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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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주사파지?
네, 제 성은 '주', 이름은 '사파'입니다. 형님 성함은 '주사하'구요

1 소개

바콩
1941년 2월 27일 생. 세례명루카. 가톨릭 신부로 전 서강대학교 총장이자 전 서강대학교 이사장. 90년대에는 신부가 아닌 다른 의미로 유명해진 인물. 별명은 빠콩. 자칭 하느님의 안기부장. 초창기의 딴지일보가 이르길 데이비드 카퍼필드 같은 마술사. 여기서는 바콩이라는 폄칭을 쓴다.

한승조고려대 교수, 송복 전 연세대 교수와 더불어 극우 논객 3인방으로 손꼽힌다.

2 정치적 발언들

나름대로 자신을 보수반공주의의 화신으로 생각하는지 90년대 들어 반공 운동가로서 활동했다. 그런데 그 활동이라는 것이 보수 입장에서 봐도 골때리는 게 많아서 문제. '북한 간첩이 자기를 암살하려고 왔는데 자신의 설교에 감화되어 눈물을 흘리며 자수했다' 같은 말을 하니 무조건 변호해주기도 애매한 것이다.

정작 박홍한테 찾아갔다는 사람이 간첩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북한에 가서 백두산 권총 몇번 쐈다는 말이 근거의 전부라고.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해 독일 교포들 사이에서 오히려 안기부 장학생[1]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김구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비화를 베낀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백범일지에 보면 '나를 죽이러 왔던 일제 밀정이 차마 못 죽이고 오히려 권총을 바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박홍이 이걸 자신에 빗대서 창작했다는 주장인데 사실은 저 너머에. 사실 <백범일지>도 이광수가 윤문한 신뢰성이 상당히 낮은 책이다(…).[2]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유학 당시,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면서, 돌아가면 신변의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1991년에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을 것이다."라면서 당시 재야와 운동권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사실 박홍 신부는 이 발언 전까지는 당시 운동권에 대한 몇 안 되는 이해자 중 한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충격이 상당했다. 1971년 전태일이 분신으로 사망하자 추모미사를 집전하다가 중앙정보부끌려간 경력도 있다.

당시 운동권에서조차 자신들의 편(주님의 벗)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발언이 더더욱 화제를 일으킨 것. 당시 이 발언을 했을 때만 해도, 운동권 측에서 "저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닌데…", "틀림없이 정권에서 모종의 협박이 있었을 거야…" 등등의 반응이 있었다. 그 이후…

1994년 7월 18일에는 "'운동권의 배후에는 주사파가 있고 그 배후에는 북한이 있다.'"라고 처음으로 주사파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서총련 측이 박홍 총장을 납치하겠다는 첩보가 있었는데, 급기야 경찰 측은 해당 첩보를 입수하고 박홍의 신변보호를 위해 전경을 서강대에 투입했으며, 이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 오찬에서 "문민정부 탄생 이래 지금까지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왔지만 낡은 공산주의 사상을 맹종하는 자들에 대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박홍 신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 여파로 사회 저변에 반공 히스테리가 불어닥쳐 7월 20일에 20개 대학총장들이 박홍 총장 지지 성명을 표한 데 이어 22일에는 대검찰청 공안부가 한총련전대협 시기인 1991년부터 팩시밀리로 북한과 40여번이나 교류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24일에는 법무부가 주사파를 사면/복권에서 제외시키는 등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지만...

"사회 각계각층에 주사파가 몇만 명이고 그 중에 자신이 회개시킨 사람이 수백이며, 예수께서도 일찍이 성전 앞의 환전상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셨다." 환전상들과 주사파가 무슨 상관인지는 묻지 말자 자본주의 까는것도 아니고

이후 8월 25일에는 그 유명한 주사파 발언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도 주사파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라는 질문들에 대해서는 박홍은 "스스로 나타나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증거가 있냐는 물음에 대해선 "증거 묻는 사람이 바로 주사파"라는 심오한 개드립 답변으로 모두를 아연실색케 했다. 조지프 매카시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물론, 박홍은 "고해성사 때 들었다고 언급 했기 때문에 증거와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지만, 가톨릭에서 신부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절대 발설해선 안되고 따라서 주사파가 있다는 것을 고해성사에서 들은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실제로 이 때문에 가톨릭 교계 내부에서 고해성사 비밀 누설죄로 고발당하기조차 했다. 가톨릭 측은 이 고발을 시간을 질질 끌다가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질 무렵 무혐의 처리로 종결해버렸다.

당시 박홍은 연일 주사파 발언을 날려대면서 운동권과 재야세력을 싸잡아서 공격했지만, 정작 발언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안 맞는 것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한총련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의 사로청이 있다.라는 발언으로 당시 운동권 내부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것을 듣고 엄청나게 황당해 했다. 저기서 언급된 사노맹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자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활동했던 지하혁명조직이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노동자계급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활동했지만, 당시 북한의 김일성 지배체제와 주체사상에 대해선 극도의 반감을 표출한 집단이다. 사노맹은 남한의 주사파를 조국통일이란 민족주의 구호아래 노동자계급 혁명을 저해하는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주사파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북한도 사회주의에서 이탈한 김일성 1인 봉건독재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사노맹은 이미 1992년 안기부가 박노해, 백태웅 등 주요 간부들을 대거 체포하면서 조직이 완전히 궤멸된 상태였으며, 이후 사노맹의 와해를 마지막으로 남한 내에서 노동자계급혁명노선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 시기까지 극좌파 혁명노선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구 소련의 붕괴, 중국의 개혁개방, 문민정부의 출범과 사노맹을 포함한 주요 지하조직의 와해를 보면서 대대적인 사상전향을 하게 된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 그 폐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시민단체, 합법적 노동조합, 대중적 진보정당 운동에 뛰어든다. 김문수, 신지호 처럼 보수우익으로 말을 갈아탄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박홍은 당시 주사파가 한총련을 장악했다고 주장하면서[3], 정작 그 한총련의 배후조직으로 철두철미한 반주사파 세력이였던 사노맹을 들이댄 것이다. 더구나 이미 망해서 사라진 조직을. 그리고 이 사노맹의 배후 조직으로 단순히 이름이 비슷하단 이유인지 사로청(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 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을 제시한 것이다. 한마디로 박홍은 당시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내부사정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에서 그냥 몇 가지 들은 것으로 썰을 과하게 풀어버린 것이다[4].

이뿐만 아니라 1995년 서강대 면접시험 당시 학생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무시하고 "좌경폭력혁명에 가담않겠다." 라는 서약서 제출 강요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커지게 된 것은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가 여과 없이 그의 발언을 진실인 양 써제꼈기 때문. 근거가 있냐는 물음에 '강도가 나타났다고 외쳤는데 강도는 안 잡고 강도가 나타났다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는 병신스러운 논리를 사설과 칼럼란에 배설하였다. 증거도 없는데 강도 나타났다고 신고하면 공무집행방해 이후 박홍은 조선일보에게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박홍은 조선일보가 자신을 외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다른 언론에 하소연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학법에는 '사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사회주의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공산주의화하자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건 전형적인 연쇄반응의 오류. 자칭 우파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들어서는 발언이 조갑제에 비해 약해진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진중권김지하 관련 발언에 개 짖는 소리라고 밝혀 자신의 존재감을 새삼 발휘하고 있다. 한편 조선일보TV조선에서는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3 종교인으로서

주요 인사가 전반적으로 깨끗한 한국 가톨릭[5]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인물이다.어쨌든 간에 서강대학교 내부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인데다가 한국 천주교는 정치적인 견해에 있어서 중립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답답하긴 해도 공개적으로 박홍을 비판하는 천주교 내부 인사는 드문 편이다.[6]

박홍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강준만 교수의 저서 <레드 콤플렉스>와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책을 읽어보도록 하자. 이분의 망언을 까는 유머집 <신부님 신부님 바콩 신부님>도 나왔는데, 주책없는 언변이나 행동을 까는 맛이 일품이다. 심지어 서강대학교 로욜라 도서관 인문학 도서 서가에 비치되어 있다.

박홍은 의외로 가톨릭 내에서는 회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엘리트로 인정받는 예수회 소속 수도사제[7]이다.[8] 예수회 자체가 보수적인 가톨릭에서도 특히나 강경하고 근본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단체이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중남미에서 공산주의 혁명 게릴라를 펼쳤던 사람들이 전현직 예수회 회원이었다[9]. 페드로 아루페 총장 이후 예수회는 본래의 예수회 정신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예수회는 모든 사회 현상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래서인지 현재의 한국 예수회를 보면, 극우, 극좌에서 동시에 활동하고 있는 사제들이 많다. 한국 천주교의 까스통 할배라고 불리는 천주교대한민국수호모임 쪽에는 예수회 출신 주교인 이한택 요셉 전 의정부교구[10], 박홍 신부가 활동 중이고, 그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는 아주 많은 수의 젊은 예수회 사제들이 활동 중이다. 일례로, 현재 한국 예수회 관구장이 제주해군기지 반대 시위 관련하여 체포가 될 정도로... 페이스북에서 서로 날선 비판을 할 정도로 공동체가 상당히 분열되어 있다.

가톨릭은 과거 공산주의의 대척점에 섰던 종교이므로 가톨릭 신부가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정당한 근거로 주사파, 공산주의 비판을 하지 않고 매카시즘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서강대학교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박홍은 대단히 술고래골초라고 한다.[11] 여기에 어느덧 나이가 70대가 넘은 것을 포함해서, 현재는 여러모로 건강이 좋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4년 8월 서강대 동문회측과의 접견에 따르면 수년 전에 심장수술을 받았고, 매주 3차례의 신장 투석치료를 받고 있을 정도. 예수회 회원들이 상당수 참석하는 2015년의 예수회 사제 서품식에서도 목격되었는데, 휠체어를 타고 식장에 들어왔으며 끝난 뒤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탄다는 등 건강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는 증언이 있었다.

4 저서

<레드 바이러스>라는 책이 있다. 제목은 '레드 콤플렉스가 생기는 것은 레드 바이러스, 즉 주사파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드 콤플렉스를 운운하기 전에 레드 바이러스부터 따져야 한다'라는 의도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본인이 저술한 내용은 없고 관련 자료를 짜깁어놓은 자료집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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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니까 안기부가 활동자금을 지원한 사실상 끄나풀이란 이야기.
  2. 실제 국내의 근현대사 연구자들은 <백범일지>의 기록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3. 사실, 이 부분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박홍 총장의 말처럼 한총련이 온전히 NL주사파만의 조직이었던 것도 아니다. 1994년이면 NL-PD-21세기 진보학생연합 등 운동권 모든 세력이 한총련 운영에 참여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NL이 주도권을 쥐긴 했지만, 독주한 것은 아니며 NL 내부에는 비주사NL계도 상당수 존재했다. NL주사파 그중에서도 무책임할 정도로 북을 추종하는 강경파(자주단결대오)가 한총련을 완전히 장악한 건 박홍의 발언 뒤인 대략 1996년부터이다. 이 때가 되면 강경주사파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운동그룹들은 들러리로 전락한다. 1996년 연세대 사태,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가 연이어 터진 게 우연이 아니다.
  4. 사실 70년대 이후 제 1세계의 좌파운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만 알고 있으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자신들이 건설하려고 하던 정당을 '사회주의노동자당'이라고 규정했고... 이는 전통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정당명이다. 이 때문에 당시 백태웅과 박노해가 북한 및 현실사회주의 진영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트로츠키주의적 함의가 강한 명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세력들과 관련이 없음을 명확히 표현하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우린 트로츠키가 좋다고! 스탈린 좆까! 김일성 쫒까!
  5.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이미지 세탁을 잘 해놓고 강우일 베드로 주교를 필두로 하는 일부 사회참여파 신부 덕분에 그렇지, 해방 이전이나 이후나 별로 깨끗한 편은 아니였다(...) 다만 개신교 계열 인물들이 넘사벽으로 막장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예를 들어 한국 천주교의 대부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는 일제강점기부터 대놓고 정부랑 친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인 장면 이승만과 결별하기 전까지는 신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군사독재시절도 완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오히려 박정희 군사정권의 거물 정치가인 이효상의 차남인 이문희대구대교구 대주교를 역임하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영남일보에게 밀렸던 매일신문의 경북지역 구독율 1위로 올려준 게 언론통폐합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 가톨릭 교회(정확히는 대구대교구)에게 유리하게 영남일보를 매일신문으로 합병시켜줬다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박근혜가 세례받고, 가톨릭계 학교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괜히 진학한 게 아니다.
  6. 다만 사적인 자리에서 '저분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하는 분들은 꽤 많다. 물론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면전에서 따지는 경우는 없다.
  7. 수사신부, 성직수사라고도 함.
  8. 서강대학교도 예수회에서 세워 운영하는 학교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가톨릭대학교와는 계통이 다르다. 문과계열이 강세인 서강대와 의과대학 중심인 가톨릭대학교의 통합 떡밥이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번번히 무산된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이제는 시기를 놓쳤다는 게 중론.
  9. 정확히 말하면, 예수회는 가톨릭 내의 종교적 입장에서는 강경한 근본주의적 보수파이지만,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급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경우도 많다.(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회는 기본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향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많이 내기에 그 구성원들의 정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좌우불문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포용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중에서도 급진파나 좌파의 비중이 결코 낮지 않다.) 아예 주류 가톨릭에서 경원시하는 해방신학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 정도...하다 하다 못해, 역대 교황 중 두드러지게 급진적인 편에 속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조차 수사신부이던 시절 예수회 장상들에게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갈굼당했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흑역사 항목을 보면 이 정도를 급진파라고 할 정도로 가톨릭이 보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10. 이쪽은 그냥 예수회 소속이 아니라 예수회 수련장 신부였다. 즉,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예수회 신부들이 거의 대부분 이한택 주교의 제자들이다(...). 이한택 주교의 극우 행보를 보고 어이없어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
  11. 결혼을 하지 않고 가정을 꾸리지 않는 탓에, 신부들이 은근히 골초나 주당이 많다고 한다. 심지어 주교회의에서도 그러한데, 주교들의 모임 후에 청소를 해 보면,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두룩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