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예지트 1세

Birinci Bayezit(터키어)
بايزيد اول 오스만 터키어
(1360 ~ 1403)

오스만 제국의 제4대 술탄. '별명'은 번개 일명 뇌제(雷帝). 무라트 1세의 아들이자, 메흐메트 1세의 아버지. 바야지드, 베야즈트 등으로도 불린다(Bayezid, Bayazid, Bajazet, Beyazit, Bejazid or Bayazit). 터키어로는 '바예지트'이라고 부르며,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한 신속하고 과감한 용병술로, '이을드름(ییلدیرم: 번개, 현대 터키어로는 Yıldırım)이라 불렸다[1].

흔히 티무르 최대의 라이벌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바예지트 1세 때의 오스만은 아직 메흐메트 2세가 제국의 기틀을 다지기도 전의 시기였으며, 이 당시 오스만의 영역은 아나톨리아 서부와 그리스 반도의 동부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로 티무르의 최대 라이벌로 그를 가장 많이 괴롭힌 인물은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토크타미시였다.

1 즉위와 연전연승

1389년 코소보 전투 직후에 아버지 무라트 1세세르비아 귀족에게 암살[2]당할 때 수행하던 바예지트 1세는 즉시 동행한 동생인 야쿱[3]를 죽이고 차기 술탄으로 즉위한다.[4]

즉위 후 적극적인 외정에 나서게 되는데, 발칸 방면에서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왈라키아 등을 속국으로 하면서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으며, 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지역)방면에 세 차례나 출병, 오스만과 함께 룸 술탄국에서 독립해나온 투르크계 공국들을 대거 멸망시켰다.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 위해, 보스포러스 해협에 많은 성채를 구축하였다.

이에 헝가리 및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십자군이 결성되나, 1396년 9월 25일 다뉴브 강변에서 격파된다(니코폴리스 전투).[5]

네이버 지식인의 니코폴리스 전투 참고자료

2 티무르와 앙카라 회전

이렇듯 유럽 세력과 아시아 세력 모두에게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가던 바예지트 1세이나, 그에게 무릎을 꿇은 아나톨리아 지방의 군주들은 마침 동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진출하여 오던 티무르를 의지하게 된다.

티무르는 정복한 투르크계 공국들을 모조리 재건하라는 요구를 하고, 격분한 바예지트 1세는 이를 거절하면서 둘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6]

둘은 서로를 모욕하는 내용의 편지를 긴 시간에 걸쳐서 주고받으면서 분노를 쌓아가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티무르 쪽이 더 적극적이었는데, 1400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도시인 세바스테를 공격, 약탈하였고 또한 아나톨리아 지역을 공격하면서 바예지트 1세를 도발한다.

1402년 7월 20일, 둘은 드디어 앙카라에서 격돌하게 되는데[7], 바예지트 1세는 예니체리를 이끌고 분전하나 튀르크인 병사들의 배신이 속출하면서 전선이 붕괴, 결국 패배하게 된다(앙카라 전투). 바예지트 1세는 퇴각중에 낙마하면서, 결국 포로가 된다.

3 패배와 죽음


포로로 잡힐 당시의 상상도. 분명히 바예지트 1세는 40세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도 맘고생을 많이 했는지, 60넘은 노인보다 팍삭 늙어보인다? 사실 고증 오류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이때 두 사람의 나이는 정 반대로 바예지트는 40대 초반의 장년이었고 티무르는 70대를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티무르는 그를 가두어 두고 온갖 학대를 하였다고도[8], 정중하게 대우하였다고도 하나, 바예지트 1세가 이 패배와 구금으로 인한 울화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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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때마다 올리베라 데스피나 황후가 불려나와 나체로 티무르를 시중들었던 모습 . 나체 아니잖아!
새장 속에 갇혀있는 건 바예지트 1세다.

그는 이듬해 8월, 에스키셰히르의 감옥에서 죽었다.[9]

바예지트 1세 사후, 그가 복속시켰던 발칸 반도 주변은 제후들이 이반하기 시작했고, 아나톨리아 지역 또한 티무르에 의해 기존 제후들이 부활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티무르에 의해 네 아들들에게 분할되면서 약 10여 년 간 혼란기를 겪게 되나, 셋째아들인 메흐메트 1세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4 징기스칸 4

징기스칸 4에도 등장한다. 오리지널에도 등장하지만 등장시기가 너무 늦고, 실질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파워업키트 추가 시나리오. 오리지널에서는 가공 장수 얼굴이었지만, 파워업키트에서는 전용 얼굴을 준비하여 대접이 좋아졌다.

능력치는 정치69, 전투88, 지모76의 A급 인재. 다만 시작 시점이 서기 1370년이라 나이는 11세. 국왕은 부왕 무라트 1세로, 무라트 1세 역시 뛰어난 능력치를 지니고 있다. 근데 워낙 티무르가 캐사기라서 혼자 대적하기는 역부족. 부하 장수들과의 합동 작전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워낙 오스만 제국의 입지조건이 나쁜 데다가 특산품 중 말이 없다. 그래서 기병을 편성할 수가 없어서[10][11] 컴퓨터가 잡은 오스만 제국은 티무르와 대적하기도 전에 동로마 제국맘루크 왕조의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망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다만 유저가 이 시나리오에서 플레이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바예지트 1세나 부왕 무라트 1세로 경보병 1부대, 투석기 4부대를 편성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면 난이도가 엄청나게 낮아지는 걸 볼 수 있다.

또한 이론적으로는 혼자 티무르를 잡기 어렵지만, 이 게임 특성상 컴퓨터가 잡은 나라의 국왕은 절대로 야전에 나서지 않고 장기판의 왕처럼 수도에 짱박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 야전에서 티무르와 격돌할 일은 없다. 티무르와 붙을 때쯤 되면 유저의 오스만 제국이 워낙 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 신경질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고도 한다.
  2. 분명치 않다. 전해지는 사료마다 이야기가 다양해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전투 이후 전장을 둘러보다 암살당했다는 이야기, 전투 이후 저녁에 자신을 알현하기를 요청한 포로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전투 당시 바예지트는 좌익을. 야쿱은 우익을 지휘했다.
  4. 이 시점에 대해서는 전투 직후 흥분이 가시기 전이라는 설도 있고,전투 이후 몇 개월이 지난 시점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오스만조에서 형제 살해의 전통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5. 예전에는 헝가리,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십자군과 이에 맞상대한 오스만 제국 및 세르비아 종속군 양측 공히 10만여... 에 달한다고 했지만, 요즘엔 그냥 '양측 다 2만 이하 아냐?' 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6. 여기에 티무르는, 오스만이 아니라 자신이 아나톨리아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룸 술탄국은 몽골의 침입에 굴복하여 신하가 되었었는데, 그 사실을 끌어내어 몽골계인 자신이 아나톨리아를 지배해야 맞다고 주장한 것. 하지만 바예지트의 입장에서는, 웬 듣보잡이 피땀 흘려 얻은 영토를 다 토해내라고 요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인 행세를 하겠다고 나선 꼴이었다.
  7. 이 때의 양측 병력이 얼마인지는 뚜렷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티무르 측이 10~14만, 바예지트 1세 측이 8~10만 사이로 추정.
  8. 아래 그림에도 있듯이 새장 속에 갇혀서 조롱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9. 그 죽음에 대해서는 화병사, 또한 실의 속에서 자살하였다는 설과, 티무르 살해설 등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화병설이 대세다.
  10. 이 시나리오에서 오스만 제국이 편성 가능한 병과는 경보병, 단궁병, 투석기 뿐이다.
  11. 참고로, 실제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고증이 시궁창.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 1세 당시의 오스만 제국군은 기병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온통 기병뿐이라 문제였다. 즉 여러 유목민 부족들이 오스만의 아래로 모여들었고 그것이 초창기의 오스만 제국에게 큰 힘이 되었지만, 점차 보병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예니체리. 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예니체리 항목의 '창설 배경' 문단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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