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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의 인물
파일:Attachment/송상현/1.jpg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송상현광장에 있는 그의 동상.
임란시기 조선군 기백의 상징.
1.1 개요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 천곡(泉谷)·한천(寒泉). 시호 충렬(忠烈). 임진왜란 초반의 충신으로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방어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명장이였다. 그의 아버지 송흥복이 사헌부 감찰이였다. 출생지는 1551년 전라도 정읍에서 태어나 1576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2 생애 초반
1551년 전라북도 정읍군,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진사에, 157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1.3 외교관이 된 이후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송상현은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입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했다. 일단 동래부사가 되자마자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서 외부에서 동래성을 관측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마름쇠나 능철 등 각종 기병 및 보병용 지뢰를 준비해 두었다.
1.4 임진왜란
고니시 유키나가가 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자 송상현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준비에 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
즉 지나갈테니 길좀 열어달라는 소리.
하지만 송상현은 왜군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냥 순순히 간다는 보장도 없고 자신이 길을 비켜줬을 경우 가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고 다닐 것이 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송상현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
즉 길을 빌려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소리.
이에 양군은 전투가 벌어졌다(동래성 전투). 초반에는 송상현이 준비를 잘했기 때문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주하고 후퇴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바로 대응책을 강구해와서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송상현은 중과부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송상현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자신의 아버지인 사헌부 감찰 송흥복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조복을 갈아입고 북향사배[2]를 올렸다. 이후 그 복장으로 적을 막아내다가 전사했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마지막 순간에 송상현과 교분이 있었다던 마츠우라 시게노부가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거부하고 장렬히 전사하는 것으로 나왔다.
결국 동래성은 함락되었는데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에게 크게 감복해서 적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가족이 죽은 것과 똑같은 수준의 장례식을 치루어 주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송상현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3] 송상현은 사후 이조판서·찬성이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송상현에겐 함흥 기생 출신이라 하는 첩 김섬과 처 이씨가 있었는데 김섬은 송상현 전사 이후 자결했고 이씨는 송상현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되었다. 이씨는 일본군에게 잡힌 와중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도 통곡을 멈추지 않아 이를 가엾게 여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돌려보내주었고 이후 수절했다 한다.
묘와 신도비는 청주IC 부근에 위치해있다. 그의 후손들이 청주에 모여 살고 있다. 여담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를 피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옥산~남이JC부근이 곡선으로 휘어지게 되었다.
1.5 평가
엘리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충직함을 배워온 사람답게 항상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해왔다. 거기에 적장의 회유를 거부하고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마다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임금을 생각하는 충정을 지닌 진정한 애국지사였다. 하지만 그가 담당하던 동래성은 왜적을 막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작았으며 병력은 민간인을 포함해도 수천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중과부적 이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패전하고 전사했지만 그 충정은 이순신 못지 않았다.
본래 문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나라를 지켰으며 군민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비이다. 무관이면서도 겁쟁이처럼 내뺀 장군이 한둘이 아님을 명심하자. 임진왜란 때 수많은 사대부 지배층이 추태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대로된 양반들이 있었기에 백성들이 지배층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지 않았다.
1.5.1 부산에서 송상현
부산진의 정발, 다대포의 윤흥신과 더불어 부산을 지킨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부산시 양정동에는 송상현의 동상이 있으며 동상이 있는 삼거리를 송공삼거리라고 불리는데 '송공'이 바로 송상현.차가 많이 밀려서 더 유명하다(..) 동상이 설치되고 부터 그렇게 불리웠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배우는 지역을 빛낸 위인들 중에 동래구 출신이었던 장영실과 같이 꼭 꼽히는 인물이다. 2014년 6월에 송공삼거리 일대에 송상현의 이름을 딴 송상현 광장이 개장한다.
1.5.1.1 송상현 광장
부산광역시 부전역 인근 부산진구 부전동 삼전교차로 ~ 양정동 송공삼거리 일대에 조성한, 충신 송상현의 이름을 딴 광장이다.
송상현광장 항목 참조.
1.5.1.2 송공단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위치한, 송상현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순절한 여러 선열을 모신 제단. 부산광역시기념물 제11호.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 위치한 수안역 인근에 있다.
1.5.1.3 충렬사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위치한 사당. 지금은 정발, 윤흥신 등 임진왜란 전사자들의 합동 사당처럼 되어 있지만 본래 그 시작은 송상현의 충혼을 기리는 송공사(宋公祠)였다. 안락교차로에 바로 맞닿아 있는 탁월한 입지 덕에, 부산 도시철도 4호선에 동명의 역이 있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2 대한민국의 법조인
宋相現
1941년 11월 21일 출생. 일제 시절과 해방정국에서 정치인,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고하(古下) 송진우의 손자다.[4]
1959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6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과 함께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후 1970년 미국 코넬대학교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S.J.D.) 학위를 받았고, 1972년부터 35년간 모교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취임 모습)
전쟁, (反)인도주의 범죄에 관한 심판을 담당하는 상설 국제 사법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가 창설된 이듬해인 2003년 85개 회원국 중 65개국의 지지를 받아 초대 재판관의 일원으로 취임했고, 2009년에는 2대 재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는 한국인으로 국제사법기구의 수장에 오른 첫 사례가 되었다. 이후 2012년 연임을 거쳐 2015년 3월에 소장직을 퇴임했다.
본직이었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직은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재직 시절인 2007년에 정년 퇴임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남아있다. 국내외에서 다수의 훈포장과 명예직을 수여받았다.
외모상으로 코미디언 이창훈과 닮았다는 얘기가 한때 떠돌았다. 그의 아내는 고려대학교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김상협의 장녀 김명신(金明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