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국

국가월남
國家越南
Quốc gia Việt Nam
프랑스 제4공화국괴뢰국
국기
1949년 ~ 1955년
위치지금의 베트남 남부
수도사이공
정치체제군주제
국가원수
언어베트남어
주요사건1949년 건국
1955년 멸망
통화피아스터
성립 이전베트남 제국
멸망 이후베트남 공화국

2차대전 종전이후 1949년부터 1955년까지 현 베트남 지역에 존재한 프랑스의 괴뢰국. 일본의 괴뢰국이였던 베트남 제국(Đế quốc Việt Nam, 데 꾸옥 비엣 남)의 후신이며,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Bảo Đại)가 국가원수였다. 수도는 지금은 호찌민으로 개명된 사이공.

바오다이는 프랑스의 태도에 실망해서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지만 결국 프랑스와 협상 끝에 1949년 6월 14일, 독립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눈 가리고 아웅식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은 프랑스가 베트민과의 전쟁 구도를 식민지 전쟁에서 반공산주의 전쟁으로 바꾸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랑스 본토에서 공산당이 제1정당의 자리를 차지하고있었으나 단독으로 정권을 잡을 정도로 의석이 많았던건 아니었고 1947년 들어 연립정권에서 배제되었고 중도좌파(사회당-당시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회)와 중도파(공화주의자, 급진주의자, 그리고 급진사회주의자당-약칭 급진사회당), 중도우파간의 연립정부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런노선을 취하는게 가능했다.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프랑스인들이 각 분야를 주무르는데다가 화폐는 여전히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의 화폐인 피아스트르(piastre)였고 베트남의 화폐인 동(Đồng)이 발행된것은 독립 선포후에도 한참이 지난 1953년의 일이었다. 군대도 여전히 프랑스인 장교들이 베트남인 병사들을 지휘하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후반부에 가서 베트남인 장교들이 양성되기 시작하긴 했다. 미국이 보내준 원조도 곧바로 프랑스에 손아귀에 들어가 베트민과의 전쟁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프랑스의 이러한 태도는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베트남 독립 동맹)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줄 뿐이었고 처음에는 기대를 품던 베트남인들도 결국 호치민에게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결국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하고 제네바 합의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베트민이, 남쪽은 프랑스와 베트남국이 차지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총선거 이전의 잠정적인 것이었다. 이때 바오다이가 수상에 임명한 응오딘지엠1955년 10월 23일 국민투표를 조직해[1] 사흘 후인 10월 26일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면서 베트남국은 소멸하였다. 바오다이는 쫓겨나 프랑스로 망명하여 1997년 사망하였다.
  1. 참고로 이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108.42%(...)였고 공화국 지지가 98.91%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