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

1 개요

1489 ~ 1546
조선 중기의 주기론 유학자. 호는 화담, 복재. 시호 문강.

개성에서 자랐으며, 어릴 적 집안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13세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8세에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에 뜻을 두었다고 하며,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고 하루종일 이를 탐구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정치판 나갈 생각 안 드는 당시 정치판 모습 때문인지 조정에 출사하지는 않았으며, 개성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만 매진하였다. 그의 호 또한 그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의 지명에서 따왔다고. 마지막 순간에는 "살고 죽는 이치를 깨달은지 오래니 편안할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 철학과 사상

그의 철학은 철저한 주기론이다. 그는 가 모이면 물질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태허가 된다고 보았다. 이 때 태허라는 것은 기가 띄엄띄엄 흩어져 지각되지 않는 상태이며, 소멸한 무(無)의 상태가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철학은 지극히 현세 지향적인 성격을 띠며, 그가 불교 철학을 비판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과 태허로 돌아가는 것은 음양의 원리에 따라 순행하는데 어떻게 뭉치고 흩어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이다. 하지만 그가 이를 언급하는 것은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칠 뿐이며, 그 이외의 부분은 대개 기에 대한 설명으로 전개된다. 종달새를 하루종일 탐구했다든가 하는 일화들 또한 기를 탐구해 그 속에 숨은 이를 찾으려 하는 서경덕 철학을 잘 반영한 일화인 것이다. 이러한 서경덕 철학에 대해 원자설, 경험론과 유사하다는 평이 있으며, 북한에서는 서경덕을 유물론의 시초로까지 끌어올린다. 당연히 사회주의적인 정치색이 섞여 있고, 남한이 아닌 북한(개성) 출신이니만큼 띄워주는 면도 있겠지만...

이러한 그의 철학은 정작 성리학의 중심이 되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때문에 성리학에서 제시한 방대한 이에 대한 설명을 그의 철학 체계 안에 넣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기의 순환을 통해 우주론을 설명했다 하더라도, 이를 인륜에 적용시켜야 하는 유학의 기본 입장상 이가 단순히 자연 이치로 머문다면 이는 바람직한 철학이라고 볼 수 없었다[1]. 때문에 생전에 서경덕은 이황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이와 기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주기론자 이이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조선 주기론은 이이 철학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3 기타

노장 사상과 불교에 대한 이해 또한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앞에서 말했듯 이에 대한 비판 또한 제기한 바 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지만 후대에는 도사 이미지로 자주 각색이 되어서, 전우치 설화를 비롯한 조선시대 민담소설 이나 기담에 노장 사상이나 선술(仙術)의 대가로 엄청난 도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도사로 자주 등장한다. 설화 전우치전에서는 도술만 믿고 깽판치고 다니던 전우치를 굴복시켜서 선계로 데려가는 등 전우치의 뒷수습을 주로 맡는다.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마 그의 비주류적 사상경향이 그의 제자 이지함과 함께 그를 민중의 영웅, 신비적 인물로 승화시킨 듯.

야사 한정으로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녀의 스승이 되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유혹'을 자세히 묘사한 이야기들도 자주 보이는데 이런 곳에 등장하는 서경덕의 모습은 아파테이아 그 자체. 고자도 아니라고 한다. 때문에 왠지 황진이에게 10년(혹은 30년) 수행을 날려먹은 지족선사[2]와 비교되어서 '비인간적이다'라는 다소 어이없는 이유로 까이는 수준이다. 그럼 이황은...

이런 서경덕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에겐 어지간히 문제가 있었는지 사실은 시문을 통해 황진이를 그리워했다는 일화동인지도 전해지고 있고, 겉으로만 그러는 했지 실제로는 할 거 다 했을 거라고 억지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야사 이므로 황진이를 만났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하여튼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 3절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현대에는 그의 성리학 철학은 묻히고 설화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만 남은 것 같아서 안습. 앞에서도 말했지만 주목해 준다는 동네가 바로 이북이고 그것도 사회주의를 위해서니...

제자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이지함이 있다. 이지함 또한 농업과 상업의 병진론을 주장하는 등 당시 사상가 중에서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서경덕 유파가 이어지지 못한 데 아쉬움을 보이는 학자도 있다.

위에서 언급된 종달새 일화처럼 공부 방법이 상당히 특이했다. 한 가지 의문가는 단어를 방 안에 써 붙여 놓고 그 단어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근본부터 사색을 하거나 고전들을 뒤져보며 탐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운 가설에 대해 검증하고 확인하는 방식이었다고. 그의 사색적인 성향은 <상서>를 공부할 때 훈장이 그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훈장인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해서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

그래서 뒷날 추증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선조가 "이 사람 공부는 수신(修身)이 없으니 의심스러운데?"라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공부법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며 서경덕이 우의정에 추증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공부법을 꼭 본받을 것은 아니지만,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나아가 스스로 얻은 것이 많아서 문자로만 익히고 말 학문은 아닙니다. 요즘 학자들은 성현의 학설을 모방해 말할 뿐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3]

4 대중 매체에서

팬텀 하록웹툰 포천에서는 주인공 이시경의 스승으로 상당히 멋지게 어레인지되어 등장한다. 이시경의 스승이면서 거의 아버지나 다름 없는 존재.

영화 전우치에서는 그의 호에서 이름을 따온 듯한 화담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도술의 고수로 나오지만 진짜 정체는 십이지 요괴 중 양 요괴이다. 배우는 김윤석. 평소 인격자로 묘사되는 그를 완전히 비틀어 교활함의 끝을 보여주는 악역으로 그렸다.
  1. 사실 서경덕은 태허에서 하늘의 뜻(이)에 따라 실체가 이루어지므로 항상 고요한 마음을 가지라는 수양론을 제시했고, 그가 평소에 중시하던 자연 과학적인 관찰 또한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정치 혼란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철학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과 서경덕 철학은 어울리지 못했다.
  2. 여기서 '10년 수행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이 있다.
  3. 물론 서경덕의 후학은 이 평도 마음에 안들어 했다. 이건 조식이나 이황 후학들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