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

문묘 배향 18현
김굉필김인후김장생김집박세채설총
성혼송시열송준길안향이언적이이
이황정몽주정여창조광조조헌최치원


李彦迪
1491년 11월 25일 ~ 1553년 11월 23일

조선 전기의 유학자. 본관은 여주(驪州)고, 이름은 언적(彦迪)이다.[1] 호는 회재(晦齋)[2], 자계옹(紫溪翁)이다.

영남학파의 창시자로서, 동인의 스승이자 대유학자 이황(李滉)이 그가 이끈 주리론[3]을 이어받은 것으로 유명하다.[4]

경상북도 경주시 출신(현 양동마을)[5]으로, 길재(吉再)와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외삼촌 손중돈(孫仲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6]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27세엔 손숙돈(孫叔暾)[7]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일어난 무극과 태극에 관한 논쟁[8]에 뛰어들었으며, 37세엔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세자 인종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사간원 사간을 역임할 당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했다가 김안로가 외척이 되어 부상한 직후 성균관 사예로 좌천되었다. 이후 낙향하여 자옥산에 독락당[9]을 짓고 학문 활동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독락당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주자를 자유롭게 해석하였고, 이는 주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조선 중기와 후기의 유학자들과 달리 도전적인 자세였다.[10]

1537년, 김안로의 실각 이후 복귀하여 조광조의 복권과 사림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1539년, 세자우부빈객이 되어 다시 세자 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나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권신 윤원형(尹元衡)은 사림파를 축출하려 한다. 이에 이언적은 의금부판사가 되어 사림 윤임(尹任)파를 심문하고 죄주었으나 그해 12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인해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된다. 이후 후학 양성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63세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을 저술하다 사망한다. 저서엔 《회재집(晦齋集)》,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봉선잡의(奉先雜儀)》등이 있다.

야사에 따르면 정식으로 혼인한 정처나 첩 외에, 젊은 시절 사랑했던 기생과의 자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기생은 출산을 하기 전 한 양반가의 첩으로 들어갔다가, 자식을 낳은 뒤 그에게 친아버지가 이언적임을 고백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유배지에 있는 이언적을 찾아가서 친아버지로 모셨다는 이야기.[11]

그가 기거하던 경주 독락당에는 중국주엽나무[12]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115호이다. 콩과의 식물인 주엽나무는 열매를 약용으로 쓸 수 있는데, 몸이 약했던 이언적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친구에게 종자를 얻어 심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1. 원래의 이름은 이적(李迪)이었는데, 후에 중종이 직접 선비 언(彦)을 집어넣어 개명하도록 명했다.
  2. 주희를 따르겠다는 의미다. 주희의 호는 회암(晦庵)이다.
  3. 이기이원론을 바탕으로, 이(理)가 기(氣)를 앞선다는 이론.
  4. 이후 조식(曺植)이 이끄는 남명학파, 이황이 이끄는 퇴계학파, 장현광(張顯光)이 이끄는 여헌학파으로 나뉜다.
  5. 어머니는 경주 손씨이다. 이이와 마찬가지로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외가에서 태어났다.
  6. 외할아버지는 손소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사람이었다. 외삼촌 손중돈은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명망높은 사람이었다.
  7. 손중돈의 형
  8. 자신의 성리학적 견해를 밝히면서 성리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이 논쟁은 이후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9. 진심장구 상의 독락 장에서 인용하였다. 그리고 진심장구 상의 독락 장에서 나온 '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았다.
  10. 주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그의 학문관은《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에 나와있다. 그는 주자가 다시 살아나온다고 해도 자신의 해석에 동의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11. 이 아들은 천첩의 자식이니 벼슬은 꿈도 못꾸었지만 나중에 면천을 받았다. 결국 그의 자손이 무과에 합격했다.
  12. '쥐엄나무'라고도 부르며 조각자나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