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

사물놀이
四物--




1 개요

네 명의 사람이 네 가지 물건 즉, 꽹과리, , 장구, 을 각각 가지고 어우러져 치는 놀이. 풍물놀이 계열의 음악이다. 듣고 있으면 절로 흥하게 되는 장단과 가락이 특징이다.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가는 상모[1] 돌리기또한 특징. 겉보기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역사가 짧은 편이다. 각 악기들은 자연현상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사물놀이에서 리더 역할인 꽹과리는 천둥과 번개, 징은 바람, 장구는 , 북은 구름을 상징한다. 또한 이 네 가지가 하나로 합쳐진 사물놀이는 폭풍을 상징한다.

2 역사

본래 풍물놀이, 혹은 농악은 한국의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전통 연희문화였다. 전통 사회에서의 풍물놀이는 2가지 축을 통해 전승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농경을 주업으로 삼는 일반 민중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남사당'과 같은 전문 예인 집단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풍물놀이의 기반이었던 농경문화 제반에 대한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2]을 이유로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해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풍물놀이를 보존 종목에 포함시키고, 남사당놀이 역시 종목에 포함시켰으나, 전 사회적으로 진행된 산업화로 인해 농촌 인구는 감소되었고, 전통적인 농경문화를 기층으로 하는 풍물놀이 또한 사장길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풍물놀이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었고, 당시 운동권 지식인과 일부 젊은 국악인들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보이면서 다양한 시도를 접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를 뒤흔든 또 하나의 문화운동인 '소극장 운동'과 접목되면서 마침내 '민속악회 시나위'라는 집단[3]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각종 민속 음악을 무대화 하기도 하고 민속 음악을 배경에 둔 창작 활동도 벌였고, 그러한 산물들을 선보이는 자리로 정기 음악회를 열었다. 사물놀이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잉태되어 1978년 2월,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 연주회에서 김용배(당시 '민속악회 시나위'의 객원 멤버), 김덕수, 최태현, 이종대(이상 민속악회 시나위 단원) 등 네 사람에 의해 '웃다리 풍물 앉은반'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처음 연주되었다. 당시에는 '사물놀이'라는 이름도 아니었고, 연주자 또한 장구의 김덕수, 꽹과리의 김용배를 제외하면 전통 연희 종목의 전공자가 아니었다.[4][5]

이 때의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전통 연희'를 위한 연주팀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2월 공연에 참여한 김덕수, 김용배를 중심으로 최종석과 최종실 두 형제가 가세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이가 많았던 최종석이 빠지고 대신 이광수가 영입되었고, 최종적으로는 12월,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을 단원으로 하는 《사물놀이》라는 이름의 연주단이 창설되었다. 바로 이들로부터 현대와 같이 중부지방의 가락을 엮은 웃다리 사물, 영남지방의 가락을 엮은 영남사물, 호남지방의 가락을 엮은 호남 우도, 호남 좌도 사물, 이 삼도의 가락을 모두 엮은 삼도 사물이 나오게 되었다. 마당에서 진을 짜고 어우러지는 것을 중시하는 기존 풍물놀이와 달리, 사물놀이는 한정된 공연장에서 공연되는 것을 전제로 편성되었다. 보는 것이 중심인 풍물놀이가 이닌, 듣는 것이 중심인 사물놀이로 재탄생한 것이다. 또한 기존 풍물놀이의 가락들을 정리하여 4개의 가락으로 집대성하였다. 이들이 점차 대중화 되면서 이들의 팀 명이었던 사물놀이가 하나의 장르명으로 바뀐 것이다.

이름의 유래는 1978년 사물놀이가 창단될 당시 민속학자 겸 민속극 전승자인 심우성이 꽹과리, 장구, 북, 징의 네 악기가 어우러지는 것을 보고 사물놀이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여 사물놀이가 탄생하게 되었다.[6] 그 이름을 들은 판소리 명창 김소희가 이들에게 깃발을 써주었다고 한다. 겨우 30여 년에 불과한 역사를 가지는 사물놀이이지만, 전 세계적인 인기와 함께 오랜 전통 문화인 것처럼 알려지고 취급되고 있다. 전통이 어떻게 재창조되고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인 셈.

3 잡소리

김덕수 선생이 호남사람이라 그런지,김덕수 선생님 대전 사람 인데? 사물에서는 장구가 크게 중요시되고 있다. 본디 호남은 장구, 영남은 쇠 또는 북이 중요시 되었는데, 때문에 두 지방의 풍물패가 만나거나 두 지방의 악공이 한 풍물패에 속한다면, 특히 두사람이 나름 명인이다 할만한 사람이라면 어느쪽이 위인지 소리로써 싸우는 명장면을 볼 수 있기도 하다.[7] 사실 8년 전까지 한 지역 안의 풍물패라 해도 둘이 맞붙으면 은근히 가락을 바꾸어들거나 엇박과 변가락을 집어넣어 소리를 어울리며 흔들며 싸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 몇년간은 오히려 연합을 해야하는 추세라 그런 진풍경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윗문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전수관에서 농악을 가르쳐주시는 사부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 처음 김덕수 선생이 공연장에서 앉은반으로만 사물을 할 때, 농악하는 어른들은 모두 젊은것이 소리를 망치고 있다고 혀를찼다고 한다. 하기사, 1년을 사물을 치며 처음 풍물을 배우러 간 삐리들이 선배가 하는 이건 사물과 다르게는 말이야 하는 말에 지금 우리가 하는게 사물이 아니었냐고 묻는걸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또한 당시는 김덕수 선생이 틀을 깨는것처럼 보였을테니... 참고로 김덕수 선생이 사물을 정립했다 하더라도 모든 패가 사물을 칠 때 같은 가락만 치는것은 아니다.[8] 그래도 각 지방의 농악 풍물은 전수관이 돌아갈정도로 성하고, 전수하러 오는 이들 또한 끊이질 않고 있다. 각 패들은 자신들에 맞는 가락으로 사물을 치기에 두 패가 만나 합동공연을 하려면 맞추는데에만 꽤 연습해야 한다. 당장에 대학 전통예술연구회나 대학 풍물패만 하더라도 학교마다 달라 아직 맞붙기가 가능하다. 그러니 함부로 자신이 아는 사물가락이 아니라고 실수하고있다고 생각해버리는것은 뭣모르는 행동이니 주의해라. 이것은 비단 가락 뿐 아니라 치는 타법이나 채를 쥐는 지법, 심지어 장구의 경우는 앉는 법까지 모두 다르다.

4 주요 가락

  • 웃다리 사물놀이 : 경기·강원·충청 일대를 남사당 방언으로 웃다리라고 하며[9], 이들 지역의 대표적인 가락을 집대성한 가락이다. 길군악 칠채, 짝두름 등의 가락이 있다.
  • 영남 사물놀이 : 진주·삼천포의 풍물 가락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의 가락을 집대성한 것이다. 12채 길군악, 별달거리, 다드래기 등의 가락이 있다.
  • 호남 우도 사물놀이 : 전라도의 서쪽 해안 지역을 우도라고 부르며,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가락을 집대성한 가락이다. 오채질굿, 좌질굿, 풍류굿, 양산도, 세산조시 등의 가락이 있다. 호남 좌도 사물을 따로 치기도 한다.
  • 삼도 사물놀이 : 위 3대 가락을 모아서 하나의 악곡으로 편성한 것이다. 보통 호남 우도 대부분, 영남의 별달거리, 웃다리의 짝두름을 이어서 연주한다.
  • 설장고 : 장구잽이만 연주하는 가락. 최초에는 4명이 연주한 것이었으나 근래에는 그보다 적은 수, 혹은 더 많은 수로도 연주한다.
  • 비나리 : 고사 및 굿에서 부르던 고사소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가락으로 경기도 일대의 비나리 가락을 위주로 한다. 사물의 연주 가락을 반주로 꽹과리 연주자가 축원 덕담이라 부르는 사설을 부르는 것이다.
  • 판굿 : 사물놀이의 주요 가락 중 유일한 선반 가락이다. 앉아서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주요 포인트인 다른 가락과 달리 공연장이나 무대 위에서 악기를 메고 돌아다니며 진을 짜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는 형태의 가락이다.

5 주요 놀이꾼 및 놀이패

《사물놀이》: 김덕수, 김용배(작고), 이광수, 최종실, 강민석.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단》: 김덕수패의 사물놀이를 모태로 하여 1993년 창단


김덕수 - 장구

김용배 - 꽹과리
이광수 - 꽹과리, 비나리

6 게임화

과거 김덕수의 이름을 걸고 김덕수의 사물놀이라는 태고의 달인 냄새가 폴폴 나는 아케이드판 장구게임이 개발된바 있으나 대차게 망했다. 이후 사물비트라는 게임이 전주대학교에서 출품되었는데 역시 게임성은... [10]

모게임의 어느 영웅의 궁극기다
  1. 연주자들이 쓰고있는 긴 술이나 띠가 달린 모자.
  2. 박정희는 자신의 태생적 약점이었던 '친일'을 희석시키기 위한 의도로 다분히 '전통'과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 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3. 지금의 국립전통예술학교 출신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중심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박범훈'.
  4. 이전 서술에서 최태현, 이종대를 포함해 '남사당의 젊은 후예들'이라고 서술하였으나, 당시 연주에 참여했던 최태현은 해금 전공이었고, 이종대는 피리 전공이었다. 참고자료
  5. 2004년 1월 23일 방송된 KBS의 '인물현대사' 29회 김덕수편에 나온 진술에 의하면 78년 2월의 연주는 '급조된' 연주라고 했다.
  6. 불교에서는 법고, 운판, 목어(木魚), 대종(大鐘)의 네 가지 법구를 사물(四物)이라 칭했으나 사물놀이의 어원은 불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7. 한뫼와 같이 전국에 퍼진 범지역적인 풍물패의 경우 그 정도가 심하다.
  8. 자진모리도 한 종류만 있는것이 아니고, 굿거리도 한 가락만 있는것이 아니다!
  9. 자연스레 전라도와 경상도는 '아랫다리'가 된다.
  10. 개발자와 기획자간의 의견 충돌로 인해 개발자가 몇주를 도망다니다가 결국 잡혀가 겨우 개발된 망작이라는 후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