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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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울림왕(鬱林王) |
연호 | 융창(隆昌, 494년 1월 ~ 494년 7월) |
성 | 소(蕭) |
휘 | 소업(昭業) |
자 | 원상(元尙) |
생몰기간 | 473년 ~ 494년 9월 7일 |
재위기간 | 493년 8월 27일 ~ 494년 9월 7일 |
소소업(蕭昭業, 473년 ~ 494년, 재위 493~494)
재위 동안 융창(隆昌)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묘호는 폐위되었기 때문에 없고 시호는 전폐제(前廢帝). 울림왕(鬱林王)으로 강등되었기에 울림왕이라고 부른다.
1 개요
소소업은 소색의 적장손으로 송나라 원휘 원년(473년)에 태어났다. 자는 원상, 아명은 법신으로 문혜태자 소장무[1]와 왕보명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어릴 때는 경릉왕 소자량의 부인 원씨의 집에서 자랐고 남군왕을 거쳐 무릉왕에 책봉되었다. 건원 11년(493년) 정월에 아버지 소장무가 죽고 4월에 황태손이 되었다. 7월에 할아버지 소색이 죽자 중서랑 왕융은 교조를 위조하여 소자량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지만 소소업은 장남이 죽으면 장손이 뒤를 잇는 거임라고 자신의 존재감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황제가 되었다.
2 막장 행각
소소업은 용모가 단아하고 예서에 능했으며 말빨이 좋았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주도면밀하여 할아버지 소색이 총애했다. 그러나 품성이 악랄하고 음흉해서 많은 사람들을 속였는데 아버지 소장무가 살아있을 때 밤에 몰래 나가서 놀고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매번 그의 일상을 감시했다. 결국 소소업의 방문을 자물쇠로 잠그는 상황까지 갔지만 소소업은 별도로 열쇠를 만들어서 밤에 뒷문으로 나가서 시종들과 함께 제멋대로 나쁜 짓을 했다. 그래서 소장무는 생활비를 적게 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업은 은밀히 부자에게 돈을 꾸어 썼는데 한 나라 황제의 손자였으니 누가 감히 거절하고 갚으라고 촉박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서 황제가 되면 작위를 주겠다면서 먼저 돈을 요구했다. 문제는 황제가 된 후에는 돈도 갚지 않고 벼슬도 안 줬다.(...)이 새퀴가! 그는 즉위한 뒤 매번 돈을 볼 때마다 '내가 예전에는 너를 그리워하면서도 제대로 얻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너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겠구나!'라며 국고를 탕진해 버렸다.
무엇보다 소소업은 빨리 황제가 되고 싶어 아버지가 빨리 죽게 해달라고 무당 양씨에게 저주 기도를 하게 했다. 그렇게 소장무가 죽자 양씨의 공로로 인정하고 많은 상을 내려 더욱 신임했다. 그러나 장례식에서는 애통한 표정으로 대성통곡하며 마치 금방 숨이 끊어질 듯한 신들린 액션을 시전하여 구경하던 사람도 오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소색이 동궁에 이르러 소소업을 위로하자 소소업은 절을 올리면서 이번에는 기절할 정도로 통곡했다. 이에 소색은 가마에서 내려와 친히 부축하고 그후로는 더욱 총애했다. 그러나 소소업은 숙소에 돌아오면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았으며 황태손이 된 후에는 이번에는 할아버지 소색이 빨리 죽게 해달라고 저주 기도를 하게 했다. 이건 뭐(...)
그런데 이 기도도 효과가 있었는지 소색이 갑자기 병에 걸려 위중해졌다. 소소업은 소색의 병문안을 갔을때도 얼굴에 슬픈 기색이 가득하여 말마다 눈물이 나오고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를 본 소색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가 반드시 대성할 거라고 생각하고 네 아비를 생각해서라도 너를 반드시 황제로 세워야겠다라고 여러 사람 앞에서 선언했다. 그러나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는 태자비 하씨(하정영)[2]에게 자신의 서예 솜씨로 기쁠 희(喜) 자를 종이에다 쓰고 다시 그 둘레에다 36개의 작은 기쁠 희 자를 오려 붙이면서 둘다 실실 쪼갰다. 결국 소색이 숨을 거두고 입관이 끝나자마자 궁중기악을 불러 풍악을 울렸다. 이쯤 되면 아주 막나가고 미친 놈이다. 거기에 할아버지의 관이 궐문을 나가기도 전에 병을 핑계대고 궐로 들어와 술상을 차려놓고 마음껏 놀았고 즉위한지 10여일 후에 조정을 비방했다는 모함으로 왕융을 죽여 황위 계승 방해에 대한 원한을 갚았다. 또 익주 자사 유전이 공물이 적다면서 종신금고형에 처하기도 했는데 유전은 소소업이 죽고 나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3 재위기간 중 벌인 행각
소소업은 즉위한 후 할머니 왕태후(왕보명)과 어머니 배태후(배혜소)를 위해 남자 30명을 두어 식사부터 잠자리까지 여러모로 시중들도록 했다. 그의 작은 할머니 양씨[3]가 절제된 행동과 체통을 지키라고 하자 할머니! 불교에서는 복이 있으면 제왕의 집안에 태어난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반대로 이것은 큰 죄인 것 같습니다. 시장 구석 천한 장사꾼만도 못하네요.라고 개드립을 쳤다. 닭싸움과 말타기를 좋아하여 소색이 만든 초완전을 즉위 열흘 만에 허물고 경마장을 만들어 이름난 매들과 날쌘 개들을 수없이 키웠다. 말을 타다가 떨어져 이마와 얼굴에 가벼운 상처가 나자 이를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도 않고 항상 측근들과 함께 변복을 하고 거리에 놀라다니며 숭안릉[4] 앞에서 갖가지 더러운 짓거리를 했다. 돈을 내걸고 멀리 뛰는 내기를 하기도 하고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고 심지어는 진흙탕에서 뒹굴면서 노는 찌질한 놀이도 했다. 또 나무에 줄을 매달아 이빨로 그 줄을 들어올리는 차력을 좋아했는데 이걸 하다가 이빨이 부려졌지만 그래도 계속 했다. 또 황후 하씨와 총희들에게 고급 물품을 던져서 서로 맞추게 하고 이것이 깨지는 걸 보고 즐거워했으며 극히 음란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총희들을 간음했다.구멍동서 부창부수라고 하씨도 음란하여 황제의 측근 양민과 눈이 맞아서 붕가붕가하는 사이였는데 소소업은 이걸 알면서도 방치했다.
그는 오히려 24시간 궁문을 개방하여 사람들이 분별없이 드나들 수 있었고 하씨와 양민은 아예 부부처럼 지내며 밤을 불태웠다. 또 마음대로 측근들에게 상금을 주어 한번에 수십만냥까지 이르렀는데 소색이 국고에 축적한 8억만냥의 돈과 엄청나게 많은 금은과 비단 등을 즉위한지 1년도 안되어 모두 탕진했다.
4 최후
오촌 아저씨였던 서창후 소란이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지만 무시하고 오히려 딴마음을 품고 있다고 그를 제거하려고 했는데[5] 정작 실행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결국 그 사이에 소란은 위위 소심, 정남장군 소탄지와 함께 융창 원년(494년) 7월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다. 이에 소소업은 수창전에 있다가 총애하는 서씨의 방으로 들어가 검으로 자살하려고 하다가 손이 떨려 실패하고 이번에는 비단으로 머리를 칭칭 감고 목매달아 죽으려는 시늉을 했지만 소란의 부하들에게 걸려 죽었다.죽는 것도 연기 어쨋든 죽긴 죽었네 이때 2년간 재위했고 당시 나이가 22세로 울림왕으로 강등되었다.[6]
- ↑ 소색의 장남으로 대명 2년(458년)에 태어났다. 소도성이 즉위하자 남군왕으로 책봉되었다가 소색이 즉위하자 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영명 11년(493년) 소색이 사망하기 몇달 전에 사망했다. 소소업이 즉위하자 세종 문황제로 추존되고 능묘도 숭안릉으로 격상되었다.
- ↑ 미남이었던 하집의 딸로 어머니는 송나라 전폐제 유자업의 누이 산음공주(유초옥)다. 산음공주는 음란함으로 30여명의 남첩이 있었고 그 외에도 각종 음란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음란함 면에서는 어머니를 닮은 듯 하다.
- ↑ 둘째할아버지 예장왕 소억의 부인
- ↑ 아버지 소장무의 능묘
- ↑ 사실 소란은 겉으로만 간언하며 적극적으로 소소업을 막지 않았다. 더불어 딴마음도 품은 건 사실인 걸로 보인다.
- ↑ 황후 하씨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