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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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에서 명륜당을 바라본 전경

成均館, Seonggyungwan[1], Sungkyunkwan[2]

1 개요

성균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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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고등교육기관이자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이 모셔진 유교의 사당. 면적은 81,673㎡. 태학(太學), 문묘(文廟), 반궁(泮宮), 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1964년 11월 10일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Seoul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Confucian Academy)'이다. 여기를 다니면 삼성그룹에 취직시켜준다고 한다[3]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2007)과 이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F4 성균관 스캔들(2010)로 인지도를 얻었지만, 사실 세계문화유산종묘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콩라인이다. 게다가 중국의 종묘는 문화대혁명으로 개박살나서 한국에 있는 것이 세계 유일이라지만, 성균관은 그와 비슷한 성격의 세계문화유산 공묘가 어엿이 중국에 존재한다. 물론 공묘가 성균관처럼 국가적 고등교육을 수행하던 기관은 아니지만, 워낙 그 규모와 위상이 대단한지라 대개 성균관의 우위에 둔다. 고려 성균관도 등재됐는데...

매해 봄가을로 유교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가 거행됨에 따라 한국에서 유일하게 팔일무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에 비견되는 문묘제례악이 정기 연주되는 장소이며, 이것은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문화대혁명으로 실전되었던 공묘의 제공대전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놈의 문화대혁명

일제강점기 때 명륜학원 명륜전문학교로 격하됐고, 광복과 함께 성균관의 이름을 되찾았다. 1946년에 유림의 대표 김창숙 선생의 주도하에 성균관의 학통을 이어 전국 향교의 재산을 모아 성균관대학이 설립됐다. 이후 재단분규가 있었고, 이로 인해 1963년에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와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4] 이후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성균관대 재단이사장을 맡아 대학을 지원했고, 1996년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에 참여해 오늘에 이르렀다.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문화 전문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2 역사

고려시대986년태학 설립(성종)
992년국자감으로 확장(성종)
1275년국학으로 격하(충렬왕)
1298년성균감으로 개칭(충렬왕)
1308년성균관으로 격상(충선왕)
1356년국자감으로 격상(공민왕)
1362년성균관으로 개칭(공민왕)
조선시대1398년한양으로 기능 이전(태종)[5]
1592년임진왜란으로 소실(선조)
1606년종전 이후 중건(선조)
1887년성균관의 교육기능이 경학원으로 분리(고종)
1894년경학원 폐지(고종)
일제시대1911년남아있던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개칭
1930년경학원 부설 명륜학원 설립
1939년명륜전문학교로 확장
1944년명륜연성소로 개편
미군정기1945년명륜전문학교로 환원
1946년성균관대학 발족(김창숙)
대한민국1953년성균관과 성균관대학 통합
1963년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교육기관으로 독립

이처럼 고려 시대의 국자감에서 이어진 것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따지면 근 천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셈이다.

2.1 기원

성균관의 기원은 중국의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경에 따르면 전설상의 순임금은 설(契)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여 윤리로 일반 민중들을 교화하게 하고 기(夔)를 전악(典樂)으로 임명하여 노래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기가 전악으로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 바로 성균이었는데,[6] 성(成)이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고[7] 균(均)이란 음운을 조율하는 것으로 역시 노래를 가르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고시대의 대학에 대한 고대의 전승은 기본적으로 전설상의 이야기에 속하므로 그 역사적 실재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에는 아직 문자가 발달하지 못한 시점에 노래의 형식을 빌린 구전으로 공동체의 지식을 기억하고 전승해오던 역사적인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맡은 전승자는 주로 시력이 차단됨으로써 비상한 청각과 기억력을 가지게 된 장님이었고, 고대 동아시아의 샤머니즘적 전통 위에서 그는 그 공동체 최고의 음악인이자 지식인인 동시에 무속인이기도 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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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璧)

또한 전승에서 이미 민중 교화와 귀족 교육이 서로 구분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보이듯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서는 윤리를 가르치는 소학과 지식을 가르치는 대학이 분리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소학으로는 노인을 받드는 상(庠), 궁도를 익히는 서(序), 기강을 다잡는 교(校), 문화를 배우는 학(學)이 있었고[9] 대학으로는 상나라에서 고종(瞽宗)과 주나라에서 벽옹(辟雍)이 설치되어 그 임무를 맡았다. 이로써 동아시아에는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의 교육기관이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10]

특히 주나라 시대에 천자국의 대학은 물이 그 주위를 벽옥처럼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고 해서 벽옹이라 부르거나 혹은 그 물을 영소(靈沼)라 하고 학교를 영대(靈臺)라 일컬은 데 반해, 제후국의 대학은 물이 그 주위를 반쪽만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그 물을 반수(泮水)왠지 슬픈 그 이름라 하고 학교를 반궁(泮宮) 또는 반궁(頖宮)이라 일컬었다. 이는 대학이 세상에서 격리된 하나의 신성한 구역을 이룬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모습은 시경에 잘 나타난다.

虡業維樅 賁鼓維鏞 / 종과 경 매다는 데 종과 경 달아놓고

於論鼓鍾 於樂辟廱 / 아아 종과 북 울리니 아아 벽옹아 즐거워라
於論鼓鍾 於樂辟廱 / 아아 종과 북 울리니 아아 벽옹아 즐거워라
鼉鼓逢逢 矇瞍奏公 / 악어북 둥둥 울어 장님들 연주하네
- 『시경』 대아 <영대>

思樂泮水 薄采其芹 / 즐거운 반수에서 그 미나리 뜯노라니

魯侯戾止 言觀其旂 / 노후께서 이르사 그 깃발을 보리로다
其旂茷茷 鸞聲噦噦 / 그 깃발 하고 많고 말방울 소리 딸랑딸랑
無小無大 從公于邁 / 크고 작음 할 것 없이 공을 따라 가는도다
- 『시경』 노송 <반수>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가 붕괴되고 춘추전국시대헬게이트가 도래하자 그 성분이 귀족으로 국한되는 공적인 교육기관은 자연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공적인 교육과정을 거치는 것보다도 군주에게 직접 등용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관직 진출 방법으로 부상했고,[11] 지식인들은 종래의 신앙적인 도덕과 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며 세상을 구제할 새로운 길을 모색해나갔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공자를 필두로 한 제자백가의 무수히 많은 사학들이었다.

따라서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한 진나라는 중앙에는 박사, 지방에는 삼로(三老)를 두어 학문과 교화를 전담시키고 한편으로는 분서갱유라는 문화적 폭거를 감행함으로써 사상적인 통일을 꾀했다. 여기에 뒤이어 세워진 한나라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보급함에 따라 국가적 교육기관은 유교와 결합된 모습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는데, 한무제는 기원전 140년에 유교를 국시로 삼고 기원전 136년에 오경박사를 설치한 데 이어서 기원전 124년에는 이를 국가적 교육기관으로 만들어 50명의 학생으로 태학을 창립했다.

이후 지방의 호족들이 유학을 수용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태학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한무제의 아들인 소제 때에는 100명, 손자인 선제 말에는 200명, 증손인 원제 때에는 2천 명, 현손인 성제 말에는 3천 명으로 불어났고 급기야 후한에 들어서서는 3만 명에 다다르게 된다. 또한 중간에 삼국시대의 난세를 거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진시대 태학생의 숫자는 7천에 이르러서 이들을 인위적으로 3천까지 감축해야만 했다.

서진에서는 구품관인법에 따라 지배층 안에서도 정국을 주도하던 문벌귀족들이 상류층으로 분리되어 나오는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이에 따라 278년에는 이러한 문벌귀족의 자제들이 입학하는 상류학교로 따로 국자학(國子學)이 세워졌다. 이후 국자학은 태학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북제에서는 국자시(國子寺), 북주에서는 노문학(露問學), 수나라에서는 국자감(國子監)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밖에도 유학, 현학, 문학, 사학, 음양학, 의학, 율학, 산학, 서학 등 다양한 학문의 고등교육이 시도되었다.

수나라와 그 제도를 이어받은 당나라에 들어와서 국자감은 국자학 외에도 태학, 사문학, 율학, 산학, 서학의 6학을 거느리는 국가의 최고 학부로 자리 잡아 일원적인 대학으로서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북송시대에는 국자학의 비중이 유명무실해지는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태학이 최고 학부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이외의 학과들은 사문학, 율학, 무학, 소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원나라에 들어와서는 태학이 사라지고 다른 학과들은 모두 흩어져서 그 이름은 유학을 가르치는 국자감의 별칭으로만 남게 되었다.

2.2 삼국시대

한국의 공식적인 고등교육기관은 서기 372년에 고구려소수림왕이 대학(大學)[12]을 세운 것이 최초다. 이 대학이 세워지기 직전에 화북의 전진에서 사신을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보내온 일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고구려가 대학을 세우는 데에는 전진의 조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체제 정비에 대한 강력한 소수림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7세기에는 대학박사 이문진이 고구려의 역사서 신집의 편수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에서도 고등교육이 박사 제도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박사 고흥을 얻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는 기술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오진 덴노가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더욱 뛰어난 박사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6세기에 들어서면 오경박사를 비롯한 백제의 여러 박사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는데, 다만 이러한 박사들이 소속되어 있었을 국가적 고등교육기관의 전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2.3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는 고등교육기관의 설치가 상당히 늦어서,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멸망한 뒤 682년이 되어서야 신문왕국학(國學)을 세워서 오경과 그 중에서도 특히 논어와 효경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했다. 역시 여기에는 박사와 조교가 소속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9년 기한으로 교습을 받은 뒤 그 사이의 학업 성취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또한 이밖에도 산학박사, 천문박사, 의학박사, 율령박사가 있어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실무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는데 산학을 제외한 천문 이하는 저마다 교습하는 담당 기관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국학 내에서 과거 제도의 초보적 단계인 독서삼품과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편 발해에서는 당나라의 국자감을 본떠 주자감(胄子監)이 설치되었는데, 이 주자감이라는 명칭은 한편으로는 당제의 적극적인 수용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가 사용하는 국자감의 이름을 교묘하게 가져옴으로써 발해가 가진 외왕내제 체제의 일면을 보여준다.

2.4 고려시대

개성성균관 문서 참조.

2.5 조선시대

이방원 때 한양에 성균관이 세워졌으나 고려성균관도 개성에 그대로 남아서 현대까지 북한 개성특급시에 남아있다. 그러나 왕조가 교체되면서 고려 성균관은 예전의 기능 대부분을 잃었고 실질적인 기능은 한양 성균관이 차지하게 된다.

이후 모습은 고려시대 모습 그대로[13][14].

2.5.1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 이 항목에서는 성균관 유생들의 실제 일상 생활을 다룹니다.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은 해당 항목으로.

원점이라는 출석 점수가 있었는데, 하루 2번 식사 전에 식당에 비치된 도기에 서명하였으며 2번을 모두 채우면 1점이 인정되었다. 300점이 되면 과거의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였다. 성균관의 처벌중에는 식당 출입을 금하는게 있었는데 밥을 못 먹을뿐만 아니라 점수도 못 받기 때문에 꽤 치명적이였다. 그런데 단체급식 맛은 그때나 지금이나 맛없기는 매한가지인지, 밥맛이 별로라 학생들은 질색했고 출석체크만 하고 나가서 사먹는등 다른 곳에서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식비나 거주비는 전부 국가에서 대주는 무료였으나, 하재생들은 식사때 반찬만 줘서 쌀을 자기가 구해다 먹거나 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걸 이용한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 방법 중에도 단체로 성균관 급식을 째는 집단 파업, 권당이란 게 있었다. 유생들이 단체로 급식을 째면 성균관 제도상 유생들을 어쩔 수 없이 잘라야 하므로 이를 성균관 유생들의 국가를 끌어안은 자폭으로 보기도 했다. 관료제 국가에서 국가고시생이 통째로 시험을 안본다? 실무행정을 담당하는 하급관리 보충에 당장 이상이 생긴다.

위에 설명한 권당과 유소(상소)등을 이용해 정치적인 발언을 내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예비 정치인의 소신 발언에 가까웠지만 후기로 갈수록 정치세력에게 사주를 받은 관제 데모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유소(상소) 같은 경우에는 최근 복원되어 실제로 행사를 매년 개최 중이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보는 유형과 추천과 기부로 들어오는 유형이 있는데 전자는 상재생, 후자는 하재생이라 한다. 상재생 전형의 경우 과거시험의 소과를 보아야 하는데 난이도가 심히 어렵다.[15] 이들은 성균관의 주류가 되었다. 하재생의 경우는 쉽지만 차별이 존재했다.

렛츠고 시간탐험대 4~6 화에서 성균관의 노비와 유생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으니 참고해도 좋다.

2.6 근대

1911년 이후 성균관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성균관의 경학원(經學院)으로 변경 및 축소(1911) → 경학원 내 명륜학원(明倫學院) 설치(1930) → 명륜학원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로 개편(1939) → 명륜연성소로의 격하(1944) → 명륜전문학교로의 재개교(1945) → 학린사(學隣舍) 및 명륜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 설립(1946)

그 외에 국왕이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에 성균관 유생들만을 대상으로하는 시험인 알성시가 존재하였는데, 이는 전통유산이라고 하여 현대에도 성균관대학교에서 가끔씩 재현하고 있다. 90년대에는 유학자들 모아서 먹 갈고 붓으로 쓰는 그야말로 전통 과거의 재현이었고, 2000년대에는 재학생들에게 도포 입혀서 시험치르는 형태로도 등장했고, 심지어 디지털 알성시라고 해서 노트북으로 글 작성하고 심지어 게임으로 대결까지 벌이는 상상을 초월한 형태로도 전개된다. 과거와 같은 것은 역시 복장은 돗자리 깔고 도포 입고 복건 쓰고 진행한다는 것. 그야말로 희귀한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한 번 할 때마다 언론에도 보도된다.


참고로 위에 올라와 있는 성균관 지도에 나와 있는 시설들은 2013년 5월 현재 제한적으로 관람 가능하다. 개방 시간은 오전 9시부터 하절기에는 5시 반까지, 동절기에는 4시 반까지.[16] 입장료는 따로 없기에 성균관대 학생들이 통학 지름길로도 사용하고 있다.[17] 하지만 저 건물들은 (유림회관 포함) 성균관대학교 캠퍼스 부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정부기관 산하 재단법인 성균관 소유의 시설들이다.

3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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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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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삼문(神三門)
문묘의 정문으로 대성전 남쪽에 위치하며 대성전과는 신도(神道)로 이어져 있다. 성현들의 넋이 드나든다고 해서 신문(神門)이라 불리는데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에 중건하였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좌우로는 문묘 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석전대제 때에만 좌우문이 개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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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말문(東末門)·서말문(西末門)
대성전 뜰의 동남쪽과 서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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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삼문(東三門)
대성전 동쪽에 위치하며 대성전과는 어도(御道)로 이어져 있다. 임금이 성균관에 드나드는 문으로 어삼문(御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남쪽으로 동무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고와 연결되어 있다.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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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大門)
성균관 관람시 실질적으로 출입이 가능한 문으로 명륜당 뜰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명륜당 대문이라고도 한다. 정면 2칸에 측면 1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동고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재와 연결되어 있다.
閒人勿入 / 볼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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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문(前香門)·후향문(後香門)
성균관 관람시 실질적으로 출입이 가능한 문으로 전향문은 동재와 식당 사이에 위치하고, 후향문은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다. 전향문을 통해 성균관으로 들어가면 동재 앞을 지나서 정록청에 이르고, 후향문을 통해 성균관에서 나가면 비천당 앞에 다다른다.

3.2 제향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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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大成殿)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문묘 행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하였다. 현판은 한호(韓濠)가 썼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향사시의 동선으로 사용한다. 기단에는 양 측면으로 계단이 있고 또한 전면에도 동서로 계단이 있는데, 이 가운데 서쪽은 빈계(賓階)라 하여 신삼문에서 신도(神道)를 타고 들어온 성현들의 넋이 오르는 계단이고 동쪽은 조계(阼階)라 하여 향사시 제관들이 오르는 계단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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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東廡)·서무(西廡)
중국 94현과 한국 18현의 위패를 모시던 공간으로 대성전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에 중건하였다. 1949년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한국의 18현을 대성전으로 올리고 중국의 94현은 땅에 매안(埋安)하여 현재 동무와 서무는 비어 있다. 각각 정면 11칸에 측면 2칸으로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향사시의 동선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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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東庫)
동삼문과 대문 사이에 있는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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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정비(廟庭碑)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으로 대성전 뜰 동남쪽에 위치한다. 태종 10년(1410)에 처음 묘정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중종 6년(1511)년에는 비각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인조 4년(1626)에 다시 묘정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이정귀(李廷龜)가 짓고 이홍주(李弘胄)가 썼으며 제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석은 커다란 귀부(龜趺)가 받치고 있으며, 높이는 187㎝에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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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고(祭器庫)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로 서무의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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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청(守僕廳)
문묘의 관리를 담당하던 남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제기고 북쪽에 위치한다. 재학당(載學堂)이나 근관직청(芹官直廳)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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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典祀廳)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수를 준비하는 건물로 수복청 북쪽에 위치한다. 성종 3년(1472)에 창건하였고, 1986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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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주(庖廚)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물을 검사하고 손질하던 곳으로 전사청의 북쪽에 위치한다. 태종 7년(1407)에 창건하였고, 1975년에 복원하였다.

3.3 강학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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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明倫堂)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이자 과거시험장으로 대성전 북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하였다. 현판은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본당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이며, 좌우 익사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기단에는 본당 앞으로 월대가 있고 좌우 익사 및 월대 정면과 좌우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그 독특한 생김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성균관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건물로, 천 원짜리 지폐 앞에도 그려져 있다. 내부에 걸린 현판 중에는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것은 공자의 77세손으로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을 지낸 공덕성(孔德成, 1920.2.23~2008.10.28)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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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東齋)·서재(西齋)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하던 건물로 명륜당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하였다. 각각 정면 20칸에 측면 3칸으로 동재는 동쪽을, 서재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마루를 설치하고 본칸에는 온돌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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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은행나무
행단(杏壇)[19]을 상징하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로 명륜당 뜰에 위치한다. 중종 14년(1519)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卓)이 심었으며,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6m이고 가슴높이의 둘레는 12m에 달하는 웅장한 나무로 발달이 왕성하고 그 중에서도 동쪽의 나무는 6.25 전쟁으로 포탄을 맞아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가까스로 상처가 회복되었다.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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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각(尊經閣)
성균관의 장서를 보관하던 도서관으로 명륜당 북쪽에 위치한다. 소장된 장서는 각종 유교 경전과 역사서로 한정되었고, 불교 및 도교와 여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성종 7년(1476)에 창건되어 중중 9년(1514)의 화재와 임진왜란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13년(1621)에 중건하였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자 대부분의 장서들이 경성제국대학으로 강제 이관되고, 남은 장서들도 6.25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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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각(六一閣)
군자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인 궁술을 익히고 이와 관련된 대사례(大射禮)에 쓰이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건물로 존경각 동쪽에 위치한다. 영조 19년(1743)에 영조가 직접 대사례를 행하고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고, 본래는 향관청의 서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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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食堂)
성균관 유생들이 식사하던 건물로 동재 동쪽에 위치한다. 진사식당(進士食堂)이라고도 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하였다. 전체 33칸의 건물이 안뜰을 중심으로 장방형의 口자를 이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 주방이 10칸이고 식당이 20칸이며 나머지 3칸은 각기 북쪽의 출입문과 창고를 이루고 있다. 개방시간에도 출입이 통제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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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복청(婢僕廳)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를 담당하던 여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진사식당 북동쪽에 위치한다. 서벽고(西壁庫)라고도 한다. 정조 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3.4 관리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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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록청(正錄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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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청(書吏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정록청 동북쪽에 위치한다. 정조 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14칸의 건물이 안뜰을 중심으로 冂자를 이루고 있는데, 본당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이고 서측 익사가 1칸에 동측 익사가 3칸이다. 개방시간에도 출입이 통제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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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방(直房)
성균관의 관원들이 쉬어가던 대기실로 정록청 뜰의 동쪽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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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직사(庫直舍)
정록청에 드나드는 문간채로 정록청 남쪽에 위치한다. 고문(庫門)이라고도 한다. 전체 4칸 가운데 문간을 중심으로 서쪽 1칸은 사무실로, 동쪽 2칸은 창고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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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관청(享官廳)
문묘의 향사 때 제관들이 숙식하고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봉안하는 건물로 육일각과 정록청의 북쪽에 위치한다. 성종 4년(1473)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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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월랑(東月廊)·서월랑(西月廊)
문묘의 향사 때 집사들이 숙식하고 평소에는 성균관의 유생들이 기숙하던 건물로 향관청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성종 4년(1473)에 창건하였고, 1986년에 복원하였다.

3.5 외부 부속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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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蕩平碑)
영조 18년(1742)에 성균관의 유생들이 당쟁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재가 되기를 권장하기 위해 영조의 어필을 새겨서 세운 것으로 어서비(御書碑)라고도 불린다. 본래 반수(泮水)를 건너는 향석교 뒤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에 성균관대학교 정문 자리에 있던 대성문(大成門)과 가깝다는 이유로 보다 남쪽인 지금의 자리에 이전되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心 / 두루 사귀되 가리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심(公心)이고, 가려 사귀되 두루치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심(私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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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下馬碑)
궁궐과 종묘 사직 등 엄숙한 장소의 입구에 세워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 비석이다. 본래 성균관 일대 반촌(泮村)의 어귀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전되어 탕평비각의 왼쪽에 세워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정덕 14년(1519)에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 / 크건 작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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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련대(下輦臺)
석전대제나 알성시 등이 거행되어 임금이 친히 성균관에 행차할 때 타고 온 가마(輦)를 내려놓는 곳이다. 동삼문 맞은편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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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당(丕闡堂)
강당이나 과거시험장으로 쓰이던 건물로 명륜당 서북쪽에 위치한다. 현종 5년(1664)에 도성 안의 사찰인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을 헐면서 나온 자재를 가져다가 성균관에 비천당과 함께 그 서남쪽으로 벽입재(闢入齋)와 일양재(一兩齋)를 세웠는데, 그 이름은 송시열이 큰 도를 크게 밝힌다(丕闡大猷)는 주희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벽입재와 일양재는 모두 구한말에 파괴되었고, 비천당은 해방 후 한동안 성균관대학의 대학본부로 사용되다가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1988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성균관대의 부지 부족으로 인해 비천당 앞 마당을 주차장으로 쓴 적이 있었는데, 도올 김용옥 선생이 이를 보고서 매우 한탄했다고 한다. 이후 주차장으로 쓰지 않고 공터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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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회관(儒林會館)
하련대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 건립되었다. 2층에는 한국 유림의 총수인 성균관장의 집무실과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여성유도회, 전례연구위원회, 석전보존회 등의 사무실이 있으며 지하 2층에는 석전교육원이 있다. 특히 주말이면 성균관과 함께 결혼식장으로 많이 이용되는데 3층에는 예식장인 성균관 파티움, 1층과 지하에는 연회장인 진사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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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성균관대학교 정문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의 공통 정문. 과거에는 대성문(大成門)이 있었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성균관대학교 캠퍼스로, 유림회관 뒷편 주차장으로 돌아가면 동삼문을 통해 성균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정문 바로 뒤 왼쪽에는 탕평비와 하마비가 위치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의 건물이지만 동시에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는다. 2014년 정문 공사를 통해 사라짐...

4 위패 배치도

   大 대
成 성
至 지
聖 성
文 문
宣 선
王 왕

孔 공
夫 부
子 자
   
      
文昌侯 崔致遠
문창후 최치원
鄆公 冉耕
운공 염경
  費公 閔損
비공 민손
弘儒侯 薛聰
홍유후 설총
文忠公 鄭夢周
문충공 정몽주
齊公 宰予
제공 재여
郕 성
國 국
宗 종
聖 성
公 공

曾 증
子 자
兗 연
國 국
復 복
聖 성
公 공

顔 안
子 자
薛公 冉雍
설공 염옹
文成公 安裕
문성공 안유
文獻公 鄭汝昌
문헌공 정여창
徐公 冉求
서공 염구
黎公 端木賜
여공 단목사
文敬公 金宏弼
문경공 김굉필
文元公 李彦迪
문원공 이언적
吳公 言偃
오공 언언
衛公 仲由
위공 중유
文正公 趙光祖
문정공 조광조
文正公 金麟厚
문정공 김인후
潁川侯 顓孫師
영천후 전손사[20]
 魏公 卜商
위공 복상
文純公 李滉
문순공 이황
文簡公 成渾
문간공 성혼
 鄒 추
國 국
亞 아
聖 성
公 공

孟 맹
子 자
 沂 기
國 국
述 술
聖 성
公 공

子 자
思 사
子 자
 文成公 李珥
문성공 이이
文烈公 趙憲
문열공 조헌
豫國公 程顥
예국공 정호
 道國公 周惇頤
도국공 주돈이
文元公 金長生
문원공 김장생
文正公 宋時烈
문정공 송시열
新安伯 邵雍
신안백 소옹
 洛國公 程頤
낙국공 정이
文敬公 金集
문경공 김집
文純公 朴世采
문순공 박세채
徽國公 朱熹
휘국공 주희
 郿伯 張載
미백 장재
文正公 宋浚吉
문정공 송준길
  • 송조 6현(宋朝六賢)
    • 주돈이
    • 정호
    • 정이
    • 소옹
    • 장재
    • 주희

5 직제

5.1 고려, 조선초 성균관의 직제

품계관직정원비고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정3품대사성(大司成)1명
종3품좨주(祭酒)[21]1명
정4품악정(樂正)[22]2명
종4품
정5품직강(直講)1명
종5품
정6품전부(典簿)[23]1명
종6품
정7품박사(博士)2명
종7품순유박사(諄諭博士)2인
정8품진덕박사(進德博士)2명
종8품
정9품학정(學正)2명
학록(學錄)2명
종9품직학(直學)2명
학유(學諭)4명
품계외서리(書吏)2명

5.2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성균관 직제

품계관직정원비고
정1품
종1품
정2품지사((知事)1명겸관
종2품동지사(同知事)2명겸관
정3품대사성(大司成)1명
종3품사성((司成)2명
정4품사예(司藝)3명
종4품
정5품직강(直講)4명
종5품
정6품전적(典籍)13명
종6품
정7품박사(博士)3명
종7품
정8품학정(學正)3명
종8품
정9품학록(學錄)3명
종9품학유(學諭)3명
품계외서리(書吏)10명

6 석전대제

매년 봄과 가을에 대성전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에 대한 제사가 거행되는데, 1953년부터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이를 거행하다가 다시 2007년부터는 공부자서거일(5월 11일)과 공부자탄강일(9월 28일)에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석전(釋尊), 석채(釋菜), 정제(丁祭),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1986년 11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석전대제(Ritual for Confucius)'이다.

7 그 외

성균관 인근에는 성균관에서 일하는 사역인들이 모여 사는 반촌(泮村)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이 사역인들 중에는 성균관에서 쓰는 고기들을 다루는 백정들도 많이 있었다. 최악의 천시를 받았던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이 반촌의 백정들은 성현들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고기를 바친다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고, 성균관 출신의 고위층 인사들과도 연줄이 있어서 한성부 관리들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로 바뀌었으며 한성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상점과 물건들이 존재하며 성균관 유생들이 유흥을 즐기는 이색적인 번화가로 자리잡았다. 쉽게 말해서 조선시대의 대학로신촌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반촌의 위치는 현대의 대학로(서울)와도 상당 부분 면적이 겹치는 편이다.

반촌의 기원은 고려말 안향이 성균관에 기부한 노비들이라고 하며 그들의 후예들이 조선 성립 이후에도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반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24] 따라서 반촌 사람들은 자신을 안향의 노비들의 후예라고 믿었으며,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옛 주인의 후손이 오셨다'고 하면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북한 개성에도 성균관이 있다. 다만, 한양 천도 후 최고학부로서의 기능은 잃었고, 향교로서 존재했으나 '성균관'이라는 이름만큼은 계속 사용하였다. 2013년에 성균관이 포함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의한 것으로 문화재로서의 로마자 명칭이다.
  2. 유림 단체인 성균관유도회와 성균관대학교의 로마자 명칭이다.
  3. 성균관대학교는 실제로 삼성그룹에서 운영하는 학교다!
  4. [1]
  5. 고려 성균관도 없어지진 않고 개성에 그대로 남았는데, 고려시대에 맡았던 기능은 대부분 한양 성균관이 가져갔다.
  6. 주례에 따르면 "대사악(大司樂)은 성균의 법을 관장하는데, 나라의 교육 정책을 세우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서 다스린다."고 한다. 여기에 동중서는 "오제의 대학을 이름하여 성균이라 한다."고 했으니, 성균을 관장하는 주나라의 대사악을 순임금의 전악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7. 맹자는 공자를 칭송하면서 "공자는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집대성이란 것은 쇠를 소리내서 옥을 울리기까지의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 고대에는 악기를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으로 구분했는데 이 가운데 하나만 연주하는 것을 소성(小成) 또는 중소성(衆小成)이라 하고 모두가 합주하는 것을 대성(大成) 또는 집대성(集大成)이라 했다. 이때 쇠로 만든 특종을 치면서 합주를 시작하고 옥으로 만든 특경을 치면서 합주를 끝냈던 것이다.
  8. 순임금의 아버지인 고수(瞽瞍)는 글자 그대로 장님이라는 뜻이고, 상나라의 대학이었던 고종(瞽宗)도 장님들의 으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주나라의 대학이던 벽옹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이들도 역시 장님이라는 뜻의 몽수(矇瞍)로 전하고 있다.
  9. 이상의 넷이 중국 상고시대의 하나라, 주나라, 은나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전승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맹자는 "하나라에서는 교, 은나라에서는 서,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하였고, 학은 3대가 공통되었다."고 말했지만, 예기에서는 "미름(米廩)은 순임금의 상이고, 서는 하나라의 서이고, 고종은 은나라의 학이고, 반궁은 주나라의 학이다."라고 되어있으며, 한서에서는 "하나라에서는 교, 은나라에서는 상, 주나라에서는 서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어서 그 대응이 서로 상충된다. 하하 개판이네
  10. 이로부터 주나라 시대에는 국내의 대학에 대해 남쪽은 가무를 가르치는 성균, 동쪽은 창검을 가르치는 동교(東膠), 북쪽은 작문을 가르치는 상상(上庠), 서쪽은 예절을 가르치는 고종, 중앙은 궁도를 가르치는 벽옹이라 하고 이것들을 묶어서 5학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또 혹은 벽옹이 곧 성균으로 중앙이고, 동교가 곧 동서(東序)로 왼쪽이고, 고종이 곧 우학(右學)으로 오른쪽이고, 우상(虞庠)은 나라의 서쪽에 있었다고도 한다.
  11. 춘추시대의 관중, 백리해, 손숙오, 오자서, 범려가 대표적인 이들이다. 전국시대는 손빈, 상앙, 소진, 장의, 범수 등등.
  12. 판본에 따라서는 태학이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으며, 국사 교과서도 이를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알고 있지만 정작 대부분의 판본은 대학이라고 되어 있다. 어차피 '태'와 '대'는 통가자이니 큰 문제는 아니다.
  13. 이미 완성은 공민왕 때 끝났고, 조선시대에는 이름도 바뀌지 않은 드문 경우이기 때문에 이 문서 최상단에 적힌 '조선 시대 최고급 교육기관'이란 표현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14. 조선시대의 성균관은 1398년(태조 7년)에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설치하고, 1887년(고종 24년)에 잠시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하였다가 1894년(고종 31년)에 폐지하였다.
  15. 대과 응시자격이 소과합격이다...
  16. 과거에는 아예 문을 걸어잠그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적도 많았다. 2005년까지는 성균관 유생들의 대를 잇는 의미에서 유학대학 학생들의 성균관 동재, 서재를 기숙사로서 사용하고 있었으나 2005년 1월 종로구청의 민간인 퇴거명령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17. 유림회관 옆으로 들어와서 성균관을 통과하면 국제관 앞으로 바로 나온다.
  18. 처음에는 대성인(大聖人)을 모신 곳이라 해서 대성전(大聖殿)이라 했는데, 중국 사신이 공자는 온갖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하였으므로 대성전(大成殿)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해 바뀌었다.
  19. 과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 단을 만들어두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단어.이 단어때문에 은행나무가 유독 학교 같은 교육시설에 많이 심긴 이유가 되었다.
  20. 본래 공자가 언급한 사과십철四科十哲의 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홀로 후작이다.
  21. 태종 1년(1401년) 사성(司成)으로 개정
  22. 태종 1년(1401년) 사예(司藝)로 개정
  23. 태종 1년(1401년) 주부(注簿)로 개정
  24.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반촌 사람들이 개성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표현했다. 영묘조가 조선 건국 겨우 50여 년 즈음의 일이니 꽤나 적절한 고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