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오딘지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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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어: Ngô Ðình Diệm [1]
한자: 吳廷琰(오정염)
(생몰년:1901년 1월 3일 ~ 1963년 11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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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금은 사라진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으로, 실정과 부정부패로 무능독재자의 대명사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2 업적

베트남 쿠앙빈 출신으로 1933년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의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황제가 프랑스와 타협하려는 것에 반대, 1949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1954년, 디엔비엔푸 함락으로 프랑스 패배가 기정사실화 되자 다시금 미국과 가톨릭 세력, 민족주의 진영의 지지를 받으며 귀국, 바오다이에게 전권 총리로 임명되어 권력의 톱에 오른다. 그리고 1955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선거 쿠데타로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고 국가원수인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53년 9월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을 받았다. 반공이라서 받은 것일뿐...

취임 초기에는 바오다이가 경찰권을 팔아넘기고 사실상 친위부대이자 권력 집단으로 세를 과시했던 빙 수옌(Bình Xuyên, 平川) 갱단을 소탕(내전급으로 군대를 보내 전투를 벌여가며 소탕)하고 군벌화한 불교도 세력을 토벌하여 치안을 안정시켰고 북베트남의 토지개혁[2]과 종교탄압 등으로 생긴 80만이 넘는 탈북난민들을 무사히 재정착시키는데 성공해 대내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3 비판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위의 업적을 덮고도 남는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서 남베트남을 망하게 만들었다. 그의 죽음에 기뻐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사지가 찢겨 죽은 끔살이라는 루머가 한동안 돌 정도로 기뻐했다.

3.1 친족 비리

폭력단과 군벌을 토벌한 정치 공백에 자기 친인척들을 모조리 채워넣고는 베트콩 세력에 대비한 것이라 둘러댔다. 큰 형은 대주교, 큰 동생은 정보부장과 군 특수부대 지휘관, 작은 동생은 주영 대사, 동생 처삼촌 둘이 외무장관대법원장, 동생 처제중부지역 군사령관, 동생 장인주미 대사, 동생 장모UN 대사, 조카사위가 국방장관이었다. 한마디로 남베트남 전체를 자기 일가의 사유물로 만든 셈이다.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3]

3.2 종교 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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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엠의 제수(동생 응오디누의 아내)인 쩐레쑤언. 디엠이 독신주의자였기 때문에, 제수인 쑤언이 퍼스트레이디 역을 했는데, 이 여자가 무개념이라서 베트콩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4]

응오딘지엠 자신과 지주들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천주교를 옹호하고 불교를 탄압하였다.[5] 이에 항거하여 나온것이 그 유명한 승려 틱광둑(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의 소신공양이다. 참고로 이 때 응오딘뉴의 아내인 쩐레쑤언(陳麗春)바베큐 운운하며 정신나간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때 한 주옥같은 망언은..."저런 것은 단순한 인간 바베큐야. 승려가 한 명 바베큐가 되었을뿐이지, 서구화에 항의하는데 미국제 가솔린을 쓰고있으니 이건 앞뒤가 안맞아."(...) 그것도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도 당당하게 말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뭐 저런 정신나간 여자가 있어?" 라며 어이없어했고 미국 보수파들도 스스로 베트남 반공세력을 좀먹게 한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위에 나온대로 친척들을 낙하산으로 고위관직을 차지하며 정계에서 큰 힘을 발휘하던 쩐레수언은 마담 뉴라는 비아냥적인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고 미국이나 유럽에선 드래곤 레이디[6]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래도 저런 망언이 계기가 되어 전국민적 봉기가 일어났고, 미국도 답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응오딘지엠 정권을 포기하게 된다.

국가관직에는 친인척과 가톨릭 관련자들만 넣었으니 이것이 부패의 기본이 되었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여 농민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저항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63년 자신이 직접 장군으로 임명한 즈엉반민(楊文明) 장군(소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은 무너지고 아우 응오딘뉴(吳廷瑈 1910~1963)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물론 군부는 그들이 탈출 중에 사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양 손이 묶여 있고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전형적인 처형식 살해를 당했다. 한편 쩐레수언은 해외로 달아나 프랑스,미국,영국같은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87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여담인데 죽기 전에 조국에서 죽고 싶다고 베트남 정부에 애원했지만 "당신은 죽어서도 시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며 거부당했기에 이탈리아 공동묘지에 묻혀졌다.

그러나 이후 권력을 잡은 군부도 대안은 되지 못했고 결국 응오딘지엠의 죽음은 베트남 전쟁을 거쳐 남베트남이 멸망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4 평가

응오딘지엠은 먼치킨 호찌민과 비교하면 능력이 딸린다는 평이 많으나 사실 능력이 뛰어난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1945년 9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나라 만들기에 힘을 합치자고 손을 내밀었을 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엠 개인은 청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형제를 비롯한 측근들이 저지른 부정비리가 너무 많았다.

참고로 이 시기 응오딘지엠 일가의 부정부패는 도저히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는지라 남베트남이 공산주의자들의 화전양면전술과 베트남판 종북주의자들의 내부 중상으로 망했다는 주장을 하는 반공세력들조차도 절대 실드를 쳐주지 않는다. 물론 이들도 근본적인 멸망 원인은 공산주의자들과 그 프락치. 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와 별도로 남베트남 지배층이 얼마나 썩었으며 얼마나 답이 없는 집단이었으면 국민들이 아예 나라에 등 돌리고 외면했겠느냐고 말할 정도. 한국에서 반공세력이 다른 우익 제3세계처럼 단순 수구 반동이 아닌 기득권 내 개혁파 혹은 반기득권파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역으로 저렇게 썩으면 한국도 월남꼴 난다는 사실을 이들이 자각해서다. 역설적이지만 한국 보수의 개혁과 최소한의 도덕성 유지를 간접적으로 도운 셈.

물론 80년대만 해도 호치민은 그저 빨갱이로 치던 냉전 시절 한국에선 응오딘지엠에 대하여 그저 반공 지도자, 또는 민주국가인 남베트남 지도자로서 초중고 교과서로 간략하게 소개했었다. 위에 나온대로 이승만 정부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까지 받은 반공 지도자가 이런 막장이라는 건 감추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하지만 당시에도 응오딘지엠을 까는 구도 자체는 좌우 모두가 일치했고, 요즘 나오는 베트남사 서적에는 그의 실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부패했고 자기 권력에 도취해서 폭정을 저지르다 망한 독재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정통성과 명분 슈퍼갑으로 무장했던 월맹을 상대로 미국이 남베트남의 지도자로 무게를 실어 줄 만한 독자적인 인망과 카리스마, 베트남 내부의 인지도를 가졌으면서도 일단 반불 투쟁에 참여한 경력도 있었던, 소위 미국이 원했던 반불 경력이 있는 반공 민족주의 정치인은 지엠 밖에 없었다[7]. 독재와 부정부패와는 별개로 자체적인 정치적 수완도 상당했고, 미국 내에 미시건 대학 고문 그룹을 중심으로 커넥션도 있어 나름 독자적인 정책을 펼치며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닌 자신만의 정치를 할 역량이 있었던 남베트남 정치인은 지엠 밖에 없었음으로 지엠이 제거 된 이후 남베트남 정국은 오히려 더 악화 된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더욱 더 고무 받은 베트콩은 64년, 65년 쯤에 들어서는 아예 사이공 바로 앞의 동호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 레인저 대대 3개와 정규군 보병 연대 3개를 개박살내며 월남 적화 통일을 60년대 중반에 거의 이룩할 뻔 한다. 이대로 두면 월맹이 직접적으로 나설 것도 없이 베트콩 만으로도 남베트남이 몰락할거 같은 기세여서 이 시점 이후로 미국은 직접적이고 대대적인 전면전에 개입하게 되는데, 막상 이 과정에서 남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지키는 건 미군이 한다 해도 실재로 남베트남 정부를 구성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하며 현지 인민들을 남베트남이란 국가 안으로 끌어 올 만한 남베트남 자체의 자체적인 정치적 인적 자원은 지엠이 실질적으로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지엠이 축출 당한 후 남베트남은 수 많은 쿠데타의 수렁을 겪다가 미국이 직접 개입한 이후 아예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감과 독자적 역량이 사라져버리고, 진짜 정직한 미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린다. 파리 평화 회담 같은 자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전시 회담에서도 아예 배제되면서 실질적인 괴뢰국 수준으로 떨어진 남베트남은 결국 지엠 이후 상실한 독자적 정치적 역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 인간 처럼 미군의 보호에 연명하다 75년 북베트남 최후의 공세에 의해 그 기구한 역사를 끝마치게 되었다.
  1. 영어권에는 그냥 'Ngo Dinh Diem'으로 쓰고 발음도 영어식으로 '노 딘 디엠'이나 '노 딘 지엠'에 가깝게 읽는다. 이는 베트남식 라틴 문자와 영어권의 라틴 문자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한국에는 예전에 '고 딘 디엠'으로 알려졌는데 이건 ng를 ㄱ으로 읽은 일본책들이 번역 되어서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응우옌은 당시 구옌으로 알려졌다. 단적인 예가 보구엔잡으로 알려진 보응우옌잡이나 을지서적판 은하영웅전설에서 구옌 반 휴로 번역한 응우옌반티에우.
  2. 이 와중에 처형된 지주의 수는 1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다양하다. 주로 한국의 밀덕에 알려진 반공적인 소스는 10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농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한 지역을 완전 장악, 휴전선에 있던 정규군 사단을 동원해 겨우 진압할 정도라 당시 소련이나 중국에서는 호찌민의 정치능력 부족설 까지 대두될 정도였다.
  3. 정확히 말하면 인척은 본인의 인척이 아니라(응오딘지엠은 독신) 동생 응오딘뉴의 아내인 쩐레수언의 일가이다. 뭐 그게 그거긴 하지만.
  4.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오빠가 처형되었기 때문에 반정부세력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심을 표출했는데, 퍼스트레이디로서는 부적절한 언행이었다.
  5. 하지만 위에 나왔듯 불교도 세력이 이미 군벌화 되어있었기 때문에 명분은 있긴 했다.
  6. 절대 좋은 의미에서 붙인 별명이 아니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드래곤=사탄과 같은 존재인지라 한마디로 말해 악마같은 X이라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7. 비록 일제 자체가 파시스트화 되면서 탄압이 극에 달했던 30, 40년대에는 변절 사례가 많았지만 일단 반일도 했으면서 반공 노선을 추구한 우파 민족주의자 자체는 드물지 않았던 해방 후 남한의 사정과는 큰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