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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사천왕 | ||||
사카이 타다츠구 | 혼다 타다카츠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 이이 나오마사 |
榊原康政 (さかきばら やすまさ)
(1548 ~ 1606.06.19)
1 소개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아명은 코헤이타. 無자가 쓰여진 깃발을 들고 전장을 질주했다.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도쿠가와의 양대 야전사령관이다. 개인적으로도 둘이 동갑이라서 그랬는지 정말 친밀한 사이였다고.
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 이에야스의 삼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보좌역을 맡아서 평생 현역이던 타다카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약한 면이 있다. 세키가하라에서도 히데타다를 보좌했는데 여기서 히데타다는 이에야스를 지원하러 가다가 꼭 공격할 필요가 없었던 사나다 일족의 우에다 성을 공격, 결국 사나다 마사유키의 저항 끝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지 못하고 만다. 이에야스는 크게 실망해서 히데타다의 얼굴을 보지도 않으려 했으나 야스마사가 중재한 덕택에 겨우 대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법 학식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데, 욕은 확실히 잘했던 모양이다.[1]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 전에 도쿠가와 측의 도전장을 작성하여 히데요시를 매우 열받게 만들었는데, 이 때 히데요시는 야스마사의 목에 현상금을 십만석이나 걸었다고 한다.[2][3]
뼛속까지 무골인지라 학식 자체는 자기 이름이나 쓰는 정도였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 야스마사는 도쿠가와 가신단 중 능필가로 알려진 인물로 이에야스의 글들을 자주 대필하곤 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싸울 때 야스마사가 히데요시를 도발하는 도전장을 작성했던 것도 야스마사의 이런 이유에서 작성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에야스가 막부를 수립하고 관동지방에 다이묘를 배치하는 데 그 다이묘 배치의 틀을 제시하기도 했던 걸 보면 전형적인 무골은 아니었다.
후에 후계자 책봉에 관련하여 신하들이 묻자, '노신이 정치에 관여하는건 망조'라며 사양하고 은퇴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이에야스에게 중용되던 혼다 마사노부의 권세를 고까워해서 말을 저렇게 하고 물러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찌 되었든 창업공신이면서도 뒤끝이 아름다웠던 케이스지만 말년에 이에야스가 타다카츠와 같은 창업 무신들을 냉담하게 대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는지, 죽기 직전 이에야스가 보낸 사자에게 "나는 장이 썩어들어가서 뒈졌다고 오고쇼님(이에야스)께 전해라."고 쏘아붙였다. 과연 욕쟁이.
2 대중매체에서
2.1 슈팅 게임 바사라
성우는 타치키 후미히코.
파일:Attachment/Ii&Sakakibara.jpg
(오른쪽 부분이 사카키바라가 타고 있는 부분)
이이 나오마사와 같이 등장한다. 대개 사카키바라가 먼저 격파된다.
사카키바라가 혼자 남으면 구형탄을 발사하는데, 이이와는 달리 직선발사형이 아니기 때문에(조준형) 조금 힘들다[4]. 공통패턴은 이이 나오마사 참조.
2.2 노부나가의 야망과 태합입지전
창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