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승방략

制勝方略

1 조선시대 군사이론서

2권 1책 활자본. 제승방략은 원래 2권 1책의 목판본으로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가 처음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것을 1588년(선조 21)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일(李鎰)[1]이 증보(增補)하였고, 현재 전해지는 책은 1670년(현종 11) 함경북도병마평사 이선(李選)이 중간한 것이다. 최초 저술자가 김종서로 알려진 것은 이선의 발문(跋文)에서 비롯되었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김종서가 아니라 이일이 처음 저술했다는 견해도 있다.

내용은 함경도의 8진인 경흥진(慶興鎭), 경원진(慶源鎭), 종성진(鐘城鎭), 온성진(穩城鎭), 회령진(會寧鎭), 부령진(富寧鎭), 길주진(吉州鎭), 경성진(鏡城鎭)의 산천, 부락, 보루의 위치와 공수(攻守)의 요해(要害)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다음에는 8진의 경비대가 지켜야 할 군무 29조, 금령(禁令) 27조를 적어 놓고, 온성, 종성, 회령, 경원, 길주, 부령 등 6진에 있는 군관들의 관명을 써 놓았다.

권1의 머리에서 권2의 중반에 걸쳐 열진방어(列鎭防禦)가 실려 있다. 경흥의 서수라보(西水羅堡)부터 시작하여 부령, 종성, 명천, 길주 소속의 진보에 이르는 합계 44진보에 대해 차례로 설명을 하고 각 진보의 형세, 위치, 성곽, 산수, 봉수 및 적로(賊路)와의 거리와 추격, 요격의 요지 등과 고사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히 경흥, 경원 등에는 창상곡(倉上穀) 및 군량곡의 남아 있는 양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다음 제2권의 후반부에는 군무(軍務) 29조, 금령(禁令) 27조, 육진대분군(六鎭大分軍), 삼읍분군(三邑分軍),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 비국회관(備局回關), 방량식(放量式)이 수록되어 있는데, 군무 29조는 각 진, 보의 군사들이 지켜야할 수칙, 적병의 침구(侵寇)소식을 들으면 각 진, 보의 군사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소식을 보고할 것인가와 군비(軍備), 천기(天氣) 등에 대한 내용이다. 금령 27조는 엄격한 법령으로 침구시(侵寇時)에 기간 내에 달려가 구원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다스리며 각기 그의 소속장(所屬將)을 잃었을 때에는 그 아래 장수를 참(斬)하며 이름을 불러도 응하지 않는다거나, 기한 내에 이르지 않는다거나 군호(軍號)가 불명하거나, 함부로 떠들고 웃고 상관을 무시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거나, 요망한 말을 하여 군심(軍心)을 어지럽히거나, 남의 재물, 남의 수급(首級)을 도둑질 하거나, 꾀병하여 전선에 달려가지 않거나, 부상하여 죽은 체 하였다가 도망하는 자 등은 모두 참하며, 호물(胡物)을 탐하거나, 군중(軍中)에서 큰소리로 부르는 자 등은 벌한다는 벌칙 조항 등이다.

다음으로 육진대분군은 6진의 관직과 부서 등의 명칭을 수록한 것이고, 방량식은 군사와 군마에 대하여 군량 지급량을 명시하였는데, 예를 들면 인마(人馬) 1만의 하루 소요량이 쌀 533석 5두와 콩 333석 5두라고 되어 있다. 책 끝에는 1670년(현종 11)에 이선이 쓴 발문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국경방어태세 및 군사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규장각에 원본 2부가 보관되어 있고, 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2호로 영인했다.

책 자체는 실질강건에 입각해서 서술된 매우 훌륭한 저서지만, 아래에 언급된 방어체제가 동일한 한자를 쓰는 관계로 덩달아 평가가 떨어지는 안습한 일을 겪고 있다.

2 조선의 방어체제

위의 책과 동일한 한자를 쓰지만, 관련성은 군사에 관한 것이라는 것 밖에 없는 조선의 방어체제.

간단하게 설명하면 평시에는 지휘관이 없는 상태. 적의 대규모 침공이 있으면 각 지방에 있는 군대가 미리 정한 지점으로 모인 다음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가 지휘관이 되어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 전장으로 나가는 방어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이 체제는 임진왜란때 단점이란 단점은 모두 보이면서[2] 사실상 관군의 전투력이 제로에 가깝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데, 자세한 사정은 아래와 같다.

2.1 문제점

평시에는 군대가 없다가 전쟁이 나면 백성을 모아서 대기하고 그 사이에 중앙 정부에서 지휘관을 파견해 군대를 결성한다는 병맛 제도. 이게 왜 쓰레기냐 하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지휘관이 도착할 때까지 그 시간동안의 공백. 이게 제일 큰데, 이 공백 동안 병력은 그냥 동네 바보가 되고 만다. 실제로 상주 전투에서 이일은 대구에 모아놓은 병력이 이일을 기다리다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그냥 해산해버리는 바람에 병력 없이 상주 전투를 치뤄야만 했다.
  • 병력과 지휘관이 단 한번도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다. 때문에 병력들이 지휘관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워지는 치명적인 소통 불능이 극에 달한다. 군사 훈련이란 왜 하는가? 바로 지휘관과 병력들의 손발을 맞추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 지휘관이 전투지역의 지리를 모른다. 중앙에만 있다가 파견되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 없는 군대를 전쟁이 났다고 징발하면 그 응소율은 얼마나 될 지 생각해 보자. 당시에는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산 속 깊이 숨어버리면 그만이라 응소하기 싫으면 안해버리면 그만이었다.

2.2 조선의 병역제도 및 군사조직

일단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의 병역제도 및 군사조직은 아래와 같다.

  • 병역 제도
    • 양인개병제: 양인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닌다. 16세∼60세까지의 양인(良人)인 정남(丁男)이 병역의무를 진다. 양인은 천민을 제외한 나머지 신분(양반.[3], 중인, 평민)을 모두 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평민 계급에서만 군역을 수행하게 되었다
    • 정병과 보인: 정남은 정병과 보인으로 나뉘어 군역을 수행했다. 정병(正兵)은 현역 군인으로 일정기간동안 군대에 복무하며, 보인(保人)은 정병이 복무하는 동안 정병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했다. 이를 테면 사회복무요원이 자기가 따로 회사에 입사해서 돈을 벌어다가 현역병에게 월급을 주는 형식이다.
    • 병농일치제: 따로 직업군을 두는 게 아니라, 자기 땅 가진 농민들이 평소엔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에 동원되어 전쟁을 수행한다.
  • 군사 조직
    • 중앙군: 5위로 편성, 과거 등을 통해 선발된 직업군인이 주(主)가 됐다. 현대로 따지면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등이다. 당연히 고급 관리의 자제(子弟)로 구성됐다.
    • 지방군: 각 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파견했고, 읍에는 읍성(邑城)을 쌓아 주로 외적의 방비에 대비했다.
    • 지방군은 교대로 1년에 두 달씩 서울이나 지방에서 근무했는데 이를 번상(番上)또는 수(戍)자리 선다고 했다.
    • 잡색군: 일종의 예비군.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 유사시에 병력으로 활용.
  • 세조 이후에 진관 체제를 실시

2.3 진관 체제

진관 체제는 각 지방에 상당히 강력한 주둔군을 두고, 해당 주둔군은 해당 진이나 관을 방어하며, 적의 대규모 침공시에는 진이나 관의 주둔군이 적을 막는 사이에 중앙의 중앙군이 응원군으로 달려오는 체제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진관체제가 돌아가는 구조는 아래와 같다. 전국 행정단위의 하나인 읍을 군사 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해 그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수령이 군사 지휘권을 겸하게 하는 것.

쉽게 예를 들면 현재의 수원, 성남, 화성, 오산, 용인, 의왕, 안산처럼 각 행정구역이 인접해 있는 경우 인구와 도시 중요성 및 규모가 가장 큰 수원이 주진(主鎭)이 된다. 두 번째 큰 성남, 용인, 안산 등이 거진(巨鎭)이 되고, 의왕, 화성, 오산 등은 제진(諸鎭)이 된다.
이에따라 경기도지사가 평소 행정기능을 담당하다가, 전쟁 등이 일어나면 그대로 군사지휘권을 갖게 된다. 당연히 거진과 제진은 주진의 명령에 복종해야 된다. 그러나 거진부터는 독자적 군사작전권이 있어 일단 유사시, 독립적인 군사행동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말해 진관체제는 자연 향토단위의 소규모 방어위주의 전략체제다. 예비군

진관체제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 각 행정구역이 자체적으로 군사기능을 담당하므로 수령의 강력한 통제 아래 밝은 지리를 이점으로 지형적 특성에 맞는 작전을 구사할 수 있다.
  • 한 진관이 패퇴하면 다른 진관이 방위의 공백을 메워서 싸우게 하는 등 연계적인 체제로 형성돼 방어에 유리하다.
  • 병농일치와 양인개병원칙이 지켜질 경우, 대규모의 군대를 가장 저렴하게 유지가능하다. 실제 각 지방에 주둔한 주둔군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장비를 마련하며, 농한기에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진관체제의 단점은 다음과 같다.

  • 소규모 지역향촌방위 개념이어서 대규모 침공에는 불리하다. 즉 어느 정도 이상의 적의 침공에 직면하면 방위선이 한큐에 뚫리면서 그 뒤는 방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4]
  • 병력의 대부분이 지방방위에 매달리게 되므로 강력한 중앙군 육성이 힘들다.
  • 병농일치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제도라, 해당 제도가 붕괴되면 실시가 불가능하다.

2.4 제승방략

문제는 16세기 전후의 대규모 공신층 양산(훈구파)으로 인해 조선의 관료층이 대규모 면세 토지집적현상이 일어났다는 것. 면세 토지가 증가하니 자연히 세금은 자영농들이 가진 비면세 토지에 집중되고, 연산군 이래로 조정과 왕실의 방만한 재정 운용과 과도한 재정 확대는 쉽게 세금을 늘릴 수 있는 공납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는 15세기까지 조선이 견지하던 토지 중심의 조세 정책을 인구수 중심의 조세 제도로 바꾸는 결과가 되었다.(토지 규모, 즉 자산이 아닌 그냥 사람 머릿수에 세금을 매기면 당연히 지주층에게 유리하다.) 그 결과 자영농들이 양반관료에게 스스로의 토지를 바치고 소작농이 되고(지주전호제), 아예 숨어버리는 농민(도호)도 많았다.

지주의 보호를 받는 전호는 세금 문제 뿐만 아니라 병역에서도 상당히 자유로웠고, 아예 숨어버리면 당연히 병역과는 무관해진다. 결국 이는 군사의 군역부담을 지원해주던 보인(保人)의 경제력이 감소되고, 군역 자체를 지는 자들의 질도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진관체제는 이러한 질적 약화를 견뎌내지 못한다.

당초 진관체제는 병농일치, 양인개병을 원칙으로 성립된 것이며, 비슷비슷한 대규모 자영농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농민층의 분화는 진관체제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이는 가장 고된 병역이였던 수군(水軍)에서 더욱 심했다.

또한 16세기 중엽을 전후로 북방 여진족과 왜구의 위협이 증대된다. 왜구는 삼포왜란 당시 40척, 사량진 왜변 당시 20척, 을묘왜변 당시엔 70척에 달하는 대단위 함대를 구축하여 경상도, 전라도 일대를 습격했는데 이는 각각의 진포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부대였다. 거기다 여진족의 경우 니탕개의 난 당시 이들은 1만여에 달하는 대규모 전사집단을 편성하여 경원성을 함락시키는 등 규모가 갈수록 대규모화 하였다. 이는 조선으로 하여금 대규모 침략에 대비한 새로운 방위체제를 구축해야 할 필요를 안겨주었다.

결국 조선 초의 진관 체제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전시에 여러 지역의 군을 합처 대규모 부대를 편성하는 방위체제(분군법(分軍法))로 변화하게 된다.

제승방략체제의 전제조건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유사시 인원을 실제 동원할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소집하고 최소한의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서류에만 군대가 있고, 일이 터지면 아무도 모이지 않는 막장현상이 발생한다. 이 제도를 이해하기 쉽게 한마디로 말하면 현재의 대한민국예비군이나 민방위를 생각하면 된다.
  • 유사시 모이는 인원은 아무런 준비가 안된 상태이므로 이들에게 지급할 무기,장비,식량등을 미리 준비해서 창고에 쌓아놓고 주기적으로 정비하고 관리하며, 긴급시 신속하게 지급할 준비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맨주먹만 가지고 출격해야 하는데, 전투력은 둘째치고 과연 적군과 마주칠때까지 남을 사람이 있을 지 의문이 들 것이다.
  • 교통망 정비가 필요하다. 다만 이는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는데, 교통망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다면 군의 결집과 이동에는 유리함이 있지만 적군 또한 빠른 속도로 기동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적은 잘 이용할 수 없으면서 아군측은 원활히 활용할 수 있는 교통체계이다.
  • 통신망 정비가 필요하다. 진관체제와는 달리 변방지역은 물론이거니와 각 지방의 방어력은 산적을 막기에도 무리일 정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적의 침공시마다 빠르게 중앙에 연락이 가지 않으면 막상 출동하고 보니 적은 이미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킨 후 철수까지 완료한 상태거나 강력한 거점을 확보한 다음 오히려 진압군을 영격할 준비까지 완료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 제승방략 체제라고 해서 각지의 방어 거점들이 무방비로 버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각지역의 군대가 결집하여 대처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각지의 동원 및 군 이동이 느리다면 이동중에 적에게 포착되 각개격파될 수 있고, 군이 모이기 전에 적이 깊숙히 침투해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 국토가 좁아야 한다. 아무리 나머지를 다 갖춰도 러시아 급으로 국토가 넓으면 지휘관이 파견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인해 파견에 한계가 있다.

2.5 임진왜란과 제승방략의 붕괴

제승방략으로 완전히 개편된 것은 선조 중엽이였고, 이 체제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외적의 침입은 임진왜란이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결국 이 체제는 무너진다.

다만, 꽤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데, 임란 초기에 병력이 제때 모이지 않았다거나 장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각지의 병사들은 제때 결집했고, 각종 군사장비류 또한 수량 및 관리가 일단 기본적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조선의 우수한 행정체계의 힘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더 안습한것으로서 나름 준비가 되고 잘 돌아간 상황에서조차 제승방략은 아무것도 못하고 붕괴된 뻘짓이였다는것만 제대로 증명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병력이나 물자가 부족했다면 그 핑계라도 대겠는데...

하지만 병사들의 훈련도는 그에 따르지 못했다. 거기다 최일선이였던 경상도의 경우 기껏 병사는 다 집결지에 모였는데 중앙에서 지휘관이 내려오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도착하면서 전투 한번 없이 흩어져 버렸다. 이후에도 낮은 훈련도는 내란으로 단련된 일본군과의 맞대결에서 끝까지 문제가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측은 몇차례에 걸처 만단위 이상의 병력을 집결해 일본군과 야전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이 겹치면서 붕괴되고, 왜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서쪽으로는 평양까지, 동쪽으로는 함경도를 장악하고 만주까지도 일부 부대가 침입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이 겹친 대표적인 사례는 대구에서의 경상도 군 해산, 이일이 패한 상주 전투, 신립이 패한 충주 탄금대 전투라 하겠다.

일본군 침입 당시 경상순찰사 김수는 대구에 경상도 병력을 모으고 이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일이 내려오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대구에 당도했으며, 결국 대구에 모였던 경상도군 주력부대는 전투 한번 못해보고 자체 해산되었다. 정작 이일이 상주에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코앞에 있었고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경상도군은 없었다. 그래도 이일이 왔다는 소식에 다시 병력이 결집하여 6천여명의 군을 편성했지만 결국 패배. 교전 직전 이일이 하던 것은 습진, 즉 진짜기 훈련인데, 기관총과 현대식 화포가 등장하여 진형 비슷한것만 짜면 총탄 수백발과 고폭탄이 날아와 진형 자체를 고깃조각으로 찢어버리기 전까지는 진형 자체가 해당 병력의 전투력 자체였으므로 그조차 제대로 짜지 못한다는건 이는 이 부대가 기본적인 전투력 자체도 제대로 확보가 되지 않았다는걸 뜻한다. 그러니 이들이 말 그대로 훈련이 전혀 되지 않은 민간인 수준임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상주전투 이일이 육천명 편성했다는거 정정 좀 해주세요 저거 근거를 찿아봐도 안 보여요

현령이라든지 현감 등의 지역 지휘관들의 자질에도 큰 문제가 보인다. 전란 초 부산진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은 열심히 싸웠으나 용궁현감 우복룡은 하양 군사 수백 명을 단순히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위해 죽였다. 징비록에 상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하양 군사들은 소집 명령에 따라 집결지인 대구로 서둘러 가는 중이었다. 우복룡이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으니 너희가 역적 모의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꾸짖자 하양 병사들은 공문을 꺼내어 변명하려 했으나 우복룡은 일방적으로 반란군으로 몰아 죽였고 상부에도 반란을 일으키려던 하양 군사들을 토벌했다고 보고했다. 경상감사 김수는 이를 공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우복룡은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가 되었다. 졸지에 유가족이 된 하양의 과부들과 고아들이 사신이 올 때마다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우복룡이 이미 명성이 있어서 이들을 변호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 일로 인해 광해군 때 파직된다.

신립이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돼 이일의 뒤를 따라 남하 준비를 할때에도 마찬가지 문제는 발생한다. 우선 군관을 구하기 힘들었다. 신립이 지휘해야 하는 부대의 장부상 규모는 10만여에 달하는데, 이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군관이 필요하지만 그걸 구하기 힘들었던 것. 또한 자신이 지역 군과 합류하기 전에 일본군과 조우할 것을 대비해야만 했다. 신립이 임지로 향하면서 인솔한 군관은 88명 뿐으로 하급 지휘관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이일 본인도 지원 병력으로 함께 남하할 정예병을 뽑고자 하였으나 징병 문서에는 훈련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과 유생들 뿐이어서 3일을 지체하다가 결국 뽑지 못하고 먼저 남하하며 별장 유옥을 남겨 병력을 뽑아 뒤따르게 하였다. 이일이 3일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대구에 모인 경상도 병력이 와해되기 전에 병력을 인수하여 대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립은 경군을 자신과 동행시켜 줄 것을 요구했고, 이일보다 뒷빽이 든든했던데다 당시 조선의 제일가는 장군이였던 신립의 요청이니만큼 결국 조정에서는 법도까지 어겨가면서, 선조가 직접 나서 경군을 차출한다. 체찰사로써 남하할 것을 준비하던 류성룡이 지휘하기 위해 편성한 장사 8천 명을 신립에게로 돌린 것.(류성룡은 이에 대해 징비록에 신립이 모으려 하니까 안모여서 내가 나서서 모았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신립은 충주에서 일본군과 조우한다. 이때 신립은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군대의 극히 일부분인 충청도군(연려실기술에 따르면 8천)과만 합류했던 상태였고, 북상하던 전라도군과는 미처 합류하지 못했었다. 거기다 훈련도가 형편없는 군대의 상태는 조령에서 방어선을 형성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했으며 조령으로만 적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3개의 진격로로 나뉘어서 한양으로 돌격하는 상황이라 빠르게 하나씩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쨌든 높은 기병의 비율을 믿고(일단 경군들에게는 한성을 출발할때 전마가 1필씩 지급되었다.) 야전을 걸었으나 지리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실책까지 겹처 결국 격파당하고 만다.

이런 혹독한 사태를 겪은 후에야 유성룡(柳成龍)에 의해서 진관체제의 재정비론이 거론되었고, 이후 지방에 속오군(束伍軍) 등이 설치됐다.

하지만 속오군 또한 임시방편이였던지라 결국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문제점을 드러냈으며[5], 양반관료층의 토지겸병 문제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체제는 한계를 보일 수밖엔 없었다.(로마제국이 마리우스의 개혁을 수행한 것이나 당나라가 부병제에서 절도사 체제로 넘어간 것 등을 보면 이는 역사적으로 당연한 이치에 가깝다...) 수도에 오군영을 두고 막대한 전비를 투입해 이를 유지하는 체제(훈련도감 8천명을 먹이는 데 드는 비용이 호조 경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기도 있었다.)로 갈 수밖엔 없었다.
  1. 임진왜란 초기 상주 전투탄금대 전투에 참여했던 경상병사 이일이 맞다.
  2. 특히 이 단점들 중 백미는 한성에서 지휘관이 내려갈 때까지 생기는 공백. 그 시간동안 할 수 있는 게 없다.
  3. 본래 제도상으로는 양반계급에도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양반은 본래 전현직 관료들을 말하는 것이었고, 관직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병역의무가 면제되었지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면 다시 병역의무를 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후 양반이 관직경력여부와 관계없이 세습계급화되며 이러한 원칙은 붕괴되었으며, 사실상 양반은 관직과 무관하게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이러한 모순은 결국 세월이 한참 지나 흥선 대원군 때나 가서야 시정된다.
  4. 대규모 적의 침공시 거진의 지휘자가 인근 진들의 지휘를 총괄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 보완은 가능하다.
  5. 대표적인 예가 병자호란 당시 쌍령 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