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

1 중국 후한의 인물

崔烈
(? ~ 192년)

후한 말의 관료. 자는 위고(威考). 최균(崔均)과 최균(崔鈞)의 아버지이며, 최인의 손자이자 최원의 형의 아들이다.

고양 안평현 출신의 사람으로 기주의 명사로써 명성이 있었으며, 정위를 지내다가 185년 3월에 원외가 사도에서 면직되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아 사도가 되었다. 그 당시 환관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농락 때문에, 삼공의 자리는 환관의 허락을 받아야 오를 수 있었는데, 이때 그는 황제의 유모에게 5백만 전을 보내 사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사도로 임명된 날에는 영제가 약간 인색하게 굴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면서 만약 인색하게 굴었다면 사도의 자릿세는 자그마치 1천만 전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양주에서 반란이 일어난 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할 때 땅을 떼어줘서 진정시키자는 의견을 냈다가 부섭이 최열을 죽여야 한다면서 크게 비판받았으며, 187년 여름 4월에 장온이 태위에서 면직되자, 사도에서 태위로 임명되었다. 더하여 지우의 문장지에서 보이는 정황에 의하면 그는 곧 이어 양평정후에도 봉해졌다고 하며, 같은 해 11월에는 태위에서 파직되었다.

189년에 하남 중부 연 민공소제와 진류왕(헌제)를 부축해 낙사로 가서 멈출 때, 공경백관들이 북망 판 아래에서 황제를 봉영하며 앞에서 이들을 이끌었는데, 동탁이 보기 수천을 거느리고 와서 봉영하자, 동탁을 꾸짖으면서 자리를 피하라고 했다가 동탁의 협박을 받았다. 최균이 원소가 군사를 일으킨 관동군에 참여하면서 미의 감옥에 갇혔으며, 192년에는 성문교위를 지내고 있다가 삼보의 난으로 6월에 태복 노욱, 대홍려 주환, 월기교위 왕기 등과 함께 이각, 곽사의 공격으로 장안성이 함락되자 피살되었다.

세설신어에는 춘추와 관련해 복건과의 일화가 있다.

그와 관련된 고사성어로는 동취가 있다.

2 대한민국 사회운동가

1949년 1월 19일 ~

1949년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춘천시로 이주하여 춘천고등학교, 강원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하였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당하였다.

1982년 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하며 환경운동에 참여하였고 현재 환경재단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