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칠정논변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

1 퇴계와 고봉 사칠논변에 대한 개요

윤리와 사상 선택자들 쌍욕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법과 정치를 선택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가득한 곳
사단칠정논변이란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 사이에서 사단·칠정을 주제로 편지의 왕래를 통해 행하였던 논변을 의미한다. 사칠논변이라고도 칭한다. 이 논변이 전개된 구체적 과정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1]

학술적인 의의 뿐만 아니라 이 토론은 이황과 기대승의 능력과 인품을 설명할 때 잘 쓰이는 사례이기도 하다. 논변을 처음 시작할 당시 기대승은 대과에 급제해 이제 막 관직 생활을 시작한 신인이었던 반면 이황은 이미 성균관 대사성이란 중책을 맡고 있었다. 현대로 비유하면 장관급인 국립대학교의 총장과, 대학 졸업 후 이제 막 임용 시험을 통과해서 일하기 시작한 7~9급 공무원이 1:1로 토론을 벌인 격이다. 그럼에도 체계적이고 심도있는 토론을 진행한 기대승의 능력과, 대사성이란 고위직에 있음에도 기대승을 전혀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고 품위있게 토론을 받아들인 이황의 인품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1 퇴계와 고봉 사칠논변의 시발과 종결

퇴계와 고봉은 두 사람 사이에 사칠 논변이 있기 전, 명종13년 1558년에 만난 적이 있다. 퇴계는 이해 윤 7월에 예안에서 왕의 부름으로 서울에 오고 10월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이달 고봉은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32세의 고봉이 58세의 퇴계, 그의 서울집으로 찾아가 만났다. 『고봉집』의 「연보」에 의하면 바로 이달에 추만 정지운이 고봉에게 「천명도」를 보여주었는데 고봉은 대강만을 논하고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이 「천명도」는 퇴계가 수정한 『천명도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 논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고봉의 퇴계 사칠설에 대한 비판이 여러 경로를 거쳐서 퇴계에게 전해지게 되고, 고봉 비판을 접한 퇴계는 숙고 끝에 고봉의 비판을 일정 부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학설을 수정하여 통지하는 방식으로 먼저 고봉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것이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변의 시작이다. 이른바 퇴·고 사칠논변의 제1서는 서울의 퇴계가 광주의 고봉에게 1559년 1월 5일 써서 보낸 것이다. 그 요지는 “사단의 발은 천리(天理)를 따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아우르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四端之發 順理故無不善 七情之發 兼氣故有善惡로 개정하자는 것이다. 고봉은 이 편지를 2월 18일에 받는다. 고봉은 퇴계의 편지를 받고 이해 3월 5일 답서를 쓴다.

<이렇게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논변이 진행되다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 순간이 오게 된다.> 고봉은 정묘년1567년 1월 24일 퇴계에게 편지를 하였다. 이 편지에서 “「후설」 「총설」 2설을 인가받아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다만 그간에 합상량처가 많으나 감히 경솔하게 논할 수 없으니 뒷날 혹 얼마간 다른 견해가 있게 될 때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퇴계는 3월 18일에 편지를 써 서울의 고봉에게 부쳤는데 여기서 “사칠설의 합상량처에 대해 조만간 깨우쳐 줌을 받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퇴계의 편지를 받고 고봉이 5월 11일 쓴 답서에는 사칠설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고봉이 사칠설에 대한 논의를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기미년 1월에 시작되어 9년 동안 진행된 퇴·고의 사찰논변은 한 매듭을 맺는다.

1.2 퇴계와 고봉 사칠논변의 사상사적 의의

조선 개국 후 약 150년 사이에 역사적 굴곡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세조의 찬탈, 연산군의 무도, 중종의 무신 등으로 참혹한 사화가 연달아 일어나 사기를 크게 헤쳐, 후대로 올수록 가능한 정치 현장에서 벗어나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것이 학문적으로 심도 있는 조선 성리학의 2단계를 여는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다. 평생 동안을 학문에 전념하여, 국내에 이미 보급되어 있는 주자학 관련 서책들을 구입하여, 주렴계, 이정, 장횡거, 소강절, 주자의 저술을 연구하는 유자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나아가 창의적인 자기 학설을 주장하는 데에까지 발전하였다. 화담 서경덕이언적이 그 가운데에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학문적 분위기를 계승하여, 16세기 후반 조선조 학문의 백미를 이루는 것이 다름 아닌 퇴계와 고봉 사이의 사단칠정논변과 우계율곡 사이의 사단칠정논변이다. 우·율 사칠논변은 퇴·고 사칠논변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으로 그 선구는 퇴·고 사칠논변이다.

2 예비적 개념 고찰

2.1 理와 氣 (이와 기)

사단칠정논변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理(이)와 氣(기)의 개념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단과 칠정의 개념보다 이 개념을 우선 알아야 한다. 단순히 이 개념을 추상적 원리로서 이와 형상적 기물로서 기로 생각하면, 논의 곳곳에서 암초에 빠지게 된다.이렇게 극도로 경직된 이분법으로 선유들이 사고하지는 않았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 부터 시작된 다소 폭력적인 형이상과 형이하의 구분을 유학은 피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氣(기)는 작동하는 힘을 일컫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물의 작동은 그것이 비록 추상적으로 보일지라도 기의 개념에 더욱 가깝다. 예컨대 이치를 다룬다고 쉽게 이의 개념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논리학, 법학, 화학, 물리학 등도 기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이지 이를 직접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감기에 들었을 때, 기운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몸을 이끌어가는 힘이 딸린다는 것을 말한다. 아플 때 원리가 부족하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은 이는 힘의 부족 혹은 충전을 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보듯이 기는 '움직이는 힘' 이라는 그 상황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理(이)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한번 보고 넘길 것이 아니라, 논변 전체를 통해서 어렴풋하게 잡히는 이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비유하자면, 이는 움직임 이전에 있는 어떤 바탕과 같은 것이다. 그 바탕이 있어야, 움직임 자체가 이루어질 터가 생긴다. 그렇다고 이와 기가 절대적인 선후 관계는 또 아니다. 왜냐하면, 움직임이 있어야 일면이 아니라 바탕이라 따로이 칭해야 할 것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하게 이와 기가 아울러서 작동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밀히 말하려 하기 시작하면 충분히 논쟁거리가 된다. 그리고 조선 중기 내내 각구쟁론이 있었다. 아예 극단의 주리론처럼 바탕의 움틀거림이 기를 낳아서 떠미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극단의 주기론처럼 바탕은 없고 움직임의 흐름들이 얽히고 풀리면서 세상이 있는데, 다만 이를 쉽게 풀이하려 이를 도입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현대 과학에 푹 젖어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사실 이 없는 기를 사유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예컨대 진화론에 대한 소박한 이해는 생물들이 변화가 창조력에 달려있다기 보다, 환경과 다른 생물 사이에서 점차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즉, 오직 기의 충돌들이 진화를 이끌어온 유일한 힘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소박한 이해로 볼 때는, 각 몸에 내존하면서도 또 공연적인 理에 대한 천착은 생물 진화에 어떤 방향을 설정해내려는 강박처럼 치부해버리기 쉽다. 그리고 그 방향을 적잖이 종교적이라고 비판할 여지도 생긴다. 우리가 유학을 유교라고 할 때도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진화론에 대한 소박한 이해를 벗어나면 다른 시선이 보인다. 진화는 완벽한 생물체를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러한 예는 일일이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다. 생물들의 변화는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어쩔 수 없는 움직임의 법칙에 맞게 진행되었고 지금 부족하더라도 결국에는 그렇게 진행될 것인 그러한 바가 아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개체들의 자기 창조의 노력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단지 효율적으로 흘러가고자 하는 움직이는 힘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하기 짝이 없더라도 자기 창조력에 더 부합하는 것을 선택하여 적응해내면서 존속하기도 하는 것이 생명체이다.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그렇게 볼 때, 생명에는 장구한 진화의 역사 속에서도, 어쩔 때는 그것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언제나 한결같이 자기를 만들어내려는 어떠한 원리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理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보자면, 어떠한 상황에도 얽매이지 않고,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어떠한 근원적인 맹아가 理다. 그리고 그것이 순선한 것이라는 신념이 성선설의 바탕인데, 이는 고봉과 퇴계 모두 공유했던 것으로, 대부분의 유학자들의 신념이기도 했다.

2.2 四端과 七情 (사단과 칠정)

이기와 사단칠정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아래 논변에 대한 해석에 할당했으므로, 여기에서는 가능한 하지 않겠다.

사단과 칠정은 감정의 양태들이다. 사단칠정논변을 4.7논변이라고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에 얽매일 필요는 전혀 없다. 논쟁자들도 이것의 개수를 두고 싸우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학에서 단을,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4가지로, 정을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7가지로 간주하는데, 그것 이상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사단에 대한 공격일 수는 없다. 감정의 양태들을 체계적으로 논구하려 도입한 틀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야 했을까? 모두 다 같은 감정 아닐까? 이것을 주지적 감정과 신체적 감정으로 나누면 일견 이해는 쉬울지 모르겠지만, 오해이다. 생각한 끝에 발휘되므로 사단이고, 즉시 느껴지는 것이므로 칠정이 아니다. 실은 서구 철학은 이성과 오성이니 하면서, 인간의 의식 체계를 이런 식으로 나누는 관습이 있는데, 유학은 그렇지 않다.

유학은 이렇게 지성적인 관점에서 덕을 논하기 보다는 인성적인 측면에서 덕을 논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따지자면, 사단과 칠정 모두 신체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공자는 배우고 때때로 즐기니 즐겁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충돌하게 되는데, 덕이 인성적인 것이라면, 배움을 통해 어떻게 닦을 수 있는가?

유교에서 인성적인 것이 반드시 본성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덕의 근거가 지성이며, 지성의 근거는 본성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는 사실 판단에 대한 어떠한 준거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덕이 본성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덕의 가장 주요한 바탕은 본래 타고난 성품에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유학은 이러한 전거를 강조하지 않는다. 유학은 성품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많은 인간 판단의 근거가 되지만, 본성적인 무엇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품이라는 것은 길러지는 것이라고 유학은 보아왔다. 조선 시대 그토록 교육을 강조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또 조선 왕조가 이상으로 삼은 과거 제도가 본래 응시자격에 신분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차별을 정당화할 만큼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이 있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그밖에도 유학 자체는 여러모로 개방적인 학문이었다. 단, 인간의 욕망이 왜곡시키지 않았더라면.

따라서 그 성품을 어떻게 바르게 길러가느냐가 심학의 과제가 된다. 사단칠정논변의 시작도 이황이 도면화한 심학에 주석을 단 것이 발단이 된 것이었고, 말년에 이황은 이 분야를 집성하고자 열정을 바친다. 그 상세를 여기서 모두 논할 수는 없다.

자, 이렇게 주정적인 것과 주지적인 것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주지적인 것이 결국 인성적인 것을 강조한다면, 남는 것은 의식 자체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라 덕은 배워서 기를 수 있는데, 열심히 배울 때 달라지는 것은 인성 자체라면, 남는 것은 인성부터 인식, 그리고 지성까지 이어지는 한 길의 의식 자체라는 것이다. 서구 철학에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이렇게 본다면 의식과 마음은 같이 쓸 수 있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보고 말하자면, 사단은 깊은 의식에서 발하는 감정이고, 칠정은 얕은 의식에서 발하는 감정이다. 사단이 정념이라면, 칠정은 사념이다. 즉,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욕망을 정념이라 일컫는데, 이는 사단에 해당된다. 이 사단에서 발하되, 무언가를 판단하고 고려하기 위한 생각들을 사념이라 일컫는데, 이것은 칠정에 해당된다.

오해들 하지만 정념과 사념은 결코 처음부터 다른 두 갈래가 아니다. 아무리 철저한 판단이더라도, 그것을 판단해보고자 하는 충동이 있었기에, 행한 것이다. 어떠한 감정도 섞이지 않은 행동은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다. 그러기에 올바른 판단을 하는 사람을 헤아리려면, 올바른 충동을 지닌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사단과 칠정이 의식의 깊이를 일컫는 말이 될 수 있다. 작성중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마다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니, 선왕(先王)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베푸어 두었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채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마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러하니>, 이제 사람들이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언뜻 보게 되면 모두들 겁이 나고 측은지심이 생기는데 그것은 어린 아이의 부모와 친교를 맺기 위해서도 아니요, 동네 사람들과 벗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요, 그 욕하는 소리가 싫어서 그러한 것도 아니다. 이로부터 본다면,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소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들이 이 사단이 있는 것은 그들이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을 가지고 잇으면서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이고 자기의 임금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불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해치는 사람이다. 무릇 나에게 사단이 있는 것을 모두 확충할 줄 안다면, 마치 불이 확충할 수 있다면 온 세상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요, 진실로 확충하지 않는다면 부모를 모시기에도 부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손추상' 제 6장

공도자가 말하기를 “고자는 ‘성(性)에는 선함도 없고, 불선함도 없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은 선할 수도 있고 불선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문왕과 무왕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선을 좋아하였고 유왕과 여왕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포악함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이 선함도 있고 불선함도 있다. 이런 까닭에 요를 임금으로 삼았는데도 상 같은 사람이 있었고 고수를 아버지로 삼았는데도 순 같은 사람이 있었떤 것이요, 주를 형의 아들로 삼고 또 임금으로 삼았는데도 미자 계, 왕자 비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성이 선하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잘못입니까?”가고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그 정(情)이라면 선할 수 있으니 곧 이른바 선이라는 것이다. 저 불선한 것 같은 것은 재질의 잘못이 아니다. 측은지심을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으며 수오지심을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으며 공경지심을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으며, 시비지심을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다. 측은지심은 인이며, 수오지심은 의이며, 공경지심은 예이며, 시비지심은 지이다. 인 의 예 지는 외부로부터 나에게 녹아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디 가지고 있는 것이건만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하면 얻고 놓으면 잃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 사람과 사람의 차이가 서로 두 배, 다섯 배가 되고 계산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은 그의 재질을 다하지 못한 때문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자상' 제 6장

무엇을 인정이라고 하는가? 희, 노, 애, 구, 애, 오, 욕 일곱 가지처럼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잇는 것이다. 무엇을 일러 인의라고 하는가? 부모의 자애로움, 자식의 효성, 형의 어짊, 아우의 공경, 남편의 의로움, 아내의 따름, 어른의 은혜로움, 어린이의 순함, 임금의 인자함, 신하의 충성스러움 등 열 가지를 인의라고 한다. 신의를 강구하고 화복을 닦는 것을 인리라 하며 싸우고 빼앗고 서로 죽이는 것을 인환이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사람의 칠정을 다스리며 십의를 닦으며 신의를 강구하고 화목을 닦으며 사양을 숭상하며 쟁탈을 제거하는 방법에 예를 버리고 무엇을 가지고 그것들을 다스리겠는가? 음식과 남녀에 사람의 큰 욕구가 있는 것이요 사망과 가난과 고통에 사람이 크게 싫어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바람과 싫어함은 마음의 큰 단서인데 사람이 그 마음을 감추는 것은 헤아리거나 잴 수 없으며 아름다움과 추악함도 모두 그 마음속에 있어서 그 얼굴에 나타나지 않으니 한결같이 그런 점을 궁구하려며 예를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란 천지의 덕이자 음양의 교합이자 귀신의 모임이자 오행의 빼어난 기운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양을 잡아 해와 별을 드리우고 땅은 음을 잡아 산천에 기를 통한다. 오행을 사시에 뿌려 그 뿌려진 것이 조화롭게 된 뒤에 달이 생긴다. 이로써 달은 십오일 만에 차고 십오일 만에 이지러진다. 오행의 움직임은 교대로 서로 다하는데 오행 사시 십이원은 순환하여 서로 근본이 된다.

"예기", 예운 편의 칠정

희 노 애 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이다. 중화를 극진하게 하면 천지가 자리 잡고 만물이 생육(生育)된다.

"중용"의 희 노 애 락

3 편지 본문

대개 보내오신 변론에서 “사단은 인 의 예 지의 성에서 발하기 때문에 비록 이 기가 합쳐진 것이기는 하지만 가리켜 말한 바의 것은 이를 주로하고, 칠정은 외물이 그 형기에 접촉이 되어 마음에 감동을 주어 경우에 따라 나오니 그러므로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리켜 말한 바의 것은 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속에 있어서는 순순한 이가 되니 바야흐로 발함에 기에 섞이지 않으며, 칠정은 밖으로 형기에 감촉되어 그 발하는 것이 이의 본체가 아니니, 사단 칠정의 소종래란 것이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몇 마디 말씀은 실로 선생님께서 자득하신 바입니다. 그러므로 한 편 중에 비록 자세히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지만 그 대의는 줄곧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제 어리석은 생각 같으면 이와 다릅니다. 대개 사람의 정은 하나인데 그 정이 되는 소이의 것은 진실로 이(理) 기(氣)를 겸하고 선·악이 있습니다. 다만 맹자께서는 이 기가 묘합한 속에서 나아가셔서 오로지 그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만을 가리키시어 말씀하셨으니 사단이 이것입니다. 자사께서는 이 기가 묘합한 속에서 나아가셔 혼륜하여 말씀하셨으니 정은 진실로 이 기를 겸하고 선 악이 있으니 칠정이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아가 말씀하신 바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사칠 4서)와 함께 보낸 별책 논사단칠정서(論四端七情書)

사단 칠정의 설에 대하여, 전에는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사단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과 칠정은 각각 이 기에 분속하는 것에 의심을 품고, 정의 발은 이 기를 겸하고 선 악이 있는 것인데 그중 사단은 오로지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고 칠정은 참으로 이 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사단을 이에 분속하고 칠정을 기에 분속한다면, 이것은 칠정 중의 이에 해당하는 측면을 도리어 사단이 차지해 버리고, 그렇게 되면 선악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단지 기에서 나온 것처럼 되니, 그러한 논리 속에 의심스러운 곳이 없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반복하여 궁구해 보고서 끝내 부합하지 않는 곳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에 따라서 다시 생각해 보니 곧 저의 지난날의 주장은 상세히 고찰하지 못하고 극진히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맹자께서 사단을 논하시면서 “무릇 나에게 사단이 있는 것을 모두 확출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단이 있어 그것을 확충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란 말이 참으로 타당합니다. 정자께서 칠정을 논하시면서 “情은 세차게 타오를수록 더욱 방탕해져 그 성에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그 정을 단속하여 절도에 맞게한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칠정이 강성하고 더욱 방탕해지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단속하여 절도에 맞게 하려 하였으니, 그렇다면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란 말이 또한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사단 칠정이 각각 이 기에 분속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사단 칠정이라는 이름 붙인 의미에도 참으로 그럴만한 까닭이 있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애당초 사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긴 하지만 이가 본래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바로 천명의 성이고 본연의 체이니, 그렇다면 어찌 이것을 기가 발한 것이라 하여 사단과 다르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보내오신 글에서 “맹자의 喜, 순(舜)의 노(怒), 공자의 애(哀)와 낙(樂)은 바로 기가 이에 따라 발한 것이어서 털끌만큼의 막힘도 없다.”는 말씀과, “각각 소종래가 있다.”는 등의 말씀은 모두 타당치 않으신 듯 합니다. 무릇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화(和)이며 화는 곧 이른바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는 도입니다. 그런데 만약 과연 보내오신 말씀대로라면 언제 어디서나 두루통하는 도 역시 기의 발이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까? 이것 또한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 (사칠8서) 사단칠정후서(四端七情後說)

공의 그 말에 “이의 발이란 오로지 이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기의 발이란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근본은 같으나 말절은 다르다”고 한 것은, 내 의견이 참으로 이 설과 같으니 이른바 “근본이 같다.”는 것이고, 하지만 공이 설로써 마침내 사단 칠정을 결코 이 기에 분속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은 이른바 “말절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일 지난날의 공의 견해와 논의가 지금 보내온 양설처럼 분명하고 티없이 산뜻한 것이었다면 어찌 말절에 다름이 있겠습니까.

퇴계가 고봉에게 답한 편지 (사칠10서)

퇴계의 「논사단칠정 제삼서」: 실제로 써놓기만 하고 고봉에게 부치지 않은 것이다.「」는 고봉이 퇴계에게 실제 편지로 부쳐 논한 것을 옮겨 온 것이다

「천지지성은 비유하자면 하늘에 있는 달이고 기질지성은 비유컨대 물속에 있는 달과 같으니, 달이 비록 하늘에 있고 물속에 있는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달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동일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늘에 있는 달은 달이라 하고 물속에 있는 달은 물이라고 한다면 어찌 이른바 “막힘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이른바 사단 칠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가 기질에 떨어진 뒤의 일로서 마치 물속에 있는 달빛과 흡사한데 칠정은 그 빛에 밝고 어두움이 잇으나 사단은 단지 밝은 것일 뿐입니다., 칠정에 밝고 어두움이 있는 것은 참으로 물의 청 탁 때문이고, 절도에 맞지 않는 사단은 빛은 비록 밝지만 물결의 동요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데 이런 도리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달이 수많은 강에 비침이 어느 강의 달이건 모두 둥글다는 설에 대해서 일찍이 선유가 그러한 논리의 불가함을 논한 것을 본 일이 있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내온 글에 대해서만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던 물속에 있는 것이던 비록 같은 하나의 달이긴 하지만, 하늘의 것은 진짜 달이고 물속의 것은 단지 그 그림자에 불과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달을 가리키면 달의 실상을 얻지만 물속에서 달을 잡으려면 얻지 못합니다. 만일 성을 기 가운데 있게 하면 그것은 물속의 달그림자와 같아 잡으려 해도 얻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선을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여 성의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성에 관해 비유를 든 것이므로 오히려 얼마간은 그럴 수도 있다 하겠지만, 만일 정에 비유한다면 더욱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개 물에 있는 달은 물이 고요하면 달도 고요하고 물이 일러이면 달도 또한 일렁입니다. 그 일렁임에 있어, 물이 맑고 고요히 흘러 그림자가 밝게 비칠 경우에는 물과 달의 일렁임이 아무런 장애도 없지만, 물의 흐름이 점차 세차지고 바람이 불어 물결을 일으키며 돌에 부딪쳐 물이 튀어 오르게 되면, 달은 그로 인해 부서지고 언뜻언뜻 흔들거리며 침몰하다가 심하면 마침내 아주 없어지고 맙니다. 무릇 이와 같으니, 어찌 “물속의 달에 밝음과 흐림이 있는 것이 모두 달의 작용이며 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달의 그림자가 고요하고 맑게 흐르는 물에 비친 경우에는 비록 달을 가리켜 그것의 일렁임을 말하더라더도 물의 일렁임이 그 안에 있다. 만약 물이 바람에 출렁이고 돌이 부딪쳐 달을 가라앉게 하거나 없어지게 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물을 가리켜 그 일렁임을 말해야 하니, 달이 있고 없음과 밝고 흐림은 모두 물이 일렁거림의 크고 작음 여하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4 현대적 의의

일단 윤사선택자들에게 빅엿을 선사한다[2]

사단칠정논변은 유심론적 논쟁으로 사유해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 무엇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논의는 현대 철학에서도 유구한 논의 주제였다. 특히 이 유학자들 사이에서의 논쟁이 눈에 띠는 점은 인간의 마음의 작동 기제들을 단지 순수하게 추상적인 논리구조로 접근하기 보다, 희 노 애 락 등의 실제하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는 사실 서구 철학에 비해 동양 철학이 가진 장점으로, 그것의 백미가 바로 이 사단칠정논변인 것이다. 추가바람
  1. "퇴계와 고봉 사칠논변의 시발과 종결","퇴계와 고봉 사칠논변 사상사적 의의", "편지 본문" 의 글들은 모두 다음 책을 요약한 것이다: 한국유학 삼대논쟁자료 수집. 정리 및 역주단, "한국유학원전자료총서1 퇴계.고봉, 율곡.우계 사단칠정논변", 한국학술정보(주)
  2. 사실 윤사는 이황과 이이의 이기론의 비중이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 내용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하지만 각 학자들의 사단칠정에 관한 견해를 아주 다이나믹하게 꼬아내는데다 고등학생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정말 힘들어서 사단칠정 파트는 윤사 선택자들의 영원한 원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