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1 이한열 열사

300px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으로 재학 중이던 생전의 모습.

파일:00394430601 20110610.jpg
(같은 대학교 학생 이종창[1]에 의해 부축받은 채 피를 흘리는 이 사진은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렸다. 또한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2]되었다.)

파일:Attachment/1100755353.jpg
(민중미술가 최병수씨의 걸개그림. 이한열 열사의 장례를 치를 때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걸려 있다. 이 그림의 높이가 중앙도서관의 높이와 거의 같다. 현재 연세대학교에 보관중이며 6월 9일 무렵 중앙도서관에 걸린다.)[3]

이한열(李韓烈, 1966년 8월 29일 ~ 1987년 7월 5일) 열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하던 중 1987년 6월 9일 시위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 날 일부 전경최루탄을 수평으로 직사한 것[4]이 뒷머리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7월 5일에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5]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이어서 학생이 정부의 폭력진압으로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5공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가중되었고,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우상호 총학생회장이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6]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의 영정사진을 들고 선봉에 서기도 했다. 배우 우현은 장례식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직할시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는데,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 때 문성근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는 아직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설을 하는데 바로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26인[7]의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여담으로 이 때의 인연으로 이한열 군의 어머니인 배은심씨는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npe92 nalda51.jpg
당시 연설을 하던 문익환 목사의 모습.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성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8]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거의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9]이었으나 효과는 엄청 났고, 지금도 듣다보면 소름이 끼치는 명연설이다.유튜브[10]

안치환"마른잎 다시 살아나" 라는 곡은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이다.

이한열 열사 흉상]]과 [[http://jinheung.hs.kr/xboard/board.php?mode=imgView&tbnum=64&sCat=0&page=1&keyset=con_sub&searchword=%BF%AD%BB%E7&number=12903&file_num=10602

연세대학교 안에는 이한열 동산과 기념비가 있다. 신촌에 민주화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어머니 배은심씨가 국가에서 받은 보상금을 사용해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 또한 연세대학교에서는 매년 학생회의 주도로 6월에 중앙도서관 앞에서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린다. 특히 2008년 촛불시위 열기가 한창일 때에는 6월 10일 세종로에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노제가 열리기도 하였다. 또한 국제캠퍼스가 생긴 현재에는 국제캠퍼스에서도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현수막이 걸리고 위의 최병수씨의 걸개그림이 국제캠퍼스 종합관 벽에 걸렸으며, 생협 앞에 이한열 열사의 영정과 향이 놓이는 등 뜨거운 추모가 이루어지고 있다.

파일:RYcu4Uh.jpg
△국제캠퍼스에 걸린 이한열 열사 추모 현수막.

파일:IyS4Qiw.jpg
△국제캠퍼스 1기숙사 생활협동조합 앞에 놓인 이한열 열사의 영정.

재학당시 중앙동아리인 '만화사랑'을 창설하였으며, 운동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당 동아리는 1989년 프락치로 의심되는 학생을 취조하다가 숨지게 한 사건#이 일어난 뒤 운동권과 전혀 무관한 동아리가 되었으며, 이한열 열사 관련행사 역시 학생회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동아리에서 보관중이던 사료들은 전부 이한열 기념사업회에 기증되었다.

또한 배우 신현준이 대학 신입생 시절 당시 이한열 열사가 사망할 때 까지 옆에서 지켜봤다며, 월간 1996년 4월호에서 인터뷰했다. 당시 5공정권 심판 등등 정치권에 큰 불신을 가지던 시기라 이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팟캐스트 방송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는 출연자 중 물뚝심송이 연세대 학생이였을 때 이 현장 근처에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딴지라디오 시절 61화 역사=나 편에서 나온다. 누군가가 최루탄에 맞아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그 피해자가 이한열이였는지도, 최루탄을 직사로 맞아서 쓰러졌다는 내용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 학생들이 경찰의 병상 습격을 막기 위해 순번을 짜고 세브란스병원을 지켰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공포와 분노를 함께 느끼면서 6월 항쟁의 현장을 겪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2015년 여름,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제1공학관 철거를 위해 짐을 들어내다 학생회 창고에서 피묻은 연세대 화학공학과 과기가 발견되었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흘리며 쓰러질 때의 피가 묻은 학생회기였다. (일설엔 이 기로 이한열 열사를 지혈했다고도 한다) # 해당 기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증되었으며, 기념사업회는 보존처리 후 이한열기념관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한열 열사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근처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12나길 26에는 이한열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관심있는 위키러라면 방문해볼 것. 열사의 생전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개장시간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2 영화 감독 이한열

김청기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하며 경력을 쌓았다. 단 김청기의 경우처럼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진 않았고 영화 자체의 성향은 남기남 감독에 가깝다. 어린이 영화 검객 산지니도 이 감독의 연출작.
  1. 이후 연세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하다 2011년 연세대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됨. 참고로 둘은 일면식도 없는 남이었다.
  2. 6월 항쟁 항목에 있는 "아! 나의 조국" 사진과 함께 선정됨.
  3. 참고로 2012년 6월 현재 학생회관 외벽(중앙도서관 맞은편)에 걸려 있다. 2013년 6월에는 원래대로 중앙도서관 외벽에 걸렸다.
  4. 이 최루탄은 수류탄처럼 던지는 형태가 아니라 유탄발사기와 비슷한 발사형이다. 원래 30도 이상 위로 들어서 발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5. 4.19 혁명의 발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 사망사건도 고성능 최루탄을 직사한 것 때문이었다. 참고로 1960년에 김주열 군이 맞은 당시 최루탄은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끔찍한 모습이였다.
  6. 2016년 20대 총선 후 시점에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인 그 우상호 의원이 맞다.
  7. 사실 중간에 '광주 2천여 영령'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2천여명 + 25명이다
  8. 1987년 3월에 내각제 개헌 반대와 광주사태 책임을 주장하며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분신.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자료에 따르면 '기종도 열사'라고 되어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육성을 들어보면 전혀 기종도로 들리지 않고 표정두 열사라고 들린다.
  9. 열사들의 명단도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라 연설 직전에 문익환 목사에게 열사들의 명단이 필요하다고 요청 받아서 기억 나는대로 쓰고 넘겨준 것이라고 한다.
  10. '지금 이순간의 역사'의 자자 한홍구는(정확한지는 수정바람) 친구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연설을 듣고 있는데, 당시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유명인사들이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좀 지루했는데(...) 문익환 목사의 연설을 듣자 졸던 학생들마저 모두 일어나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