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베트남 남부의 대도시는 호찌민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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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찌민 (Hồ Chí Minh, 胡志明) |
생몰년 | 1890년 5월 19일 ~ 1969년 9월 2일 |
출생지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응에안 성 남단현 안츄마을 |
사망지 | 베트남 민주 공화국 하노이 |
정당 | 베트남 노동당 |
종교 | 없음(무신론) |
배우자 | 증쉐밍 |
1968년의 사진
베트남 독립의 대영웅. 유명한 공산 혁명가이자 현실에 존재한 먼치킨.[1] 그리고 지금 베트남의 국부. 일부에서는 시대를 잘못 예측한 이상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1 소개
베트남의 정치가이며,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본명은 응우옌신꿍(Nguyễn Sinh Cung, 阮生恭, 완생공). 자(字)는 떳타인(Tất Thành, 必成). 호찌민은 가명이며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호 아저씨'(Bác Hồ, 박 호, 伯胡)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또한 호찌민은 생에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호찌민을 포함 대략196개의 가명이 있었다고 한다.
2 일생
베트남 응에안(Nghệ An, 乂安)성에 있는 호앙쭈(Hoàng Trù)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가난한 유학자였다. 그의 가계가 객가(客家)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2] 그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어 수도 후에로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번민했고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해직된다. 현실에 실망한 그는 이후 후에를 떠나 시골에서 약제사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3]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찌민은 물론 형과 누나도 주변에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하게 되는데, 때문에 호찌민의 형과 누나는 반식민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당해 수감된다. 본인도 프랑스-베트남 학교 재학 시절 징세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만다. 잠시 민족주의자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당시 독립운동 전반에 만연했던 '일본을 배우자.'란 구호에 실망[4]하였고 도리어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 나아가 세계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 프랑스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 등으로 일했다.
그 밖에도 영국, 미국 등을 전전하면서 신문물과 사상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분에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타이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했다.
1918년에는 베르사유 회의에 우국지사들과 응우옌아이꾸옥(Nguyễn Ái Quốc, 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민주·평등권을 요구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의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 독립보다는 프랑스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써 베트남인의 인권보장을 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신한청년단에서 독립청원서를 발표한 것과 비슷하게 위의 가명을 사용해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베르사유 회의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젊은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가로써 명성을 얻게 되고, 향후 27년간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베르사유 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을 만나 베트남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윌슨은 무시했다고 한다.
1920년에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고, 1923년에 개최된 제2차 프랑스 공산당 대회에서 대회 참가단 주석 자격으로 참가했다. 또한 그 해 소련에는 각국 식민지 농민 대표 자격으로 건너가 한동안 국제공산당에서 일하다가 1924년 중국 광저우로 갔는데, 당시 이름을 다시 리투이(Li Thuy, 李瑞)로 바꿨다. 여기서 그는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창립하고 동아시아 지역 피압박 민족연합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당원 중 최고급 당원만 유학한다는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다. 이때 박헌영을 만난다.
별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코민테른 요원으로, 소련 내에서는 일종의 피압박민족의 투사로써의 모델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과 베트남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혁명 조직을 형성시키고 통합시키는데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베트남청년단, 안남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인도차이나 공산당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만난 뛰어난 인재들을 소련으로 보내 교육시키는 등, 어느 판타지 소설의 공화주의자 백작님 마냥 조직과 인재를 통해 혁명의 근간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잠시 태국에 머물 때조차 그곳에 있는 베트남 이주자들과 원주민들을 통합해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도 하는 먼치킨.
1932년 6월 홍콩에서 영국 밀정에 체포되었으며 1933년 풀려난 뒤에는 소련의 모스크바에 갔다. 1940년부터는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1년 2월에는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1942년 8월 이름을 호찌민(Ho Chi Minh)으로 개명해[5] 활동하다가 중국 국경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간 투옥되기도 했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의 OSS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OSS는 호찌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찌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또한 종전 직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찌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세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는...
1945년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식으로 자신을 호찌민으로 소개하며[6],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해 봉건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이후 중국을 경계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프랑스는 호찌민이 폐위시킨 바오다이 황제[7]를 왕위로 내세운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움에 따라 협정은 무산되게 된다. 이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奠邊府) 전투의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게끔 하여 프랑스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 식민통치 종결, 베트남 독립. 1955년 전투 지역으로부터 수도 하노이로 개선했다.
그 뒤 1955년 세워진 남베트남과의 전쟁으로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염원이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병으로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향년 79세. 그가 죽고 6년 후인 1975년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은 통일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호찌민이 사망한 날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운 날이었다.
사망 전 유언으로 화장 후 재를 3등분하여 베트남의 북·중·남부에 한 줌씩 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말 안 듣는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 바딘(Ba Dinh) 광장 앞에 대규모 영묘를 짓고 호찌민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안치하여 참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레닌 이후 시신이 미이라로 보존되고 있는 두 번째 공산권 지도자가 되었다.[8]
호찌민의 유언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유언 중 하나가 전쟁에서 승리시 남베트남 사람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유언도 있었다.
그러나 유언과 다르게 결국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에선 대대적인 숙청이 터지고 말았다.
유언의 전문은 이렇다.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그가 사망한 것에 관계없이 베트남전은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1975년에 북베트남이 승리함으로서 그의 숙원인 베트남의 통일을 이룬다. 그리고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그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으로 개명하였으며, 통일 수도는 하노이가 되었다.
거기다가 베트남전 당시 투쟁을 위해 노력한 베트남 국민들을 위해 1년 동안 세금을 거두지 말고, 그 후로도 세금을 줄이기를 부탁했으나 북베트남 정부는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래서 훗날 호찌민의 비서는 베트남 정부가 호찌민의 유언을 훼손했다며 당 지도부를 비판하기도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나 중국에 머물던 시절에 중국 여자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호찌민이 체포되면서 이들 역시 실종되었고, 북베트남 주석이 된 이후 호찌민이 이들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는 주민등록제도와 같은 인구 파악 및 신분확인을 위한 제도가 완전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그럴만도 하다.[9]
3 성격
남들에게도 매우 친절하였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호찌민이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친척들이 나중에 그가 유명한 호찌민이라는 것을 알아서 어찌할 줄 모르자 그는 "그냥 평소대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진정한 대인배.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는데 낡은 옷을 기워서 입기가 일쑤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 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고 하니 이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3찬 만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왜 3찬 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고 한다.[10]
호찌민이 죽은 뒤 그의 명성을 먹칠하고자 그가 실은 사치스럽게 지냈더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무엇 하나 증거도 없이 주장하던 거라서 결국 개소리로 묻혀졌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호찌민 연구가들도 꼼꼼하게 조사했지만 그가 사치를 누렸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긴 한데 실은 그도 사람인지라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고픈 욕망이 없던 건 아니다. 친구에게 털어놓은 고백을 보면 "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걸 먹고 편하게 살고 싶다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걸 실제로 이루지 않으며 살았기에 전설이 되었다. 김정일이 자신의 사치와 호의호식을 위해 북한의 국가경제를 말아먹은 것을 생각해 보라![11] 일화에 따르면 딱 하나 자신이 사치라고 부르던 것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영국제 담배 555였다. 뭐요? 이것만은 양보 못 하겠다고.이게 사치라고?![12] 또한 자신이 가는 곳을 경호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갈 곳을 알리면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이 귀찮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13]
하노이엔 호찌민이 기거했던 옛 주석궁이 있는데,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였다고 한다. 당연히 상당히 호화로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정작 이 옛 총독부 관저를 쓰지 않고, 주석궁 안의 연못 옆에 작고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 호호'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면 미소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면서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하루는 아랫사람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면서 시끄럽다고 화내자,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활기찬 곳은 없다면서 놔두라고 했단다. 그 시절 그를 돌보던 가정 도우미는 그가 프랑스인이나 미국인을 만날 때는 빼고 화를 낸 걸 좀처럼 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14]
이렇게 베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호찌민 덕에 베트남에는 꽤나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지만 큰 마찰은 없다고 한다. 호찌민도 생전에 소수민족도 우리의 동포라면서 그들의 풍습에 맞는 집에도 거주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이자 서민적인 모습으로 다가갔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이공을 호찌민으로 개명했다. 그의 사망일은 공교롭게도 독립선언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9월 2일과 일치하는데, 이 날은 베트남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그야말로 그는 전설이 되었다.
4 비판
그래도 이 뛰어난 먼치킨에게도 비판은 따른다. 첫번째는 그 유명한 토지개혁. 북베트남에서 토지 개혁을 무리하게 이끌다가 반발하여 저항군까지 이룬 이들을 철저하게 뭉갠 일이다. 이 와중에 약 5만에서 10만에 이르는 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결국 80만이 넘는 이들이 남베트남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더 막장이라서 온갖 부정부패를 실천하면서 그도 토지개혁을 개판으로 이끌어서 남베트남으로 온 북베트남 유지들은 적어도 응오딘지엠은 호찌민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리고 딱 예언 그 한숨과 한탄이 들어맞았다.
사실 이 문제에는 좀더 깊숙한 내면의 문제가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도움을 받았기에, 베트남에는 중국 고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문제는 이 때 중국은 대약진 운동 기간인데다 이 양반들이 마오주의에 물든 스페인 이단심문관급 인물들이었다는 것. 전쟁의 원조로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이용해 베트남에도 중국식 토지개혁과 사상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소리높여 거부하기 힘든 호찌민 등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일. 당시 베트남 공산당 지도자이던 쯔엉찐(Trường Chinh, 長征)의 지도 하에 이게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과는… 북베트남에 오랫동안 공헌해온 베트민 고참 퇴역병부터 베트민에 꾸준히 협력해온 지주들까지 전부 쓸어버린 말 그대로의 중국식 개혁 뒤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상당한 실용주의자였던 호찌민은 몇 차례나 이에 대해 경계했지만 북베트남 지도부는 호 아저씨의 조언을 씹었다. 사실 호찌민이 집단지도체제를 선호하기도 했고, 말년에 들면서 외교분야 이외의 실권을 차츰 놓아주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불쌍할 지경. 이 토지개혁의 참상은 베트남 지도부들이 토지개혁을 경제개혁만이 아니라 반대파 축출로써의 기능을 이용하려다 어딘가 삐끗나서 처참한 사태에 이른 것. 중국인 고문들은 이것을 진정시킬 생각은 않고 오히려 부채질했다 ㄷㄷ; 물귀신 작전 우리만 퇴보할 수 없다 심지어는 호찌민도 반대파 축출로써의 이 기능에 일부 동의하기도 했다.[15] 때 마침 모스크바 제20차 대회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됨에 따라 스탈린이 했던 토지개혁의 당위성도 사라져버리고 중국도 더 이상 토지개혁을 하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이 일은 멈추게 되었다. 그 후 베트남 총지도부 4명이 총사퇴, 게다가 당서기인 쯔엉찐마저 물러나는 대실패로 끝나게 된다. 호찌민조차도 자신이 민주주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호찌민의 위신은 이때 크게 손상을 입었다. 물론 이는 쯔엉찐의 실책이긴 하나 호찌민도 비판을 듣는데, 호찌민은 주석일 뿐이라 정치적 권한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며 호찌민이 뭐라 하든 무시해도 원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호찌민의 조언이 통한 건 전부 "호 아저씨는 옳다" 라는 전통에 의한 것이였는데, 쯔엉찐은 전통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였다. 그러니 호찌민을 비난할 때는 정치적 생명을 걸 정도로 강도높은 반대를 하지 않은 것, 토지개혁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을 비난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북베트남 내에서도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관대함 없이 진행되었다. 이건 사실 호찌민의 잘못이기보다는 당대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거의 필수적으로 진행되었던 일이었으니 무조건 흑역사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물론 공산주의 하의 사상탄압의 한계로는 볼 수 있겠지만.
가톨릭 교도들을 탄압한 것도 문제였다. 이미 베트남의 가톨릭은 유서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베트민의 투쟁 시절부터 호찌민을 지지하고 응원하던 세력이었지만, 북베트남과 비가톨릭 베트남인들은 가톨릭 교도들이 매국노라는 선입견 하에 그들을 매우 박해하고 차별했다. 순전히 편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된 가톨릭 교도들은 크게 분노했고 북베트남의 150만명의 가톨릭 교도들 중에서 60만명이 월남하였다.
호찌민 스스로는 인자하고 관대한 성품을 가졌지만, 한참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던 시절 부하들의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동에는 별다른 터치가 없었다고 한다. 역시 보스의 딜레마(...) 결국 북베트남 정권의 학살의 최종적 책임은 그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이 당시 호찌민은 너무 늙어서 늘 멍하고 죽은듯이 잠자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전쟁이 어떻게 되가고 있냐고 묻는 게 고작이였는데 베트남엔 곧 죽을 노인에게 부하들의 행동을 말할 정도로 눈치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잘못은 절대 아니지만, 남베트남인과 북베트남인 간의 갈등은 꽤 심하다. 북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인들을 보면서 저 돈만 아는 박쥐같은 앞잡이놈들이라고 하고,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인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 하면서 서로 경멸한다. 남베트남이 적화통일되면서 대대적인 학살과 보복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민족주의자인 호찌민이었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의 독립이었다. 또한 베트남 공산주의 행동강령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찍이 하였다. 얼핏 봐도 캄보디아 민족과 베트남 민족은 전혀 딴판인데, 호찌민 입장에서는 동일하게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아왔으니 베트남이 큰 형으로서 같이 도와줘서 독립해서 함께 잘 살자(그러니 내 말 들어)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프랑스와 미국을 무찔러내고 내친김에 중국까지 따끔하게 혼내준 베트남은 위풍당당해져서 단숨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깡패 패권국가가 되었다. 한마디로 호랑이가 없어진 동굴에서는 여우가 왕이 되어버린 셈. 근데 그 호랑이를 여우가 내쫓긴 했다.
물론 호찌민 사후에 일어난 한참 뒤의 사태이긴 하지만,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점령해서 90년대까지 수년간 캄보디아에 주둔하게 된다. 이는 현 캄보디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된다. 이는 서방 세계로부터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니들은 그렇게 제국주의라며 프랑스랑 미국을 대차게 까내리면서 독립한다 아우성 치더니, 우리가 떠나고 나니 니들도 니들보다 약한 놈들한테 하는 짓이 똑같네. 우리한테 못된 것만 배웠나? 라는 것. 물론 이런 비난도 코웃음칠만한게 이런 주장하던 프랑스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은 이전과 다르다고 해도 아프리카 및 여러 나라에서 그 당시 거저 집어먹던 무수한 경제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현지인에 대한 빈부격차에 이바지하기 때문... 누구건 지들이 하는 짓은 더럽다고 안하고 남이 하는 것만 보고 더 욕하지
그리고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논리로만 따질 수는 없는 것이, 당시 캄보디아의 상황과 캄보디아의 선제공격과 베트남인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했던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16]. 폴 포트와 킬링필드의 막장성은 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부정적인 결과를 남기고 갔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어도 모든 책임을 베트남에게만 돌리기는 힘들다[17]. 그리고 그 와중에 미국은 진영논리에 따라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고 있었으니 이뭐병...
그리고 일부에서는 현대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이 극단적 이상주의자인 호찌민의 무조건적인 공산화 경제정책과 친중전략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호찌민의 친중은 공산주의자인 호찌민 입장으로선 프랑스, 미국 등과 싸우기 위해 필연적인 측면도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프랑스와 중국[18]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에서라도 호찌민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호찌민이 미국의 힘을 잘못 평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호찌민 자체도 전술했듯이 극단적 공산주의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며, 베트남의 경제정책 실패를 호찌민의 잘못된 이상주의 탓이라 주장하는 것은 베트남의 주석이 타 공산국가와 같은 독재자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주석으로서 호찌민의 역할은 주로 외교분야와 대외적 이미지 담당의 측면이 강했으며, 주요 정책들은 쯔엉찐이나 레주언과 같은 공산당 서기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주석인 호찌민을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호찌민의 지시를 받는 위치는 아니었으며[19] 이들이 꼭 호찌민의 측근인 것도 아니었고, 특히 급격한 공산주의화 정책을 펼친 레주언은 자신을 호찌민에 맞먹는 이미지로 만들려 하다 실패하기도 했다.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에 호찌민의 책임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베트남 주석과 공산당의 분리 없이 호찌민의 이상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호찌민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 공산권을 공부 할 때 마다 강조 되는 항목이지만, 대부분 공산권의 국가들은 북한 김씨 왕조가 아니다. 일반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은 당의 독재를 원칙으로 하고, 이는 개인의 독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물건이다. 천하의 그 레닌도 막상 정치국 내에서는 죽을때 까지 마음대로 다른 정치국위원들을 마음대로 찍어누르거나 하지 못했고, 중공이나 소련도 스탈린, 마오쩌둥 시절 중에서도 완전한 권력 장악 까지 일정 부분 당내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했으며, 저런 전체주의적 독재자들이 죽어 사라진 이후 다시 과두 정치, 집단적 당의 독재 체제로 돌아갔다. 북베트남은 이 와중에서도 솔직히 하노이 정권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을 시점인 1950년대, 60년대에 들어서는 호찌민도 노인이었기 때문에 상징적 국가 원수 역할이 더 강했지, 실무 통치는 쯔엉찐, 레주언, 레둑토 같은 정치국의 고위 관료들 중심으로 돌아갔고, 산하 조직인 베트콩의 경우 쩐반짜, 응웬치짠, 팜반둥 같은 인민혁명당 중앙 행정 위원회 (미국측 자료에서는 그냥 남베트남 중앙 위원회, 줄여서 COSVN으로 일컬는다) 지도부가 하노이 정치국의 지령을 받아가며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5 평가
호찌민에 관한 논란 중 하나는 과연 호찌민이 민족주의자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지 여부였다. 실제로 한 동료에게 호찌민이 고백하기를 자신이 공산주의가 된 이유는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자신을 도와준 자들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들 뿐이어서 였다고 한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프랑스 좌파들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반대했고 해외 식민지 출신의 타민족을 배척하는 행동에 반대했다. 프랑스에 막 도착한 젊은 호찌민 입장에서는 먼저 손을 내미는 프랑스 좌파들의 도움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코민테른 요원이기까지 했으니 호찌민은 분명 공산주의자이긴 했다. 그래도 호찌민은 좀더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신경제정책 등을 펼치기도 했던 레닌의 빠돌이였고 많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20] 공산주의의 이론적인 이해가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21] 게다가 밑의 명언에서도 나오는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라는 말이나 일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만큼 호찌민은 꼭 공산주의자이다 민족주의자이다 나누기 보다는 그 둘 모두로 바라보는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적절히 버무린 점, 그리고 제2세계 국가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운영 시도를 한 점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비견되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호찌민은 실용주의자기도 했는데, 이는 일생 줄곧 도덕적인 면모를 지켜나가면서도 혁명을 위해서라면 여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던지, 그런 와중에서도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던지, 혹은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 공산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사적 소유를 크게 제한하지 않으며 신성한 권리라고 언급하는 등 여러모로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볼 수도 있지만, 유명한 공산주의자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과 겹쳐서 생각해본다면 이는 공산주의에 구애받지 않고 호찌민이 베트남 민족 모두를 포용한 정부를 세우려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교계의 그랜드슬래머였다.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고, 중국의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 (비록 걷어찼지만) 국치의 적인 프랑스에 손을 내밀고, 미국에게 호의 섞인 제스쳐를 보내기도 하며[22], 감정이 악화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며 어느 한 나라와도 크게 적을 만들지 않았다.
호찌민 사후 공산당이 베트남을 급격히 공산화시키며 나타난 경제적인 폐해와, 팽창주의와 급격히 친소련으로 기욺에 따라 일어나게 된 중월전쟁까지, 호찌민이라는 지도자 하나가 사망함으로써 일어난 베트남의 변화는 결코 좋은 것이라 말하기 힘들다. 이후 베트남의 개혁주의자들이 괜히 '호 아저씨라면 오히려 좀 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비록 말년에 외교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많은 실권을 잃어버렸지만, 베트남의 국부로써 미국인들의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이미지로 베트남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인물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윗동네의 같은 공산주의자였던 마오쩌둥은 오늘날 중국에서조차 부분적인 비판은 받고 있지만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광개토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급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 가거나 베트남인이 있는 곳에서 호찌민을 까내리는 것은 반드시 삼가하도록 하자. 당신의 신상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쉬운 이해를 위해 비유하자면 한국인 앞에서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 혹은 이순신, 안중근을 대놓고 까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근데 깔 게 없다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든 출장을 가든, 베트남 공항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온거리 온건물 동서남북 어디에 있건 온통 호찌민의 인자한 초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지겹도록 보게 된다. 베트남의 따스한 아침햇살을 맞이함과 동시에 당신은 언제나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고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예외는 없다. 진정한 국민적 스타가 호찌민이다. 이는 베트남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큰 정신적 자산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런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반면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북베트남에 동화되지 않고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다.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 사는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대부분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베트남전 전후로 도망쳐 나오거나, 이후 보트피플로 탈출한 사람들의 후예이기 때문. 실제로 1999년 한 젊은 베트남인이 미국의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리틀 사이공에 있는 그의 비디오 가게에 호찌민의 사진을 걸었다가 베트남계 이민자들의 거의 테러에 가까운 분노가 섞인 항의를 받았을 정도.## 한국 공중파 뉴스에서도 해외토픽 부분에 당시 상황이 나왔는데, 중장년 베트남계 이민자가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경찰이 출동하면서 말리자 "호찌민의 사진을 철거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왔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이 규모가 큰 베트남계 이민자 사회가 형성된 곳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보트 피플로서 망명해 온 구세대 이민자들과 90년대에 서방과 베트남의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유학이든, 사업이든 정상적으로 이민을 온 전후 세대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 크다. 전자의 경우 당연히 통일 베트남에 의해 고향에서 쫒겨 나온거니 호찌민을 좋게 생각 할 수가 없으나, 국교 정상화 이후 떳떳하게 해외로 나온, 북베트남이나 통일 베트남의 교육을 받은 베트남인들에게 있어 호찌민은 당연히 국부이기 때문이다.[23]
6 명언
- "강물은 둘로 나눌 수 없다."
- "어려운 것이란 없다. 단지 흔들리는 마음이 두려울 뿐. 산을 파고 바다를 메울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할 수 있다."
-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
- "우리가 당신들을 1명 죽일 때 당신들은 우리 10명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지치는 쪽은 당신들이 될 것이다."[24]
- "내 안에 변하지 않는 한 가지로 세상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
-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25]
7 이야깃거리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앉아있는 사람이 박헌영이다. 뒷줄 맨 오른쪽이 호찌민.
호찌민이 1929년 소련에서 국제레닌대학교에 유학했을 시절에 박헌영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았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찌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그가 크게 감명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근거는 없다. 심지어 목민심서가 호찌민 시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며, 박물관에 있다는 말[26]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90년대 KBS-1에서 베트남 현지 취재를 가서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호찌민의 서재에 목민심서 책이 있었던 걸 보여준 적이 있으며, 서재 담당이 호찌민이 즐겨봤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2006년 호찌민 관련 유품이 12만점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목민심서가 없다는 기사가 나왔다.(...)#
현재 바딘 광장에 있는 호찌민 묘소는 하절기에는 07:30~10:30, 동절기에는 08:00~11:00에만 출입이 가능하며 및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휴관한다. 그리고 매년 10월에는 호찌민 시신의 방부 처리를 위해 폐관한다. 호찌민 묘소 구내에서는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의 휴대 및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만일 호찌민 묘소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휴대전화를 제외한 모든 전자·통신 기기를 내놓고 들어가야 한다. 호찌민 묘소에는 흰색 제복을 입은 경비병이 4인 1조로 시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입구 및 출구에 경비 근무를 서는 경비병을 볼 수 있다. 호찌민 묘소 내부에서는 휴대전화는 진동 혹은 무음으로 전환해야 하고 절대로 큰 소리로 대화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참배시에 유의하자. 참배를 마치고 반대편으로 나오면 입구에서 맡겨 두었던 전자·통신 기기를 찾아갈 수 있다...사실은 호찌민의 유언에 따라 북부,동부,남부의 화장되어 나눠져 지고 방문록 정도를 적을수 있고 나무를 심을수 있게 해 후일 베트남의 도움이 되어야 했으나,베트남 국민들은 유언에 따르지 않고 전국에서 온갖 재려를 모아 지었다 한다.그리고 그 옆에 호찌민 박물관과 한 기둥 사원이 있다. 호찌민 박물관은 어른 40000동 어린이는 무료 입장이며,들어갈때 짐을 사물함의 넣거나 공항에서 볼수 있는 x-ray를 통과해야한다. 공항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한기둥 사원은 일주사로도 불리며 한기둥 사원은 말그대로 한기둥 인데 자세히 보면 크기가 애매하다...기둥 몇개를 합친 크기
한대수가 2002년 11월 14일에 발매한 앨범 '고민'에 수록된 곡 중에 같은 이름(호찌민)을 가진 곡이 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호찌민이라는 사람을 알려주는 형식. 한대수의 독특한 랩과 강렬한 전주가 들어볼만한 곡이다.
여담으로 호찌민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며 친필 사인을 요청했는데 그가 사인을 받아들고 돌아간 뒤 스탈린은 갑자기 "그 작자, 태도가 수상해."라면서 KGB에게 자기 사인을 도로 훔쳐오도록 시켰다. 이후 사인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호찌민은 소지품을 모두 뒤지며 매우 당황했다고 하는데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은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한다. 쪼… 쪼잔해서 눈물이 나올거 같아….
창작물에서는 80년대 중후반[27]에 쓰여진 어떤 동화에서는 악인은 아니지만 공산국가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악역으로 나오기도 했다. 내용은 세종대왕과 로마 제국의 네로가 달리기를 하는 내용인데,[28] 중간에 세종대왕을 가로막는 배역으로 등장. 등장 부분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지구에서 온 지 며칠 안 되오. 호 지명[29][30] 이라고 불러주오. 오자마자 충고를 해서 안 됐지만 네로 형님과 경쟁을 그만 두란 말이오. 고집을 부릴 때가 따로 있지 어쩌자고 이러우?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줄 것이고 감투가 필요하다면 감투를 줄 테니 적당히 타협으로 해봅시다."
참고로 이 장면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칭기즈 칸도 같이 등장한다. 물론 악역으로(…). 그 밖에 등장하는 악역으로는 클레오파트라[31], 히틀러, 스탈린 등이 있다. 네로가 이들을 매수했다는 설정.
그 밖에도 1988~1990년까지 월간 보물섬에 연재된 이우정 만화 맹코상사에선 은빛여우 민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베트콩 지도자가 영락없이 호찌민이다. 이 만화에선 그냥 악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하튼 이 시절까지 호찌민에 대하여 한국에선 무조건 부정적이었었다.
'메이드 인 베트남'이라는 소설에서는 베트남의 운동화 공장의 노동자들[32]이 "호찌민 아저씨도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거야!"라며 파업을 준비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물론 현실문제는 현실문제인 거고 호찌민이라면 분명 이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 ↑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전 원인이 내외부의 방해 속에서 남베트남 따위를 지원해서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이라는 먼치킨 듀오를 상대했다는 것이다. 이중 단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베트남 전쟁의 결과는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을 것이다.
- ↑ 박노자의 서적에는 그가 지주 출신이라고 나온다.
- ↑ THE MAN WHO MADE A NATION HO CHI MINH.(CRPH) 2000년.
- ↑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일본을 무척 경계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이 프랑스를 몰아내고 잠깐 베트남을 차지할 당시 많은 베트남인이 같은 아시아인으로 기뻐하자 그걸 어리석다고 비난하면서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아 행복하다고 하던가?"하며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수하들과 측근들을 꾸짖었다. 그리고 오래 안 가 본색을 드러난 일본에 대항하여 베트민을 조직하여 맞섰다. 처음에 일본을 환영하던 베트남은 일본의 수탈로 200만명이 굶주려 죽으면서 호찌민이 제대로 본 걸 뒤늦게나마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 ↑ 앞의 리투이나 호찌민의 이름은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가명이었다. 이 당시까지도 호찌민은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 ↑ 자신이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서, 단지 베트남의 오랜 독립운동가로만 소개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호찌민의 신비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 ↑ 그래도 호찌민은 자신이 폐위시킨 이 황제를 끝까지 존중해 주었다. 그가 폐위된 후에도 언제나 폐하라 부르며 존대를 했으며 많은 돈을 생활비로 계속 지급해주기도 했다. 폭군은 아니지만 바오다이 항목을 보면 불쌍하다느니 가엾게 볼 수만은 없다... 허수아비 신세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좌절감에 빠진 비운의 군주이긴 하다.
- ↑ 서경석 장군의 월남전 참전(당시 초급장교) 수기인 '전투감각'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몸에 불이 붙은 베트콩이 죽기 전에 "호찌민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공산권 특유의 개인숭배 징조는 이미 있었던 셈.
- ↑ 현재 베트남 정부 정규 교육과정에서는 호찌민을 성인화 하여 자식을 가지지 않은 이유로써 마오쩌둥과 같은 일당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치지만 현실은...
- ↑ 프랑스의 허수아비이던 바오다이 황제나 라이벌(?) 응오딘지엠와 비교가 된다. 바오다이는 금빛 잔으로 술을 즐겨마시며 프랑스가 물러나자 "이제 짐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 인물이다. 물론 허수아비로서 좌절하며 한 말이기도 하지만...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내세우지만 되려 그에게 퇴위당해 프랑스로 망명해 그동안 숨겨둔 돈으로 마음껏 살면서 1997년까지 84살 천수를 누렸다. 물론 바오다이 항목을 보면 그도 그럴 이유가 있긴 했지만 결론은 암군으로서 욕을 먹고 있다.
- ↑ 참고 서적 '호찌민과 시클로-이지상 베트남 여행기'.
- ↑ 생각해보라. 살면서 술이나 담배만 하고 다른 건 일체 안하는데 이건 현대 사회에선 거의 성인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 당시 담배가 비싸다고 해도 웬만한 중,하층 단계의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였다.
- ↑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이렇게 대단히 배려적인 지도자는 드물다
대한민국의 높으신 분들도 아셔야 할 듯... 사단장이 부대를 방문하면? 국무총리가 설날에 gop에 방문한다면? - ↑ 실제로 호찌민은 프랑스인이나 미국인들 역시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제국주의자들이 나쁜 것이지 일반 프랑스인이나 미국인들은 착하다면서. 오오 대인배 오오… 그래도 어떤 프랑스 관료가 인도차이나 전쟁 직전 프랑스와의 관계가 몹시 악화될 당시 베트남에서 자꾸 미적거리자, 나는 프랑스인을 꽤나 좋게 생각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그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여하튼 대인배. 실제로 프랑스인 중에도 친구가 있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북베트남/베트콩 정보부가 아직 기밀 해제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미국·유럽 현지의 대학가 중심 반전 운동 세력과 접촉을 하며 반전 여론 강화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거의 확실한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도의적으로 '우리의 투쟁의 상대는 일반 미국 인민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이다'라는 식으로 유화적인 선전을 했다. 애초에 북베트남 당국과 민족 해방전선은 문화적으로 선비와 글로 된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가 짙은 곳이고, 공산측 지도부도 국제 동향에 빠삭한 엘리트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폭력 투쟁을 할 땐 하더라도 대외 선전에서 깔끔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 ↑ 물론 그 와중에도 토지개혁의 폭력성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긴 했지만. 본인은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편이었다. 다만 극단적으로 흘러가기 쉽고 우방국과 동지 제스처를 취해야하는 공산국가의 내외적 구조와 특성상...
- ↑ 이건 굉장히 중요한 논점인게, 캄보디아가 국내의 베트남인을 학살하고 베트남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선제공격한 쪽이 캄보디아이니 무슨 짓을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말할 일은 아니지만, 상대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을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비유하는 것은 더욱 말도 안 되는 억지다. 해외 거주 국민이 학살당하고 국경의 마을 2개가 초토화되었는데 그에 대응하는 것(물론 대응이 통상적인 국경분쟁 수준을 넘기는 했지만)이 침략행위라면, 자국민의 죽음을 방치해야 침략자라는 오명을 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가?
- ↑ 그리고 사실 베트남군의 주둔이 캄보디아의 정국을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든 것이, 크메르 루주와 폴 포트정권이 무너진 계기가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이었다. 이건 차라리 캄보디아 정국의 안정과 캄보디아인의 행복에 기여했다고 말하는게 옳을 정도. 물론 크메르 루주의 만행이 베트남의 패권주의적 행태를 전적으로 옹호할 근거는 되지 못하겠으나, 폴 포트 정권을 몰아낸 건 정말 백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 ↑ 물론 베트남 독립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중국 공산당 역시 베트남에게는 충분히 위협으로 다가왔다. 베트남은 친중이라기보단 친소에 가까운 공산국가였으며, 호찌민 생전에야 전쟁 중이기도 하고 해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호찌민 사후엔 얄짤없었다.
- ↑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쯔엉찐의 토지개혁이 그렇다.
- ↑ 심지어는 같은 동지들에게서도
- ↑ 다만 공산권 최악의 지도자로 꼽히는 마오쩌둥과 김일성, 폴 포트의 예도 있듯이,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 ↑ 물론 서유럽에서 프랑스와의 연대를 꿈꾸던 미국에 의해 산뜻히 씹혔다.
- ↑ 90년대 이후 많은 수의 베트남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원래 이민자들의 도시이며 베트남계 이민자 공동체도 큰 뉴욕에 정착하였으나, 이런 저런 문제로 이전부터 뉴욕에 정착해 있었던 기존 이민자 사회의 텃세 때문에 위치적으로 가까운 필라델피아로 내려가서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필라델피아에는 상당한 규모의 베트남계 공동체가 생겼다.
- ↑ 베트남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소장에게 했던 말. 그리고 그 말이 현실이 되었다.
- ↑ 일본군이 프랑스를 몰아내고 베트남을 점령했을 때 "그래도 같은 동양인이니까 이제 살판 났구나."하고 일본군을 환영하던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으면서.
일본은 탈아입구를 실천 중이었으니 동양이 아니다.일본의 피해자 행세에서 나오듯 호찌민이 제대로 보고 미래를 예측한 거였다. 일본의 겨우 몇 년 지배에 200만에 달하는 베트남인이 굶어죽고 "차라리 프랑스 식민 지배 때가 더 좋았다!"라며 엄청 이를 갈며 저항했으니...그 짧은 시간 내에 그렇게 욕을 처먹기도 쉽지 않다. 명불허전 일제.동남아 전체가 태국을 빼면 구미권 국가의 식민지였고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웠으며 그 이전에도 아시아주의같은 것이 있었기에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환영한 것을 이상하게 볼 수는 없다.그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호치민이 먼치킨이었고 일본이 개자식이었을 뿐 - ↑ 출처 : 박헌영 평전
- ↑ 초판에서 읍니다를 쓰던 시절이니 적어도 89년 이전. 냉전 끝물이다.
- ↑ 네로는 워낙 뚱뚱해서 키와 배의 둘레가 똑같이 1미터 65센티라고 하고, 세종대왕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계속해서 한글 연구를 몹시 했기 때문에 홀쭉이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뭔가 고증이 잘못된 것 같지만 넘어가자. - ↑ 또는 중국 발음인 후 즈밍이라고 부르곤 했다. 80년대 후반 영화 플래툰이 국내 공중파 방영할 당시에도 미군들이 후 즈밍의 졸개들이라고 북베트남군을 까는 대사로 번역했다.
- ↑ 여기서 성과 이름을 띄어서 썼는데, 이는 1988년 맞춤법 및 띄어쓰기의 개정되기 전의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현재는 남궁, 동방, 선우, 황보 등과 같이 성이 두 글자인 경우 이를 구별하기 위해 띄어쓰기하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나 대부분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게 되어 있다.
- ↑ 레이스 초반에 세종대왕을 유혹한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가 운다! - ↑ 전부 미성년자. 거기다 작업 환경은 노동자법 생기기 이전의 유럽 수준.
- ↑ 주석을 제외하면 약 850 페이지. 그래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