이던 꾸앙 껙 이우가 있는데 이근안처럼 숨어살다가 갑자기 개신교 목사가 되어 회개했다느니, 자신이 잘못 없다며 이근안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나마 여긴 2009년 40년형을 먹여서 나이 100살이 넘어서야 나올 수 있게 되었는데... 이근안을 보자면 "안습"...
4.1 2010년 이후의 근황
2010년 드디어 고문은 예술이다라는 망언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인터뷰를 보면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심문기술자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해온 악행의 피해자가 있고 그에 대한 증언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인터뷰에서 아들이 몇이나 죽었건 도피생활을 했다느니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키고 있다.
관련된 망언으로는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
김근태씨가 2011년 12월 30일에 돌아가시고 난 뒤 다시 주목받았다. 이때 이근안 및 보수적인 여론에선 다시금 김근태 본인은 이근안을 용서했었다고 주장하며 실드를 쳤지만 유가족인 배우자 인재근은 이를 정면 반박하며 실제로 김근태는 살아생전 그를 용서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근태의 사망으로 인해 이근안의 과거 전력이 다시금 세간의 화제가 되어 그를 목사시켜준 교단이 욕을 먹게 되자 결국 2012년 1월 14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측은 이근안의 목사직을 박탈했다. 이 사실은 2012년 1월 19일 각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교단에서 정식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교계 내에서 그냥 하던 일은 계속 할 수 있다. 어차피 담임목사 같은 직위가 아니라도 교회 내 간부로 일한다거나 전도사 등 다른 직위로 바꾸어서 간증행위를 계속하고 다닌다거나 하는 등. 때문에 목사직 박탈만으로 장로회가 그에게 제대로 된 처분을 내렸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실제로 교단 소속의 종교인이 사고를 쳐서 처벌을 받더라도 이렇게 멀쩡히 활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법에 목사사칭죄 같은 것은 없기에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교단에서 쫒겨나도 새로 교단을 차려 목사짓을 할수도 있다.
한편 조선일보가 그의 근황을 은근슬쩍 애절하고 안타깝게 그려내며 실드를 치는 기사를 써 빈축을 샀다. 당연히 당해야 할 일을 마치 그가 희생양인 것처럼 그려내고 그가 너무 안타깝게 산다며 슬픈 가족사까지 밝혔지만 그렇다고 죄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경악스러운것은, 이 기사의 댓글을 보면 찬성순으로 봤을 때 이 인간 쓰레기를 쉴드치는 댓글과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근안을 비판하는 댓글은 찬성수를 많이 받아 순위에 올라갔다가도, 한순간 사라진다. 이에 찬성수가 적은 최신순 댓글란에서는 그야말로 세기말의 개판이 벌어지고 있다.
2012년 11월, 그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행한 22일간의 고문만행을 다룬 영화 남영동1985가 개봉하였다. 그도 11월 22일 종로 피카디리 극장을 찾아 영화를 감상하였는데, 동아일보기자에게 "영화를 보니 물고문을 한다면서 샤워꼭지를 빼버리고 물을 퍼붓던데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내가 그거 보고 웃었어. (500mL 물병을 가리키며) 이 정도면 돼. 얼굴에 거즈를 올려놓고 마르지 않게 물을 조금씩 뿌려주면 거즈가 착 달라붙어 숨을 못 쉬는 거지."라며 자신의 고문수법이 좀 다르게 묘사되었다고 인터뷰를 했다. 이쯤되면 죄책감이고 뭐고 반성을 하지 않는 듯하다
5 창작물에서의 묘사
모바일 게임 아니마에서 '고문관 이그난' 이라는 인물(몬스터)이 등장하는데 전 국왕을 고문하여 반신불수로 만들었다는 걸 보면 이 인간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이 고문관이란 놈은 썩어가는 좀비가 되어 있다. 죽이면 제법 좋은 아이템을 주는 지라 아니마 유저들은 오늘도 이 몬스터를 후드려패는 중. 이제 이 게임을 하기가 대단히 힘들어졌고, 너무 오래 전 게임이지만 아직 apk 등을 통해 하는 사람들은 하고 있다.
배철수의 만화열전 고우영 삼국지에선 길평이 조조를 독살하려다 발각된 뒤, 고문을 받는데, 여기서 길평을 고문하는 이근왕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비교적 재미없는 전개로 이어졌던 배한성의 고전열전 수호지에서는 채경에게 보낼 봉물짐을 훔쳤던 백승을 심문할 때 남영동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남자가 물고문을 하는데,[5] 이 남자가 이근안을 연상케 한다.[6]
만화가 김진태의 보글보글이라는 만화에서는 어쩐일인지 카스트라토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쓰는 악당으로 등장하는데 폭발사고로 바지가 벗겨진 채 죽게 되고 그때 그의 본명 '이근안(40)' 이 밝혀졌다.
90년대 초반 서울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메피스토라는 작품에서는 형사사건 담당 오근안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무슨 일인지 전기고문 대신 짬뽕고문으로 범인을 조작하는 캐릭터다. 부하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다른 증거물이 나왔기 때문에 주인공이 범인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혹을 상콤하게 씹어준다. 후일 주인공은 무죄로 풀려나왔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변호사등 자신을 망친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는데 고문도 고문이지만 악명높은 부패경찰인 오근안은 그 전에 재산을 빼돌려 해외도피 한 것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진실은 악마인 메피스토와 거래한 주인공은 오근안이 주인공과 생명의 끈을 같이 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산채로 땅속에 파묻고 변호사 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고 감옥에 들어간다. 주인공은 감옥에 있는 동안 오근안은 땅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 오랜 세월이 흘러 가석방으로 출감한 주인공은 오근안을 마침내 죽이고 그걸 지켜보는 메피스토도 혀를 차는게 결말.
남영동1985에는 '이두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 배우는 이경영. 고문할 때마다 휘파람으로 클레멘타인을 부른다.
영화 변호인에서 곽도원이 연기한 차동영 경감의 모티브이다. 곽도원의 연기가 정말 살의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무지무지 악랄하다(...). 고문 현장을 찾아낸 송강호를 패다가 애국가가 나오자 곧바로 패는 걸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은 필견.- ↑ 백강글씨체는 글씨를 빠르게 쓰면서도 날리거나 지저분하게 쓰지 않고, 큼직큼직하고 알아보기 쉽게 글을 쓰는 필체로. 제한된 시험시간 내에 많은 양의 글을 빠르고 읽기 쉽게 써야 하는 고시 대비용으로 적합하다. 실제로 아직도 악필인 고시생들이 이 백강고시체를 연습해서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다.
- ↑ 과장 약간을 곁들이자면, 오줌을 처음 쌀 때는 숨이 턱 막히며 눈 앞이 잠깐이지만 하얗게 변한다.
- ↑ 이 사건과 관련해서 알고 싶은 위키러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항목 참고.
- ↑ 흔히 HID라고 불리는 육상북파공작부대. 참고로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복무한 부대는 UDU로 해상북파공작부대다.
- ↑ 정확히는 자신이 물을 땅에 버리고,마시는 시늉을 벌이면서.
- ↑ 이 부분이 전파를 탈 때 남영동1985가 극장에서 상영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