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본관 용인(龍仁), 자 중경(重卿), 시호 장양(壯襄). 선조 시기 북변에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신립과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임진왜란 때는 200년간 쌓여온 조선군의 모순에 짓눌리고 본인도 능력에 한계를 보여 여러번 패한 장군. 북도 제승방략 체계를 정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즉, 국지전으로 명장이라 평했던 조선의 자만심을 신립과 더불어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원흉.
2 북방의 수비대장 시절
이일은 명종대에 1558년에 무과에 급제해서 1583년에 함경도 경원 부사가 되었다. 이후 공적을 쌓아서 1587년 함경도 북병사로 진급하여 북방 수비 책임을 맡았다. 이 시기엔 본인 일보다 이순신과 얽힌 일화가 잘 알려져 있는데 녹둔도 둔전관으로 근무하던 이순신에게 병력 증원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해 녹둔도 전투에서 피해를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녹둔도에는 수비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어있지 않아 수비가 허술해 지원병력이 오지 않으면 백이면 백 패배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이일은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0일자
그러나 철두철미한 이순신은 적극적으로 자기변호를 했고 조정에서도 이순신[1]이 충분히 잘 싸운 정황을 파악했기에 백의종군으로 끝냈다. 아래는 선조가 이일의 장계를 받고 나서 "녹둔도에서의 전투 결과는 일반적인 패배랑은 조금 다르지 않음?"이라며 두둔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0일자
1588년 1월, 조정에서는 여진족의 녹둔도 침공을 응징하기 위해 이일을 지휘관으로 함경도 군사에 서울 병력까지 포함시킨 2,500명의 부대를 편성,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근거지를 토벌하게 했다. 이른바 시전부락 전투였다. 조선군은 1월 14일에 출진을 개시하여 캄캄한 이경에 행군하고 삼경에 두만강을 건너서 15일 날이 밝을 무렵에 시전부락을 기습, 궁려(窮廬:호인들이 치고 사는 장막. 게르(파오)의 음차.) 2백여 좌를 태워버리고 여진족 380여 급, 말 9필, 소 20수를 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일은 이 전투로 신립과 함께 조선에서 제일가는 명장으로 대우받았고 우화열장으로 참전했던 이순신도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전공으로 신립과 함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3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1, 2군으로 나뉘어 진격해왔다. 부산진 첨사 정발과 다대포 첨사 윤흥신, 동래부사 송상현 등 전사하고 경상우병사 이각, 경상우수사 원균 등은 도주했다.
3.1 상주 전투
왜군은 충청도에 육박하게 되었다. 조정은 제승방략의 체제에 따라 신립과 이일을 급파했다.[2] 그러나 왜군의 진격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개전이 14일, 조정에 왜침이 전해진게 17일 아침, 이일이 방어대책을 논의하고 퇴궐한게 18일 새벽이었는데 왜군은 17일에 밀양부사 박진의 작원잔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18일 밀양을 점령, 이후 청도를 거쳐 대구로 북상하는 정신나간 진격속도를 보여준다. 때문에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대구에 모인 수만의 조선군은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판관 권길만이 남아있었다.[3] 이 건을 들어 이일의 책임을 묻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왜군의 진격 속도와 조선군의 집결 및 지휘체계, 한양과의 거리를 고려하면 이일이 아무리 서둘렀어도 제때에 대구에서 군을 지휘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일은 판관 권길을 문책해 수백 명의 병력을 모았지만 억지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라 급박한 상황에서 기초적인 제식훈련부터 시켜야 했다. 현대전에선 제식은 폼잡기 이상의 의미는 없지만 전근대전에선 제식훈련은 진형을 유지시켜주는 기초중 기초였으며 승리의 기본이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이 '제식이 곧 전투력이다'란 말까지 했을까. 이런 기초중 기초인 제식훈련부터 했어야 할 정도로 남방의 조선군이 얼마나 오합지졸인지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때 개령사는 한 농민이 왜군을 발견하고 이일에게 보고했다. 이일은 유언비어를 유포해 군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그 농민을 참수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상당수 일반인들은 이건을 들어 이일을 비난하는데 이건은 이일이 잘못한 게 아니다. 기존에 모였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진 상황에서 농민 수백명 간신히 끌어모아 기초적인 훈련을 시작한 상황에서 정식 보고절차도 거치지 않고 온 병영에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떠들고 다녔으니 병사들의 동요를 막고 어떻게는 싸워야 하는 이일 입장에선 참수는 좀 가혹하단 소리를 할 순 있어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함부로 병영에서 왜군이 쳐들어온다고 떠들고 다니는 이를 참수한 사례는 충무공 이순신에게도 있다. [4][5]
문제는 이일과 그 농민이 운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일이 왜군이 도착할 가능성을 무시한 것도 아니고 참수당한 농민도 장담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목을 베라고까지 호언장담했다. 즉 유언비어 유포로 바로 참수해도 될 사안임에도 당사자가 장담한 시간까지 기다려줬다. 문제는 고니시군의 도착 시점이 고작 몇 시간 차이나서 참수. 물론 척후병을 보내면 되지만 이제 갓 제식 훈련 시키고 있던 기초적인 제식 훈련을 시키고 있던 이일군의 상태를 고려하면 척후를 보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을 살펴보면 적어도 이일이 척후의 중요성을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상주에서 불과 20리 거리의 장천에 주둔하며 꾸준히 척후를 보내 이일의 군 상태를 살폈고 음력 4월 25일 왜군은 상주로 진격했다.
25일 상주성 안에서 여러곳에 검은 연기가 피어나자 북처에서 병사들을 조련하던 이일은 군관 박정호를 보내 알아오게 했다. 박정호가 다리를 건너는 순간 다리 밑에 숨어있던 왜병이 박정호를 사살한 후 박정호의 목을 베어서 갖고 달아났다. 군사들이 일시에 동요하는 상황에서 상주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일이 병사들을 독려해 활을 쏘아 대항했으나 부족한 훈련과 낮은 사기때문에 왜군에게 제대로 닫지도 못했고 왜군은 여유있게 양쪽에서 조선군을 포위했다. 전황이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일은 도주했고 병사들도 일패도지했다. 종사관 윤섬, 박지[6], 이경류와 판관 권길, 의병장 김준신[7], 박호, 박걸, 김일 등은 꿋꿋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병사들과 함께 전사했다.[8]
3.2 탄금대 전투
도망친 이일은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과[9] 합류한다. 북방에서 여진족 토벌로 명성을 떨친 신립은 장기인 기병대를 편성해 내려갔다. 문경에 도착한 신립은 간신히 도주한 이일을 만났다. 신립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일을 참수하려 했으나 김여물의 설득으로 참수되지는 않았다.
이일은 문경에서 막기는 글렀으니 그냥 한강까지 후퇴해서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했고(경우에 따라서는 이일이 김여물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얘기도 있다. 반대로 이일이 문경 새재 방어설을 주장하고 김여물이 뒷받침했다는 얘기도 있고) 김여물은 문경의 새재 바위에 몸을 숨기고 궁병으로 대응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립은 모두 무시하고 그냥 싸워 이기면 된다며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기병으로 맞섰다. 여기서 "천혜의 요새 문경 새재를 버렸다."라고들 신립을 까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어찌보면 신립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임진왜란 초기 당시 조선군은 신무기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번개같은 진격속도에 사기가 완전히 위축되어 있었고, 더구나 문경새재는 숲이 우거진 산중이었다. 그런데다 병사들을 풀어놓으면 겁을 먹은 병사들이 숲을 틈타서 수없이 탈영할 가능성도 높았고, 거기다 당시 신립이 이끌던 부대는 기마병이었기 때문에 숲이라는 지형에서 기병들이 자유롭게 싸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신립의 걱정이 결코 생각이 없거나 무모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이 탄금대에 도착하자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논이 산재해 있는 탄금대의 땅은 신립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더군다나 탄금대 전투 당일 탄금대에는 비가 내리기까지 했다. 기병을 이끌고 있는 신립에게는 날씨마저 신립을 외면했다. 세조 시기를 기점으로 창기병이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충격력이 떨어지는 궁기병이 주력이 된 데다 실전 경험도 부족한 조선군은 몇 차례 기병 돌격을 감행했으나 장창과 조총을 효율적으로 운용한 왜군에게 참패했다. 신립과 김여물은 자결했고 이일은 간신히 빠져나와[10][11]이었다. 패전 소식을 전했다.
4 이후
이일은 한탄강쪽 방어선에 머무르다 6월 평양의 어가에 합류했다. 그리고 선조가 몽진간 사이에 윤두수, 김명원 등과 함께 대동강 방어전에 참가했다. 비교적 늦게 참가했고 거느린 병력도 적었지만 나름대로 의욕적으로 지휘해 초반 왜군의 대동강 도하 시도를 저지하기도 했으나 원체 전력 차이가 심해 큰 전과는 없었다.
이후 광해군의 분조에 내조한 첫 번째 군대이자 분조 내 최강의 전력으로써 7개월간 광해군을 호위하며 분조의 전력으로써 임란 초기의 평양성 포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람들이 대부분 모르는 부분인데 이일은 여러 번의 패전 후 3,000여 명의 군사를 수습해 이천에 있는 광해군에게 갔다. 만일 이일이 없었다면 우리가 흔히들 아는 광해군의 임란 초 큰 기여는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광해군의 분조가 나뉠 시 그를 호종하는 신하는 합쳐서 15명밖에 안 되었다. 짐꾼까지 다 합쳐도 20명. 제대로 된 호위병력도 없었다.
1593년에 평양성 전투가 발발하자 명군과 함께 참전으나 별다른 활약은 없었다. 평양성 전투 이후에는 주로 함경도 지역에서 종군했다. 전후인 1601년 부하를 죽이고 살인죄를 받아 호송되던 중 정평(定平)에서 병사했다.
5 평가
세묜 부됸늬와 유사한 인물. 물론 부됸늬처럼 시대에 심각하게 뒤처진 장군은 아니지만 자기 분야에선(부됸늬는 기병전반, 이일은 북방에서의 대여진족 전술) 최고 전문가로 높은 명성을 얻었으나 그 특기를 발휘할 수 없는 초유의 국난(독소전쟁, 임진왜란)을 맞아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고 후방으로 밀려났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선 실력있는 무장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전국시대를 거친 노련한 왜군과의 전면전에서는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여러 차례 패했다. 하지만 단순히 이일이 무능하고 겁쟁이라서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전쟁을 대비하긴 했지만 니탕개의 난과 비슷한 조금 큰 왜구의 준동 정도로 생각하고 대비했던 당시 조선은 머릿수는 많지만 기강과 훈련도가 현격하게 떨어지는 군사들을 데리고 있다 완전히 생소한 전략전술을 가지고 온 왜군에게 뜻밖의 기습을 당해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이었다. 대구에서 모인 병력도 모두 흩어져 버린 상황에서 농민들을 끌어모아 고육계까지 써가며 어떻게든 싸우려 했다.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었고 패전의 책임은 져야겠지만 애시당초 제대로 싸운 적도 없고 자국 민간인 학살까지 저지른 원균같은 인간들하고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이다.
그가 정리한 북도 제승방략만 봐도 이일을 무능한 사람으로 보기는 힘들어진다. 한성에서 장수가 도착해서 지방군을 지휘하는 약점이 있던 남방 제승방략과는 달리 북방 제승방략은 현지 지휘관이 지휘했고 오랜 전훈에 의거 여진족이 침공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서 행동방침을 매우 상세하게 기재하였다. 각 상황마다 동원되는 병력, 전술, 전략, 사례와, 전시의 물자보급 등의 상황을 일일히 정리한 제승방략을 보면 조선군에 대한 평가마저 달라질 정도. 이러한 제승방략은 물론 이일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북방에서 최후로 정비한 인물이 이일이라는 점에서 이일의 공을 폄하하기는 힘들다.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기본사료중 하나가 류성룡의 징비록이라는 것이다. 류성룡의 기록은 기본 사료로 쓰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지만 그는 제승방략 체제 대신 진관 체제로 회귀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제승방략을 다시 정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 이일이었기 때문에 류성룡의 이일 비판은 제승방략에 대한 비판도 섞여있다고 볼 수 있다. 류성룡이 주장한 진관제는 소규모 왜구나 여진족의 준동에나 적합한 체제였고 일정규모 이상의 침공에서는 제승방략이 더 적합했다. 문제는 한성에서 온 장수가 지방의 병력을 지휘해야 한다는 맹점인데 이건 남방 제승방략에 미스테리하게 나타날 뿐 이일이 증보한 북방 제승방략에서는 그런 현상이 없다. 물론 임진왜란 직전 군사정비에서 이일의 의견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게 보이나 정작 이일이 증보한 제승방략에서 그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남방 제승방략의 특수성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그리고 징비록은 정응태 무고사건으로 물러난 뒤 왜란에서 동인의 책임을 덜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갖고 쓰여졌기 때문에 개전 초기 조선군의 분전을 의도적으로 폄하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 이전에 나온 여러 임진왜란 소설에서도 이일은 이렇게 나온게 허다했다. 이일은 녹둔도에 병력을 증원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고 후일 책임을 전가하긴 했어도 녹둔도 전투에 참전했다가 적전도주한 적은 없다. 이일이 한성에서 어느 정도 병력을 모아 내려가려 했을 때 애를 먹은 것은 이순신을 모함해 아무도 함께 하려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징집 대상이 부사관~장교급이었던 데다, 200여년 가까운 평화 속에서 이들 또한 제대로 전투경험이 없어 원하는 정도의 질적 수준을 갖춘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고 이일이 원균처럼 무고한 조선 양민을 잡아죽인 다음 왜군으로 위장해 바쳤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6 대중매체에서
위에 나오듯이 80년대 임진왜란을 다룬 소설이나 만화, 드라마까지 싸그리 무능하고 비열하게 달아나는 졸장으로 묘사되었다. 故 신동우 화백이 그린 금성출판사판 만화 한국사에서도 조총도 모르고 무턱대고 진격했다가 참패하곤 신립에게 불을 뿜는 막대기를 왜군이 가지고 있다고 항변하다가 "조총도 모르다니 그러고도 장군이라는 할 수 있는 거요! 꼴도 보기 싫소! 썩 나가시오!" 라고 비난을 당하는 무능한 이미지로 그려냈다. 박홍과 더불어 무능하기만 한 게 아니고 제법 공이 있었고 싸우려고 했음에도 일방적으로 졸장으로 묘사된 장수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편에서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순변사가 되었지만 한양에서부터 데리고 갈 300명의 병사도 확보못하는 안습한 모습이 나오며 상주 전투에서 패한 후에 병졸로 변장하고 달아나서 뒤이어 도착한 신립에게 갈굼당하는 무능한 인물로만 묘사된다.
김성한의 7년전쟁에서는 임란이 발발하자 남쪽으로 향하며 마지막 희망을 걸지만, 정작 대구의 상황을 전해듣고 굉장히 허탈해한다. 결국 패전후 신립과 만나게 되고 후퇴해 후방에서 적을 막자고 주장한다.
징비록에서는 개그 캐릭터. 상주전투에선 살기 위해 기어서 도망갔고... 탄금대 전투에선 도망치다가 귀순하려던 사야가를 보고 다시 방향을 돌려 도망친다. 사야가는 이를 보고 당황해서 희대의 명대사 조또마떼(...)를 외쳤다. 이후 분조에 들어가 광해군을 호송하나 류성룡은 물론 이천리에게마저 디스 당하는 처지... 모처럼 왕성탄에서 우키다 히데이에를 기습해 대승을 거두나... 정작 히데이에를 놓쳐 또 까이고...부산원(평양성인근) 기습에선 대마도주 종의지와 1:1대결을 벌이다가 둘 다 칼을 놓쳐 격투기(...)벌이는데장르가 순식간에 사극에서 대전액션게임이 되었다...패배해 놓쳤다. 징비록 갤러리에서는 컬트적인 인기를 끌며 21, 런일, 투애니원, 생존왕 이일 그릴스, 조또마떼갑으로 불린다. 삼국전투기의 조홍 같은 캐릭터랄까.
- ↑ 더해서 이경록. 이경록은 이후 임진왜란 때 제주목사로서 임무를 다한다.
- ↑ 신립이나 이일 말고도 다수의 경장들이 한양에서 남쪽으로 급파되었다. 다만 기록이 부족해 이들의 행적은 불분명한 부분이 꽤 많다.
- ↑ 이렇게 모이는 와중에 용궁현감 우복룡은 도중에 만난 하양 군사 수백명을 반란군으로 몰아 죽이고 공으로 삼는 미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유도 기가막힌데 자기 보는 앞에서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자 너희가 상관을 무시하고 어딜 급하게 가느냐는 것. 당연히 하양 병사들은 어이가 없어서 대구로 서둘러 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으나 우복룡은 그들을 반란군으로 몰아 포위해 섬멸해버렸다. 그러니까 인사 안했다고 반란군이라고 한 것이다.
- ↑ 이런 사례로 진짜 비판받아야 하는 장수는 신립이다. 신립은 탄금대전투 직전 왜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고 정식지휘계통을 거쳐서 보고하는 군관을 미친 소리라면서 확인도 해보지 않고 즉결처형하였다.
- ↑ 신립은 오히려 적이 왔다는 척후 보고를 받고 직접 척후하러 나섰지만 적을 발견하지 못해서 척후를 처형한거다. 확인도 해보지 않고 척후를 처형한건 아니다.
- ↑ 무사히 탈출하긴 했으나 살아서 임금을 만나기 부끄럽다면서 자결했다.
- ↑ 왜군의 후발 부대에 의해 고향인 판곡리 사람들과 김준신의 일가친척들 모두 몰살당했다. 다만 김준신의 어린 아들만이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 ↑ 이때 전사했다고 알려진 인물 중 백대붕이라는 인물이 있다. 전함사의 노비 출신이라는 말이 있는 사람인데.(그렌데 노비에게 성이 있을리가...) 촌음 유희경과 함께 당대를 주름잡던 시인이었다. 촌음 유희경과 자주 엮여서 실제로 이매창과 유희경의 대면 때 유희경이 '댁은 유씨입니까, 백씨입니까?' 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
- ↑ 순변사보다 1계급이 높다. '도(都)'는 해당 계급을 총지휘한다는 의미.
- ↑ 생존왕 이일의 시작점
- ↑ 전투 후 생존자가 오직 이일 단 한 명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