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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臧覇
(? ~ ?)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선고(宣高). 태산군 화현 출신. 위략에 따르면 별명은 노구(奴寇).
본디 여포와 연합 관계였던 독자적인 세력의 수장이었고, 여포 패망 이후에도 조조와 제휴하며 한동안 세력을 유지하다 조조가 화북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치자 세력권을 포기하고 조조에게 편입되었다.
2 정사
18살 때 태산군 화연의 옥리로 있었던 장패의 아버지 장계(臧戒)가 태수의 죄수들을 사사로이 처형하라는 명을 거역하자 태수는 그를 체포해 호송하였는데 장패가 동료들과 함께 산길에서 습격하여 부친을 구해낸 것으로 무용담이 널리 퍼진다.
그렇게 한 뒤 서주의 동해국으로 망명했는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그 용맹함을 높게 산 서주목 도겸에게 초빙되어 황건적을 격파하는 공적을 세우고 기도위에 임명된다. 이후 동료인 손관, 오돈, 윤례 등과 군사를 모아 개양에 주둔했으며 태산의 산맥지대에 근거해 독자세력화한다.
이후 여포가 서주를 점거하자 장패는 여포의 휘하로 들어간 동해상 소건을 격파하고 물자를 노략질한 일로 여포의 공격을 받는 등 여포와 잠시 대립했지만 곧 화해했고, 조조가 쳐들어왔을 때 여포를 지원했다가 여포가 조조에게 패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잠적했지만, 조조는 장패의 행방을 수색하는 한편 장패를 부르기도 하면서 기어이 장패를 찾아낸다.
애초에 조조는 장패를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장패를 직접 만나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우두머리 격이었던 장패가 오돈, 손관, 윤례 등을 모두 불러들이게 했으며, 장패를 낭야국상으로 임명하는 한편 청주와 서주를 감독하게 했고, 오돈 등도 제각기 태수로 임명하며 장패의 지휘를 받도록 한다.
물론 별도로 자사를 임명해 장패를 감독하는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이는 독자적인 군벌을 형성하고 있던 장패의 세력권을 중앙정부의 권위를 통해 합법적인 형식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예주 남부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이통이 있었는데, 조조는 이런 형태의 아웃소싱을 통해 현지의 반발을 줄이고, 이들로 청주의 원담, 형주의 유표 등 인접한 경쟁세력을 견제토록 하며 군비 지출을 절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패전에서는 당시 장패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과거 조조의 부장이었던 서흡, 모위는 장막과 여포에게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조가 연주를 회복하자 달아나 장패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조조는 장패에게 유비를 보내 이들을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장패는 유비에게 "조공에게 거역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보호를 받는 자들도 내버릴 수 없으니 그 점을 중재해달라."고 했고 유비가 이를 조조에게 말하자 조조는 장패를 칭찬하며 서흡, 모위를 사면하고 태수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동맹국의 군주에게 사신을 보내 외교를 하는 모양새에 가깝고, 조조는 결국 장패의 뜻을 받아들임은 물론 입장을 완전히 바꿔 서흡,모위를 2천석의 고관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조조로서도 최대한 장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했던 샘.
조조가 이토록 장패의 회유에 힘쓴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면서 드러났는데, 장패가 별동대를 이끌고 청주로 여러차례 침입해 조조는 동쪽에 대한 방위에 신경쓰지 않고 원소와의 대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해 참수하고 기주와 청주를 평정하자 장패는 대세가 결정났다고 봤는지 조조에게 와서 축하하며 자신의 가족을 업에 이주시키겠다고 했고 조조는 그의 충성심을 칭찬한다.[1] 원담 사후 청주의 혼란을 틈타 청주 제남군 일대에서 서화, 사마구 등의 황건적 잔당들이 난리를 피우자 하후연과 함께 이를 토벌했으며 창희가 모반했을때도 우금과 함께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다.
적벽에서 참패하자 진란, 매성이 남양 일대[2]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손권이 한당을 파견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장패는 한당과 싸워 격파하고 서둘러 서구로 이동하였는데 손권은 자신의 수군을 이끌고 서구를 점령해 이곳으로 계속 진란을 지원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의 수군은 장패가 이미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 철수한다. 손권이 철수하자 장패는 자신의 군으로 하루만에 백리를 행군하여 장료군과 합류, 진란을 격파한다.
그 뒤 조조가 유수구에서 손권과 싸울 때[3] 장패는 장료와 함께 선봉을 맡았으나 불리하였다. 장료가 군을 철수하려 하자 장패는 조조의 철수 명령이 내려올테니 기다리자고 하였고 과연 다음날 조조가 철수 명령을 내린다. 조조는 이에 감탄하여 장패의 벼슬을 높인다.
조조가 한중에서 패배한 뒤 관우가 북상하고 손권이 비밀리에 조조와 손잡자 조조가 동쪽의 부대를 중앙에 집결시킨 일이 있었다. 장료도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였고 장패 역시 조조가 있는 곳으로 집결하였다. 장패와 그의 군대가 낙양에 있을 때 조조가 죽자 장패는 장차 천하가 어지러워 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멋대로 청주로 되돌아갔지만, 태자 조비가 안정적으로 후사 계승에 성공했기에 결과적으로 이는 실책이 된다.
훗날 조비가 조휴로 하여금 청주, 서주의 도독으로 삼자 장패는 그의 지휘를 받아 조휴와 함께 여범을 격퇴시켰다.[4] 그 뒤 조비는 동쪽으로 순행하여 장패를 만났는데 장패가 과거 멋대로 청주로 되돌아 갔던 일을 의심하였므로 장패의 병력을 빼앗고 집금오의 벼슬을 주어 수도로 소환했다. 장패는 조예 시절까지 살았는데 그의 식읍은 3500호에 이르렀다. 230년에는 조예가 번창으로 행차하는 도중 장패에게 태위의 일을 대신하게 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웬만한 무장으로서의 행적을 보이다가 의외로 말년에는 태위 대리까지 오른 인물.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스토리 중심축에서 떨어진 곁가지라 여겼기 때문인지 처음부터 여포의 부하로 나와 조조와 싸우고 여포가 패망하자 장료의 설득으로 항복한다.[5] 나중에 적벽 전투 전에 방통의 계략으로 서량의 마등과 한수가 후방을 친다는 소문이 나자 서서와 함께 산관으로 군대를 이끌고 떠나는데 이후의 행적은 없다.
4 미디어 믹스
4.1 반삼국지
반삼국지에서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마초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출병할 때, 조조가 이끄는 대군에 속해서 등장한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마초의 칼에 의해 쓰러진다.
4.2 삼국전투기
장패(삼국전투기) 문서 참조.
4.3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여포군의 부하로 등장한다. 별도로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도겸의 부하로 설정되며 정사대로 독립세력으로 나온 적은 없다. 능력치 자체는 평범하다. 여포군 투탑인 장료, 고순에 비하면 많이 처지는 편이고 시리즈에 따라서 실적이 비교도 안되는 송헌, 위속, 후성보다도 능력치가 나쁠 때도 있다.
연의에서 산적 비슷하게 나온 탓. 비슷한 케이스인 이통, 문빙, 만총은 최근작에서 능력치 상승이 이뤄진 반면 장패는 아직 소식이 없다. 삼국지 시리즈에서 저평가된 인물 중 하나.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5/72/46/52. 분전, 돌파를 가지고 있다. 도겸군 아니면 안 썼을 그저 그런 장수.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3/72/49/56/69에 특기는 징병, 돌격, 기습, 기염 4개. 매력69가 미묘한 수치긴 해도 아쉬운대로 징병 특기가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특기는 위압. 없는 것보다는 좋은 특기이기는 하나 영웅집결 기준으로는 같은 도겸군 장수인 손관도 특기가 위압이라서....
삼국지 12에서의 전법은 대타격. 장패의 무력이 어중간하고, 여포군에서는 여포의 인중여포 때문에 말할 것도 없으며, 도겸군에서도 진등의 매복의 독이 더 무섭기 떄문에 쓸 일은 많지 않다. .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78/75/53/56 이고 중신특성은 없다. 전법은 소침공작이며 병과적성은 창A/기A/궁C 이며 특기는 훈련4, 순찰1, 신속6. 이번 작에서 주군이 상당히 자주 바뀌는 장수로도 유명하다. 반동탁연합에서는 도겸의 수하로 등장하며, 군웅할거에서는 여포, 조조 어느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여포토벌전에서는 여포, 관도대전부터는 조조군에 소속된다.
4.4 영걸전 시리즈
영걸전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조조전에서만 등장한다. 영걸전에서 등장할 만한데 등장하지 않은 것이 조금은 의외. 조조전에선 적병계 클래스로 나온다. 그런데 하는 말마다 허세뿐인데다, 강한 적을 만나거나, 패하거나 죽을 때 하는 대사가 하나같이 늘 핑계만 대는 것들 뿐이다. 아니면 정신승리를 시전하거나... 서주 구원전에서 장패를 퇴각시킬 경우 사망하며 허저 전용템인 몰우전을 남긴다. 근접공격밖에 안되는 적병계 클래스가 원거리 공격을 하게 해주는 매우 유용한 보물.
4.5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BLAST 등장인물 | ||
위 | SR | 하후돈, 곽가, 장료, 견희, 순욱(SR), 조비, 조조, 왕이, 문빙(낭아봉)(SR), 조인, 가후, 장합, 만총(요필)(SR), 악진 |
R | 순욱(장검), 조홍(쌍월), 만총(타구곤), 문빙(언월도), 변씨(피리), 문흠(극), 화타(구조), 하후희(위복장)(피리), 조절(권), 장창포(피리), 조모(쌍인검), 조식(비연검), 최씨(양인창) | |
N | 조휴(화염궁), 조진(폭탄), 왕랑(쌍인검), 조아(순패검), 주령(장검), 관구검(쌍월), 조상(폭탄), 하안(타구곤), 왕경(비연검), 마준(신세검) | |
오 | SR | 육손, 주연, 손상향, 감녕, 손책, 태사자, 손권(도), 정봉, 보연사(노), 대교, 소교(철선), 여몽, 능통, 주환(SR)(극) |
R | 서성(극), 서씨(피리), 손익(극), 오국태(쌍두추), 정보(쌍모), 주환(용창), 장흠(쇄분동), 고옹(비연검), 능조(극), 유씨(권), 주이(용창), 손노반(쌍두추), 제갈근(비연검), 육항(비연검), 손노육(적), 보천(비연검) | |
N | 우번(도), 여대(도), 하제(선곤), 원희(권), 주치(극), 제갈각(비연검) | |
촉 | SR | 조운, 관우, 장포, 관은병, 장성채, 마대, 유선, 관색(양절곤), 유비, 장비, 하후희(SR)(쌍선), 강유, 마초, 제갈량 |
R | 주창(귀신수갑), 하후희(촉복장)(피리), 엄안(박도), 왕평(양인창), 제갈씨(순패검), 왕도(양인창), 미당(쌍모), 호제(용창), 왕열(쌍두추), 비의(비연검), 마량(비연검), 마속(비연검), 이씨(쌍두추), 요화(R)(열격도) | |
N | 간옹(구조), 부사인(신세검), 요화(열격도), 미방(쌍검), 습씨(십자극), 장익(순패검), 황호(비연검) | |
진 | SR | 사마소, 왕원희, 종회, 문앙, 사마의, 사마사, 가충, 하후패, 제갈탄, 등애(나선창) |
R | 호열(극), 장반(비연검), 초이(극), 문호(용창), 신헌영(순패검), 가남풍(구조), 양호(구조), 두예(비연검) | |
N | 신창(비연검) | |
여포 | SR | 여포, 여령기, 초선, 장료, 장패(언월도)(SR) |
R | 고순(박도), 화웅(극) | |
N | 장패(언월도) | |
원소 | SR | 원소 |
R | 안량(연인자), 문추(아벽) | |
N | 없음 | |
타 | SR | 수경선생(SR), 호로(ホロウ)(총), 옥새, 잔다르크, 번옥봉(SR)(인노). 소마(금쇄봉), 동탁, 맹획, 동백(단철편)(SR), 아르나스 |
R | 수경선생(R), 화웅(극), 우길(폭탄), 기령(쌍모), 화만(귀신수갑), 하태후(구조), 번옥봉(권), 풍씨(권), 마등(극), 한수(쌍월) | |
N | 동백(십자극), 곽사(극), 황조(아벽), 이각(박도), 수경선생(쌍검), 유표(구조), 엄백호(쇄분동), 왕윤(비연검), 원술(신세검), 장수(비연검), 추씨(피리), 장로(도) |
- ↑ 표면상으론 장패가 조조에게 복종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자신의 독립적인 세력을 자주적으로 굴리고 이해타산에 따라 협력하는 관계였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패가 조조가 수도로 삼은 업에 가족을 두겠다는 것은 조조에게 자신의 가족을 사실상 볼모를 두는 것이자 신하로써 섬기겠다는 복종의 뜻을 비춘 것이었다. 그래서 조조에게 충성심이 있다고 칭찬받은 것이다.
- ↑ 원술이 과거 세력을 잡은 곳.
- ↑ 조조는 세 번 유수구에서 손권과 싸웠는데 213년, 214년, 그리고 217년에 싸웠다. 이때는 217년의 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제기에 철수하면서 하후돈, 조인, 장료를 거소에 남겼다고 하고 장패전에선 하후돈과 장패를 거소에 남겼다고 하므로 하후돈이 거소에 남긴 시기였던 217년의 일로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장패전에서는 손권이 항복했다고 했는데 손권이 이렇게 저 자세를 보였던 적은 213년과 217년의 일이었는데 213년에는 하후돈을 거소에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 ↑ 손권이 이릉전에서 유비를 격파하고 조비가 대규모로 손권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었다.
- ↑ 연의에서 주요 군웅의 부하로 소개되는 인물들 중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이통 또한 처음부터 조조의 부하로 나왔으며, 관서의 군벌들은 모조리 한수의 부하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