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現代美術
Korean modern art
목차
1 개요
이 항목은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한국에서 나타난 미술들을 정리한 항목이다.
2 전개
2.1 일제강점기 모더니즘의 도입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는 근대화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모더니즘 유입이라는 것을 단순히 모더니즘적인 기법의 도입으로만 본다면 모더니즘이 한국에 유입된 최초의 시기는 표현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경향이 유입된 일제시대(1910 - 1945)로 보아야 한다. 일제 치하에서 미술을 배운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유학의 과정에서 모더니즘 미술을 접했으며 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모더니즘 미술이 한국에 유입되었다.[1]
이 시기에 활동한 작가들 중에는 친일파로 의심받거나 친일파였음이 확실한 사람들이 있다. 김기창이 대표적. 이들 예술가들 중 일부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위키백과에 게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 문화/예술 항목을 참고하길 바란다.
2.2 해방 이후
하지만 미술사에서 일반적으로 한국의 모더니즘이라고 하면 해방 이후의 역사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모더니즘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 모더니즘의 유입을 일제시대로 소급할 경우 이는 모더니즘 기법이 최초로 유입된 시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더니즘 미술이 내포한 사상적인 부분을 포괄한다면 한국에서 모더니즘 미술은 해방 이후부터 시작된다.
2.3 1960년대 한국화
해방 이후의 모더니즘이 그 이전의 모더니즘과 차별되는 점은 모더니즘이라는 기법에 향토성이라는 사상이 녹아들어 갔다는 것이다. 향토성이라는 주제는 이미 일제시대 선전(조선미술전람회)체제에서도 심사위원들이 심사 기준으로 삼았던 중요한 주제다. 하지만 이때의 향토성이라는 것은 일제 치하라는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어느 정도는 원시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인성의 작품 <가을 어느 날>이 대표적. 하지만 해방 이후 향토성이라는 단어는 서양의 기법과 한국의 전통 계승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코드를 융합하는 과정에서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된다. 오래전부터 한국의 전통적인 미로 주목되었던 해학성의 반영(이중섭, 최영림, 이만익) 혹은 민속적인 소재를 통해서 향토성을 표출하는 경향(김기창, 박수근, 장리석)은 모두 해방 이후에 생겨났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의 모더니즘은 60년대까지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 이 두개를 놓고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2.4 1970년대 단색화
이러한 한국의 모더니즘은 70년대에 들어서 모노크롬 회화가 주류가 되는 미술로 전환된다. 세대간 싸움? 만약 모더니즘을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이야기한 대로 "회화의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해 본다면 서구의 기준으로 한국의 모더니즘은 1970년대에 꽃피웠다고 볼 수 있다. 모노크롬 회화는 그 시작 자체가 회화 고유의 미를 추구한다는 목표아래 생겨났기 때문. 이러한 모노크롬 회화 경향은 1950년대 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던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체제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서 생겨났다. 당시 주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전 체제 하의 미술가들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리얼리즘의 경향을 보였는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추상 미술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주류 미술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추상 미술 운동이 1970년대 들어서 모노크롬 회화로 전환된 것이다. 김환기, 박서보, 이응노와 같은 미술가들이 이 시기 모노크롬 미술 경향을 보여주며 그 중에서 수화 김환기는 한국적 모더니즘을 이끈 화가(환기 재단, 2013),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김영나, 2010)란 칭호를 얻으며 한국 미술에 큰 획을 그었다.
하지만 추상미술이 으레 그렇듯 모노크롬 역시 인간이 자동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인식하는 거울 신경 세포에 따른다는 것을 무시한 결과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당시 군사정권 시대 상황을 무시하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만 하는 태도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 작가들은 이 시기 군사정권의 요구에 못이겨 모노크롬도 아닌 역사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는 이들에 비판적이었던 예술가들에게 '벽지 공장장'(....)이라는 별명아닌 별명을 얻게 된 원인이 되기도.. 이후 2000년대 들어 모노크롬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단색화라고 새롭게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2]
한편 이 시기 해외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도 있었는데, 백남준과 이우환[3]이 대표적이다.
2.5 1980년대 민중미술
1970년대 이래로 정점을 구가하던 추상 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로 대체되었다. 그렇다. 세대차이다. 민중미술은 모노크롬 회화가 가지고 있었던 형식적인 경향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서 반발했으며 미술이 사회의 일부로서 삶의 현장과 가까이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70년대 이전에 활동하던 민중미술가들은 1979년에 열렸던 기념비적인 전시 <현실과 발언>전을 계기로 두각을 드러냈고, 1985년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을 계기로 결집되기 시작했다. 80년대에 활발히 활동한 대표 작가로는 신학철, 임옥상, 최병수, 강요배, 홍성담, 안창홍, 오윤, 이종구 등이 있다. 민중미술은 추상회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회화를 거부하고, 추상에서 다시 구상화로 복귀했다. 이는 미술 그 자체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벤 샨이나 레지날드 마쉬와 유사한 사회적 사실주의와 가까운 것이었다.
2.6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1990년대 이후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 정권이 자리를 잡으면서 민중미술의 존재 의의도 많이 줄어들었다. 대중운동의 퇴조, 냉전구조의 붕괴와 국제사회의 상황 변화, 그에 따른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도 이에 영향을 끼쳤다.# 이에 민중미술 작가들은 독재정권 타도나 통일 실현 같은 주제보다, 실질적인 인권이나 개인적인 관심사로 작업 방향을 돌리게 된다.[4] 이와 함께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경향이 한국미술계로 들어오게 된다. 이에 따라 점차 개념미술을 시도하는 작가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승택 등의 행위예술가들이 대표적이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신기술의 영향을 받은 미디어아트 역시 한국미술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시작은 백남준이 점차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그가 시도한 비디오아트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초기에는 박현기를 비롯해 민중미술 계열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비디오아트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미디어아트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한국미술은 점차 혼성예술, 종합예술화 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불, 장영혜, 양아치 같은 작가가 대표적인 미디어아티스트들이다. 특히 작가뿐 아니라 기획자 등 까지 넓혀 보면 한국에서 백남준의 영향력은 어찌보면 70년대 추상미술이나 80년대 민중미술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 큐레이터인 김선정, 김홍희 등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김선정 작가의 경우 1991년 미국 미시간주 크랜브룩 미술대학원 졸업 후 백남준의 소개로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인턴십 과정을 거친 적이 있고, 이 때 만난 동료 큐레이터와 작가들이 그의 막강한 국내 외 '인적 네트워크'의 기반이 됐다.# 김홍희의 경우 뉴욕 한국문화원에 근무하는 남편을 통해 바버라 툴 여사를 소개받았고, 툴 여사가 키친아트센터에 초대해 백남준을 알게 된 뒤 미술 큐레이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2.7 2000년대-2010년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빠르게 신자유주의 경제에 맞춰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미술계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큰 변화는 미술관의 변화였다. 서구에서 프랭크 게리가 건축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며, 미술관의 역할과 지위가 변화하게 된다. 역사를 기록하고 민족의 정수를 전시하는 미술관의 역할이 약화되면서, 2000년대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투기적 자본의 범람으로, 미술이 하나의 투기적 재화로 다뤄지게 되면서, 미술 시장이 미술 담론과 유리되었다.
많은 인구가 대학에 진학하는 한국에서는 미술대학에서 한해 배출되는 졸업자수에 비해 전업작가가 되는 예술가 수가 현저히 적다. 이는 세계적 현상이나 한국 사회의 특수성 속에서 더욱 증폭되어 나타난 문제이다. 인구 감소와 대학구조조정과 맞물려 그나마 있던 예술기관도 불황에 몸집을 줄이거나 문을 닫아가는 시기이다.
한국 미술계의 좁은 판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예술 그룹 뮌(최문선, 김민선)은 이런 한국 미술계의 현실을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보여주었다.# 뮌은 844명의 미술인, 777개의 전시를 분석해 김선정 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예술감독,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같은 기획자들을 중심으로 박찬경, 배영환, 안규철, 양혜규, 임민욱, 정연두, 김홍석 등의 작가들이 전시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뮌이 제시한 웹사이트의 정보가 100%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다소 무리하게 간략화한 측면이 있다.
한쪽에서는 미술을 패션 디자인처럼 띄워보려고 애썼다.유명 기업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려 노력하거나 방송에 출연해 인지도를 쌓으려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아트 스타 코리아 같은 케이블 프로그램의 경우는 슈퍼스타K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포멧을 적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난해하고 고민해야하는 미술은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예술가들을 지원한다고 여러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 다만 길게 보고 가는 사업이 없고, 1년 단위의 예산 처리 주기에 맞춰서 돌아가는 부분이 있다.
2010년대 이후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 세종문화회관 지하에서 열린 <굿-즈> 행사(공식 트위터)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서울바벨> 전이 주목#을 받았다.
3 관련 항목
- ↑ 미국,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외국의 것들을 맥락없이 한꺼번에 수입해 오는 모습을 보였다. 즉 순차적으로 사조별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뷔페식으로 한번에 들어왔다는 것. 이에 따라 어떤 작가는 인상주의, 어떤 작가는 초현실주의 같은 식으로 자기 입맛에 따라 사조를 선택해 작업했다. 때문에 그 사조의 원래 의미까지 따른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외형상 보이는 양식을 따라하는데 그쳤다.
- ↑ 하지만 한국의 모노크롬은 일본의 '모노하'라는 추상미술 장르에 대한 한국적 변형
나쁘게 말하면 표절이기 때문에 '단색화'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연구자들도 많다. 국전세대의 선생님들에게 이들은 말 안듣는 민중미술화가들에 비하면 좀 튀는 모범생들이었고, 박서보 같은 인물들은 홍대 미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는데, 자연스레 홍대 미대의 흑역사도 함께 하시는 분들이 되시겠다..... 후대에 이들에 대한 박한 평가는 이런 개인적인 배경도 없잖아 있는 듯. - ↑ 이우환은 한국 단색화 흐름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우환은 일본에서 모노하 미술을 이끈 중추적 작가로 활동하면서 단색화에 영향을 끼쳤다.
- ↑ 굳이 따진다면 NL보다 PD 성향이 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NL스러운 작업을 고집하는 작가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