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

1 개요

1980년대 진보적인 미술인들이 당시의 민주화 운동 흐름에 동참하면서 일으켰던 현대미술운동.#

2 특징

민중미술 이전인 1970년대 미술계는 추상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형성 탐구에 중점을 두는 모더니즘 추상회화는 그 형식주의적인 특성상 사회 변화에 무관심하거나 이에 얽히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미술대학을 다니던 미술가들 중 일부는 이런 예술계의 흐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들은 미술을 통해 사회 변화에 대해 발언하고 참여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이들은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하는 추상화가들과 달리 시위 현장에 가서 판화를 제작하거나 걸개그림을 그리는 등의 활동을 하며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려 했다. 당연히 형식적으로도 형상(figure)의 묘사를 극도로 꺼리는 추상화와 달리 사실적 묘사는 물론 사진 등의 다른 매체 활용에도 적극적이었다.

민중미술에 영향을 준 외국 작가로는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 중국의 문학가 노신, 미국의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 벤 샨 등이 있다.# #

한국의 민중미술은 1969년 오윤, 임세택, 김지하 등이 ‘현실동인’을 결성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79년 김정헌, 오윤, 주재환 같은 예술가들과 성완경, 최민 등 평론가들이 ‘현실과 발언’ 동인회를, 홍성담, 최열 등은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결성했다. 이외에도 민중미술 작가들은 1982년 ‘임술년’, 1983년 ‘두렁’ 등의 창작집단을 결성해 활동을 했다.

3 역사

민중미술 이전인 1970년대 미술계는 추상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형성 탐구에 중점을 두는 모더니즘 추상회화는 그 형식주의적인 특성상 사회 변화에 무관심하거나 이에 얽히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미술대학을 다니던 미술가들 중 일부는 이런 예술계의 흐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들은 미술을 통해 사회 변화에 대해 발언하고 참여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이들은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하는 추상화가들과 달리 시위 현장에 가서 판화를 제작하거나 걸개그림을 그리는 등의 활동을 하며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려 했다. 당연히 형식적으로도 형상(figure)의 묘사를 극도로 꺼리는 추상화와 달리 사실적 묘사는 물론 사진 등의 다른 매체 활용에도 적극적이었다.

민중미술에 영향을 준 외국 작가로는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 중국의 문학가 노신, 미국의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 벤 샨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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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작가의 생전 모습. <칼노래>, 광목에 목판, 채색, 30×25cm, 1985. <아라리요>, 광목에 목판, 채색, 45×38cm, 1985(왼쪽부터).#

한국의 민중미술은 1969년 오윤, 임세택, 김지하 등이 ‘현실동인’을 결성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79년 김정헌, 오윤, 주재환 같은 예술가들과 성완경, 최민 등 평론가들이 ‘현실과 발언’ 동인회를, 홍성담, 최열 등은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결성했다. 이외에도 민중미술 작가들은 1982년 ‘임술년’, 1983년 ‘두렁’ 등의 창작집단을 결성해 활동을 했다. 이 당시 민중미술 작가들은 한국 전통 도상을 차용해 현대미술로 재풀이하는 이른바 '한국적인 것'의 구현에 중점을 두어 작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은 민중미술 작가들의 활동을 제한하려 했고, 1985년 7월 20일 아랍문화회관에서 전시 중이던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시 출품작 36점이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되고 19명이 강제 연행, 5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미술공동체에서 기획하고 두렁회원 등 20, 30대 초반의 젊은 미술인 30명이 출품한 이 전시가 탄압을 받자 민중미술 작가들은 민족미술협의회를 결성하여 이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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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 작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88년 이한열 열사 1주기 추모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전후로 벌어진 학생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에서 이들은 대형 걸개그림을 걸어 저항에 참여했다. 1987년 6월 11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었던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피격당했다는 보도가 나간 뒤, 최병수 작가는 연세대학교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밤새워 걸개 그림을 그려 다음날 학생회관 건물 외벽에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내걸었다. 이후 1988년 전국 현장미술운동집단의 연합체인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결성과 민족미술협의회의 현장미술운동집단이 형성되면서 그 운동의 폭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정부의 민중미술에 대한 탄압은 여전하여, 공안정국 시기인 1989년에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사건신학철 '모내기' 사건이 대표적이다.

민중미술 작가들의 작업은 1990년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이후 문민정부 시대가 되면서 변화를 맞는다. 더 이상 군사정권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이들의 관심사도 민주주의 사회 구현보다 노동, 생태, 소수자 인권, 역사, 대중문화 등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그동안의 민중미술 성과를 회고하는 <민중미술 15년> 전시가 열려 미술계에서 민중미술이 자리를 잡고 정식으로 예술적 평가를 받게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민중미술계열 작가들은 <민중미술 15년> 전시가아직 발전가능성이 많은 민중미술을 박제처럼 고착시켜버린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미 1990년대는 과거와 같이 '특정한 불의에 투쟁하는' 식의 예술을 진행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사회적으로는 문화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미국과 일본의 대중문화, 상업문화가 유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민들의 가치관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사회주의 방식의 '혁명'보다 헐리우드의 영화나 일본의 애니메이션, 서태지로 대표되는 새로운 대중문화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민중미술 작가들은 이런 사회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레퍼토리를 답습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일부 작가들의 작품은 (1970년대 추상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고위층에게 바치는 '뇌물'처럼 되어버렸다.# 한편 김지하 같은 일부 작가들은 보수쪽으로 전향하였다.

4 영향

1990년대~2000년대에 성인이 된 세대가 소위 수저계급론을 꺼내면서 산업화 세대와 586 세대들을 싸잡아 '기만적인 꼰대'로 지칭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시기에 예술교육을 받은 신세대 예술가들도 민중미술을 추상미술과 마찬가지로 '유행이 끝난 예술'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세대 예술가들은 서구에서 유학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참고하거나, (좋든 싫든 백남준에서 영향을 받아) 미디어아트를 건드리거나, 아트페어 등을 기웃거리거나, 영세한 소규모 공간에서 각자도생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전 세대의 예술을 극복하려 했다.

그래도 민중미술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예술가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시사 만화가 박건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