傅燮
(? ~ 187)
후한 말의 인물. 자는 남용(南容). 부간의 아버지, 부현의 조부.
북지군 영주현 사람으로 키는 8척이고 용모에 위엄이 있었으며, 본래의 자는 유기(幼起)였지만 공자의 제자인 남용이 시경의 백규을 하루 세 번 읽은 것을 알고 감명받아 남용으로 바꾸었다.
젊었을 때 유관에게 배웠고 효렴으로 두 번 천거되었지만 자신을 천거한 태수가 죽자 부섭은 벼슬을 버리고 슬퍼했으며, 이후 호군사마가 되어 황보숭과 함께 184년에 황건적의 난을 토벌했다. 부섭은 환관을 미워해 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이후 영제가 조충에게 황건적 토벌의 전공을 논하게 하자 부섭을 열후에 봉하지 않아 천하 사람들이 실망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조충이 사람을 시켜 열후에 봉해지기 위해서 뇌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자 거절했으며, 이 때문에 조충은 부섭에게 원한을 품었지만 명성이 두려워 함부로 해를 가하지 못했다. 후에는 봉하지 않는 대신에 안정군 도위가 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고 다시 의랑에 임명되었다.
양주에서 난리가 일어나서 이에 대한 의견을 논하면서 부섭이 최열을 죽여야 한다고 했는데, 상서에서 대신을 모욕했다는 상주가 올라오면서 영제가 부섭에게 그 이유를 묻자 최열은 재상의 몸으로 반란을 평정할 계책을 세우지 않고 땅을 떼어주자고 했다는 등 비판했다. 결국 부섭은 귀인들과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서 한양태수로 임명되어 낙양 바깥으로 쫓겨났으며, 자신을 효렴으로 추천한 전임 한양태수인 범진을 찾아갔고 향리의 사람들은 이를 영예라고 생각했다.
부섭은 백성을 사랑해 강족들도 그의 은정에 항복했고 개간을 해서 40여 진영에서 둔전을 했으며, 187년에 양주에서 백성, 이민족들이 분노해 왕국 등이 저족, 강족과 합쳐 봉기하자 경비에게 군사들을 쉬게 해 덕성을 기르게 하면서 신상필벌을 시행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경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름 4월에 경비가 한수, 왕국 등의 공격으로 패하고 한양성이 포위되어 병사도 적고 양식이 딸렸지만 굳게 성을 지켰으며, 북지의 호인들이 부섭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그들이 일시에 성 밖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부섭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요청했다. 또한 부간이 강족, 호인들의 요구대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덕있는 군주가 나올 때 다시 밖으로 나올 것을 권했지만 군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했다.
창작물에서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강족을 토벌하기 위해 주신과 함께 우익을 담당했으며,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경비, 마등, 주신이 움직였고 부섭은 그들보다도 먼저 움직여서 한 식경 전에 강족을 공격하러 갔지만 자신이 공격한 곳에는 아무도 없고 목책, 깃발만 보여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수의 난이 일어나자 동탁에게 보고하는 전령에 따르면 한수가 한양성을 공격하자 경비가 한양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적도에서 경비와 합류했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