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기도하다

暁に祈る

1 1940년 일본의 영화

1940년 4월 일본의 3대 영화사중 하나인 쇼치쿠(松竹)에서 제작, 개봉한 전시선전 목적의 전쟁영화.
사사키 야스시(佐々木康) 감독의 이 영화에는 정군애마보(征戦愛馬譜)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으며, 군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육군성 마정과에서 지도와 후원을 대폭 해 주었기 때문에 실제 부대원들이 출연하기도 하였다. 촬영은 주로 중국에서 이루어졌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치요는 목장을 이어받는 딸로, 어머니 시게로부터 목동 후유키와 결혼하면 어떻겠느냐고 듣지만 옆 마을의 신키치와 사귀는 사이로 신키치와 결혼해 버린다. 그래서 시게는 치요와 절연해 보린다. 어느 날 신키치가 군대에 징집되어버리는데, 신키치의 친구이기도 한 후유키는 시게에게 치요를 용서해 달라고 설득하지만 시게는 여전히 거절 상태이다.
이윽고 신키치와 치요가 기르고 있었던 말인 타로가 군대에 징발되게 되고 같은 시기에 후유키에게도 징집영장이 날아온다. 기병중사인 후유키는 대장과 교섭하여 타로를 받고 대륙으로 출진한다. 타로 덕분에 공을 세운 후유키는 신키치의 부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만나러 가지만 신키치는 전날의 전투에서 전사한 상태였다.
신키치의 전사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져, 시게는 딸을 데려가서는 재가시키려고 하지만 치요는 평생 신키치의 아내로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게는 그제서야 딸의 진심을 알고는 절연을 철회하며 사죄한다. 대륙에서는 신키치의 유골을 안은 후유키가 타로의 등에 타고 당당히 입성행진을 한다.

2 일본의 군가

위의 영화의 주제가로 쓰인 군가로, 영화와 같은 이름이다.
노무라 토시오(野村俊夫) 작사, 고세키 유지(古関裕而) 작곡의 이 군가는 영화의 대성공에 힘입어 레코드 판매도 대성공을 거두고 애창 군가의 목록에 그 이름을 올렸으나, 정작 당시 육군의 의도와는 다르게, 고향을 떠나서 전장을 헤메는 비극을 겪고 싶지 않은 병사들의 심정을 담은 반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원곡의 가사는 10절이 넘으나 대개 일부분만을 추린 4절 가사가 애용되고 있으며, 일본컬럼비아레코드의 1992년 출시음반 "일본의 군가 1"에는 4절 가사 버전이 녹음되어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あああの顔で あの声で 아아 그 얼굴로 그 목소리로
  手柄頼むと 妻や子が 공훈을 부탁한다고 처자식들이
  ちぎれる程に 振った旗 찢어질만큼 흔들어댄 깃발
  遠い雲間に また浮かぶ 저멀리 구름사이 다시 떠오른다

2 ああ堂々の 輸送船 아아 당당한 수송선이여
  さらば祖国よ 栄えあれ 잘있거라 조국이여 영광 있으라
  遙かに拝む 宮城の 저멀리 참배하네 궁성 있는
  空に誓った この決意 하늘에 맹세했도다 이 결의

3 ああ傷ついた この馬と 아아 상처입은 이 말과
  飲まず食わずの 日も三日 마시지도 먹지도 못한 날이 사흘
  捧げた生命 これまでと 바친 목숨은 이제 여기까지라고
  月の光で 走り書 달빛 아래에서 날려 쓴 편지

4 あああの山も この川も 아아 저 산에도 이 강물에도
  赤い忠義の 血がにじむ 붉은 충의의 피가 배도다
  故国まで届け 暁に 고국까지 전해다오 새벽에
  あげる興亜の この凱歌 올릴 흥아의 이 개가를

물론 육군이 영화에 적극 개입한 만큼 군국주의적인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전반적인 기조 자체는 전쟁이 낳는 비극과 그에서 오는 애잔함이다.

3 일본군 포로 린치사건

1949년에 알려지게 된 소련군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본군 포로 린치사건이다.

그런데 소련군이 일본군 패잔병에게 가한 린치가 아니라, 포로가 된 일본군이 다른 포로 일본군에 가한 린치 사건이다.

문제의 사건은 몽골울란바토르에 소련군이 설치한 포로수용소에서, 소련군측이 일본인 포로대장으로 임명한 이케다 시게요시(池田重善, 수용소 내에서는 본명 대신 요시무라 히사요시(吉村久佳)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중사가 다른 일본군 포로들을 수용소 내 노동과업량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독하게 린치를 가해 몇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린치방법은, 발가벗긴 후 나무에 묶어두고 아무것도 못 먹게 해서 굶겨죽이는 식이었고,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고개를 떨군 모습이 새벽에 보면 꼭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위의 군가의 제목을 따서 붙여졌다.

이 사건은, 송환된 포로들이 "요시무라 중사"라는 자가 일본인을 학대하고 있다고 증언한 것을 아사히 신문이 1949년 3월 특종보도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증언자 2명은 같이 일본으로 송환되어 온 문제의 이케다 중사를 고발조치했다. 결국 판결 끝에 그 해 7월 이케다는 징역 3년에 처해졌다. 그 이후 이케다는 1988년에 죽을 때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한때 변호사와 저널리스트들이 주축이 되어 재조사가 추진되었으나, 재심청구를 하기 전에 이케다가 죽었기 때문에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현재 이 사건은 가해자로 지목된 문제의 인물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본군 내의 가혹행위는 그들이 포로 신세로 전락해서도 여전히 심각했다는 것만은 여러 정황증거로 볼 때 개연성이 높다. 특히 소련군에게 무장해제 당한 뒤에, 이전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병사들이 소련군에 적극 협력하여 다른 일본군들을 앞장서서 학대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의 요시무라 중사가 아니더라도 일본인 가해자는 충분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사히 신문의 특종보도는 오보라는 주장이 많은 상황이다. 이케다가 소련군의 지시로 가혹행위를 한것은 있으나 나무에 묶어두고 굶겨죽이는 린치는 없었다고 하며 이는 이케다에게 징역 3년의 형을 선고한 재판부도 그런식의 린치 방식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라고 판결문에 명시했기 때문. 일각에서는 이케다가 가혹행위를 한것이 다른 린치 사례와 결합되어서 요시무라 중사가 이케다로 오인된게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한가지 기묘한점은 이케다는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정작 아사히 신문을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한바는 없다. 다만 한 책에서 자신이 언론의 오보에 의한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는 했다. 또한 소련군 포로경험을 가진 한 소설가가 자신의 포로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에서 자신을 요시무라 중사와 동일시 한 서술에 대해서 소설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일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