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육

위서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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龐淯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자이(子異).

주천군 표씨현 사람으로 어머니 방아친 못지 않은 충성심을 지니고 있으며, 방육은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 이수가 방심하고 있음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원래 양주의 종사로 파강현장의 일을 했는데, 206년 7월[1]에 무위태수 장맹이 반역해 자사 한단상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는 장맹이 한단상의 장례를 치르는 자가 있으면 죽이겠다고 선언하지만 방육은 오히려 관직을 버리고 밤낮을 달려가 한단상의 유체 앞에서 곡을 하고 방육을 죽이려고 든다.

이에 장맹의 병사가 방육을 잡아들이려고 하니 방육은

장맹은 자사를 죽여 죄악을 행했는데, 이 사람은 충성을 다해 공명을 날리는구나. 혹여 그를 죽인다면 어찌 주 내에 훌륭한 선비들을 포섭하겠는가!

라며 한단상의 상을 치르도록 허락하며, 이 일로 인해 그의 충렬함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런 그의 소문을 듣고 태수 서읍이 그를 주부로 삼았으나 재수 없게도 황앙이라는 군민이 반역을 일으켜 성이 포위당한다. 방육은 그런 상황에서 처자식마저 내팽겨치면서 장액과 돈황 두 군에 위급함을 알리며, 그런 그를 의심해 군세를 내려고 하지 않자 방육은 검으로 자살할 뜻을 나타내니 그제야 방육의 의기에 감탄해서 그 말을 믿고 도우러 왔으나 이미 성은 함락되고 서읍은 죽은 뒤였다.

방육은 서읍의 유체를 수습해 본국으로 보내고 삼년상을 치뤘는데, 그 소식을 들은 조조가 그를 직접 불러들여 연속으로 삼는다.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부마도위가 되고 서해태수로 옮겨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중앙으로 돌아가 중산대부로 임명되고 세상을 떠나 방증이 뒤를 잇는다.

장기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최후에 명성과 지위가 있었다고 하며, 진수는 방육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칼을 거꾸로 해 스스로를 찌르려 했으니 그의 진실된 성의는 이웃 나라까지 감동시켰다고 평했다.
  1. 방육전의 주석으로 딸린 전략에는 건안 14년(209년)이라고 되어있으나 후한서 효헌황제기에는 건안 11년(206년) 7월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