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전적 의미
迫眞. 진실에 가깝다는 뜻이다. 주로 '박진감'의 형태로 쓰인다.
한여름 밤의 음몽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인데, 음몽에 출연한 배우들의 심한 발연기 중에서[1]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이 있을 때 (박진)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주변에 (박진) 표현을 필요 이상으로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음몽민인 것이 확실하다(경계)
2 인물
2.1 조선 중기의 군인
朴晉 1560 ~ 1597
자는 명보, 명부, 여회. 시호는 의열.
조선시대의 무신이자 임진왜란 때의 조선군 장군으로 소산역 전투, 작원관 전투,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1592년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제승방략에 따라 동래성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동래성이 이미 포위당한 다음이라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진을 치고 왜군에 맞섰다. 그러나 군사가 500에 불과해 압도적인 수의 왜군에게 패하고 밀양으로 물러나 낙동강변 요지인 작원잔도에 진을 치고 방어하였다. 박진은 잔원잔도의 험한 산지 길목을 끼고 소수의 병사로 지연전을 시도했으나 고니시 군 일부가 우회하여 앞뒤로 들이치는 바람에 패전했다. 패배한 박진은 가족들을 대피시키고 밀양성에 불을 지른후 퇴각한다. 그뒤 일본군에게 함락당한 영천성에서 자발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항전하자 자신의 관할구역에서 통제를 따르지 않는 의병들과 알력을 일으켰던 개인적인 감정은 접고 자신의 부하인 권응수와 박의장을 보내 지원하게 했고, 영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의병들의 공로인줄 알기에 자신의 공이라 선전하지는 않는다.
그뒤 제1차 경주성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경주성을 탈환한다.[2] 그뒤 동지중추부사, 황해도병마절도사 황주목사 등을 지냈다.
1597년에는 병조참판이 되었는데 병으로 명나라 외교관이 방문했는데도 대접할수 없었으며, 훈련 조차 할수 없었다. 그해 3월 명나라 장군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윤성립과 한준겸[3]이 그의 시신을 검사한 결과 심한 구타의 흔적을 발견했고, 시신에서 윤성립은 몸의 골절을 한준겸은 갈비뼈가 부러진 것을 확인했다.
허나 누승선은 처벌받지도 않았고, 박진의 어머니는 늠료[4]만을 받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