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엘 "블랙 샘" 벨라미(Samuel "Black Sam" Bellamy, 1689. 2. 23~1717. 4. 27.)
실존했던 해적들 중의 한명.
영국 출신으로 평생 1억 2000만 달러(2008년 화폐 가치 기준)를 털어 2008년 포브스가 선정한 역대 해적 약탈금액 리스트 1위에 올랐다.
주 활동 무대는 뉴잉글랜드 연안.
원래는 보통 선원으로 시작하여 1700년 초에는 신대륙으로 가서 부유한 스폰서의 지원을 받아 에스파냐의 보물선을 찾기 위해 플로리다 남쪽을 탐색했지만 실패하고 빈털터리가 된 채로 결혼하여 영국의 켄트주 켄터베리 근처 마을에 가정을 꾸리지만 황금과 보석으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아내가 떠나버린다.
아내가 떠나버리자 바다로 들어가 해적인 벤자민 호르니골드의 수하로 들어갔으며 그가 은퇴하자 선원들의 추대를 받아 선장이 되고 에드워드 티치를 추종하는 자들을 제외한 선원들을 이끌고 조타수인 폴그레이브 윌리엄스와 함께 1716년에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에서 악명높은 해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군함들을 교묘하게 피해다니며 50척이 넘는 에스파냐, 프랑스 함대를 약탈하고 그의 배는 상아, 수천 괴의 금, 은, 보석들로 가득 찼다고 하며 대담한 웅변술로 선원들은 주인처럼 따랐다고 한다.
28세로 죽기 전까지 50척 이상의 배를 털었는데 그 중에서 벨라미가 올린 최고의 히트는 1717년 2월에 노예 700명, 각종 연장, 의류, 설탕, 금과 은 4.5톤을 싣고 있던 '위다(Whydah) 호'라는 300톤 급의 노예선으로 이 배는 1715년 영국의 런던에서 건조된 것으로 서아프리카의 베냉으로 알려진 당시의 항구인 퀴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서인도 제도와 잉글랜드의 삼각무역을 담당한 범선이었다.
벨라미는 이 배를 자기 새 기함으로 삼고 - 당시 노예선들은 적재량은 물론이고 속도를 중시해서 건조되었는데(노예가 가다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빨리 털고 튀어야 하니까) - 자기가 쓰던 배를 이 배 선원들에게 타고 가라고 주었다고. 벨라미는 원래 자비로운 것으로 유명했고 그의 부하들은 자기들을 로빈훗의 부하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황당하게도......이 위대한 해적은 1717년 4월 26일에 케이프 코드에서 거대한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죽었다(...). 크게 한 건 올린 후 육지에 있는 애인(플로리다에 가기 전부터 사귀던)을 만나러 가다가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배가 매사추세츠 연안의 사주에 좌초한 것. 146명의 선원 대부분이 익사하고 9명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그중 7명이 체포되어 전원 해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6명(백인)은 처형, 1명(인디언)은 노예로 팔렸으며 살아남은 2명은 토마스 데이비스, 존 쥴리안이라는 선원이었다.
1998년 7월에 바다 속에 가라앉은 위다호의 모습이 발견되어 그의 배에서는 어마어마한 황금, 귀금속들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