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업

유송의 역대 황제
4대 세조 효무제 유준5대 전폐제 유자업6대 태종 명황제 유욱
[1]
묘호-
시호-
연호영광(永光, 465년 1월 ~ 465년 8월)
경화(景和, 465년 8월 ~ 465년 12월)
유(劉)
자업(子業)
생몰기간449년 2월 25일 ~ 466년 1월 1일
재위기간464년 7월 12일 ~ 466년 1월 1일

1 소개

유자업(劉子業, 449년 양력 2월 15일 ~ 465년 음력 11월 29일, 재위 464년 양력 7월 12일 ~ 465년 음력 11월 29일)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다섯번째 황제. 유준의 장남으로 후폐제 유욱과 더불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약 1년여 동안 가감없는 막장을 부렸다.

짧은 재위기간 동안 초기 5개월 간은 효무제의 대업, 중반 465년 음력 정월부터 8개월 간은 영광(永光), 후기에는 4개월 간은 경화(景和)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폐위됐기 때문에 묘호는 없으며 시호는 폐황제(廢皇帝). 명제 유욱의 아들도 폐제가 됐기 때문에 유자업을 전폐제, 명제 유욱의 아들 유욱을 후폐제로 구별한다.

원가 26년(449년) 정월에 효무제 유준과 왕헌원[2]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4살 때 큰아버지 유소의 난으로 감옥에 갇혀 죽을 뻔 했다가 난이 평정된 후 구출되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해 지식이 많고 똑똑했으며[3] 문장도 곧잘 지었다.

2 불효

유자업의 외모는 눈매가 날카롭고 입이 튀어나왔으며 목이 긴 흉하고 기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성질이 급하고 실수가 많아 아버지 유준의 질책을 많이 받았다. 이에 황제가 된 후 보복심에 아버지의 묘를 파헤치려고 하다가 신하들의 강력한 간언으로 그것은 관두고 결국 찌질하게 아버지를 코주부라고 욕하며 을 묘에 뿌리고 돌아갔다.

뜻(?)을 이루지 못한 유자업은 고모이자 효무제의 총애를 받던 계모 은귀비의 묘를 파헤쳐 버렸다. 그런 다음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사촌동생이기도 한 유준의 8남 유자란을 사약을 내려 죽였는데 이유는 유준이 사랑하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유자란은 유준과 은귀비의 아들로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유준은 숙부 남군왕 유의선의 딸이자 사촌 여동생이었던 유씨를 취한 다음 은씨로 이름을 바꿨다. 그렇게 후비로 삼은 뒤 낳은 아들이 유자란이었던 것이다. 유자란은 당시 10세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죽음을 앞두고 내세에는 황가에서 태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 유준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스포일러

그러면 유자업은 생모인 태후에게 효도했느냐? 당연히 그것도 아니다. 유자업은 어머니 왕씨(왕헌원)가 아파서 불렀는데 환자들이 있는 방에는 귀신들 천지라는데 내가 어떻게 가겠는가?라면서 가지 않자 왕씨는 내 배를 가르거라. 내가 어떻게 저런 비린내 나는 짐승을 낳았는지!라며 분통을 터뜨리다가 죽었다. 네로 엄마 아그리피나?

효무제 때의 중신인 대법흥(戴法興)마저 축출한 뒤 곧 그를 죽이니, 행실이 꺼릴 것 없이 더욱 방자해졌다.

3 근친겁탈

유자업의 아내 하씨(하영완)[4]가 있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하씨(하영완)는 대명 5년(461년)에 죽었는데 남편은 폐제가 되었지만, 그는 헌황후로 추존되었다. 그러니까, 유자업은 즉위 당시 본처가 없었다.

황후 없는 황제 유자업은 아버지보다 도를 넘어선 황음무도한 생활을 했다. 유의륭의 10녀이자 유준의 친여동생인 고모 신채공주(유영미)를 겁탈하고 궁중의 한 여종을 살해해서 신채공주가 죽었다고 소문내고 장사까지 치뤘다. 물론 진짜 신채공주는 귀빈으로 삼아 성을 사씨로 고쳤으며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덤으로 고모부 하매는 죽였다.(신채공주는 그 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게다가 일찍이 친누나 산음공주(유초옥)와 근친상간을 했다. 어느 날 폐하는 육궁에 후궁이 많으면서 신은 겨우 부마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매우 불공평합니다.라는 식으로 산음공주가 불만을 가지자 유자업은 산음공주에게 면수, 즉 아름다운 남첩 30명을 선물했다.

산음공주는 남편 하집이 미남이었고 30명의 남첩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만족하지 못했다. 하집은 하언의 아들이었으며 첩으로 송씨가 있었다. 산음공주는 의원을 유혹해 음욕을 채우고 거기에 당대의 미남이었던 이부랑 저연을 유혹했다. 문제는 저연은 남군공주의 부마로 남군공주는 산음공주의 고모였다. 즉, 저연은 산음공주의 고모부였던 것이다. 친동생과도 했는데 고모부쯤은 산음공주는 동생 전폐제에게 허락을 구했는데 차마 고모부에게 목적을 설명하기가 그랬는지 조서를 내려 무조건 산음공주 집에 가도록 했다. 산음공주는 저연이 오자 끊임없이 유혹하고 온갖 추태와 교태를 다 부렸지만 저연은 당대의 인재답게 유혹을 거부했고 산음공주는 결국 포기했다. 이런 음란한 산음공주는 전폐제가 죽은 후에 바로 처결됐는데 진짜 불쌍한 것은 산음공주가 데리고 살던 30명의 남첩들로, 그들은 산음공주의 무덤에 순장되었다. 당시 산음공주의 나이는 19세에서 20세에 불과했다. 산음공주의 외동딸이 바로 나라 욱림왕 소소업의 음란한 황후 하씨인 하정영이다. 하정영이 산음공주가 아니라 하집의 첩 송씨의 소생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에는 산음공주의 소생으로 되어 있는데 하정영도 음란함이라면 어머니 산음공주에게 뒤지지 않는다. 참고로 저연은 겉과 속이 모두 아름다운 남자로 개인적인 성품과 인격, 수양, 능력이 모두 뛰어난 엄친아였다. 음란하고 사치스러웠던 당시에 매우 드문 인물로 유송이 망하고 남제가 들어서고도 승승장구해서 고위직이었던 사도까지 승진해 뛰어난 정치 업적을 남겼다. 이는 물론 한족 왕조가 군주의 성만 바뀌는 유력 귀족의 국가였다는 증거가 된다.

유자업은 거기다가 유휴인의 어머니였던 양씨[5]에게 온갖 음란한 짓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좌우 심복들에게 양씨를 범하도록 했는데 이 때 그들 중에서 유도륭이 환심을 얻으려고 온갖 추악한 짓을 하며 양씨를 강간했다. 거기에 유휴인의 아내 은씨는 병이 들어 진찰하러 온 잘 생긴 조번이라는 의원이 오자 병 치료는 제쳐두고 조번과 간음했다. 하지만 이게 누설되자 조번은 죽음을 당했다.

4 근친능욕

유의륭의 9남 의양왕 유창[6]은 황실의 종친 가운데 가장 힘이 강한 인물이었다. 유자업이 즉위하는 대명 8년(464년) 8월에는 정북장군, 서주도독, 연주, 남연주, 청주, 기주, 유주, 예주를 감독하며 서주자사가 더해졌으니 말이다.

조카였던 유자업의 즉위를 경하하기 위해 마땅히 수도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유자업은 오직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숙부 유창을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유창은 가만히 죽기 싫어서 경화 원년(464년) 8월에 건강에 가지 않고 그날로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홀로 적국 북위로 망명했다.(유창이 망명한 후 남겨진 유창의 처 오씨와 아들 유사원과 유회원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유창은 북위로 망명하고 나서 북위 문성제(북위 네 번째 황제)에 의해 단양왕에 봉해지고 정남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제의 무읍공주와 결혼해 부마도위가 되었다.[7] 유창은 내란을 피해 적국 북위로 망명해서 선전용으로 이용당했지만 유창의 자손들은 계속 살아남아 유송이 망하고 소도성에 의해 유씨가 모두 없어진 상황(!)에서 대를 이어 나갔다.[8]

그런데도 유자업은 정신을 못 차리고 일부러 만만하거나 의심스러운 숙부들을 골라 함부로 대했다. 숙부들을 벌거벗기고 참대나무로 만든 우리에 가두어 머리만 내밀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저울로 재기도 하고 곤장을 치기도 하고 나무 그릇에 여물을 먹게 하기도 하는 등 온갖 모욕과 능욕을 가했다. 숙부들을 조교 그 숙부들이란 바로 유의륭의 11남 상동왕 유욱, 유의륭의 12남 계양왕 유휴인, 유의륭의 18남 건안왕 유휴범, 유의륭의 8남 동해왕 유의였다. 유자업은 그들을 순서대로 각각 돼지왕, 살인왕, 도적왕, 나귀으로 봉했다.기안84? 유의는 머지않아 석방(?)되었으나, 유욱, 유휴인, 유휴범은 계속 대나무 우리에 갇혀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엄청난 칭호를 받은 이유는 돼지왕 유욱은 매우 뚱뚱해서[9], 살인왕 유휴인은 매우 인상이 험악해서, 산적왕도적왕 유휴범은 매우 탐욕스러워서, 나귀왕 유의는 매우 어리버리해서[10]라는 무시무시한 이유였다.

유자업은 숙부들 중에서도 왠지 유욱을 가장 미워했다. 자기 첩 중 하나가 아들을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11] 그 뱃속의 아기를 황태자로 삼고 기념 잔치에 쓸 제물 겸 유희 유욱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유휴인이 태자가 태어나야 기념으로 돼지를 잡는 겁니다.라고 말하자 유자업은 오오, 그런가? 그럼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잡아먹어야지(...)라며 잡는 것을 유보했다.

5 근친살해하다 자기도 죽다

고조 유유의 4남이자 작은할아버지였던 강하왕 유의공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포착되자 유의공을 죽여 시체를 8조각으로 자르고 배를 갈랐으며 눈알을 뽑아 꿀에 넣어서 '귀목종'[12]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유의공의 남은 네 아들까지 모두 죽였다.[13] 그 외에 대대로 세번째 아들이 황제가 됐다는 이유로 종실의 셋째 아들들을 골라 죽이기도 했다.[14]

이렇게 기괴귀축한 삶을 살던 유자업의 끝장 역시 황당했다. 어느 날, 꿈 속에서 어떤 여자가 자신을 저주하자 그 여자와 비슷한 여자를 잡아 죽였다. 하지만 죽림당에서 궁녀들과 알몸 숨바꼭질을 하던 중에 그 여자 귀신을 보고 귀신 잡으러 다니다가 대기하고 있던 환관 수적지 일당에게 살해당했다. 으앙 쥬금 죽은 뒤 단양 말릉현 남교단 서쪽에 매장되었다.

다시 한번, 간과하기 쉬운게 있는데 유자업의 크고 아름다운 폭정들은 겨우 1년 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자업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1월 1일에 죽었으나, 음력이 아니니 착각하지 말 것. 더구나 당대에는 서구도 그레고리력을 쓰지 않았다
  1. 생몰년을 계산해보면 수염이 난 게 좀 이상하긴 하다.
  2. 동진 간문제 사마욱의 증손녀이다.
  3. 특히 사서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전대의 선행은 배우지 않았는데 오히려 조조가 만든 공식 도굴꾼 자리인 발구중랑장(역대 황제의 묘를 파헤쳐 부장품을 도굴하는 벼슬)과 모금교위(관료들과 백성들의 무덤을 파헤쳐 금은보화를 도굴하는 벼슬)에 관심을 뒀다고 한다. 실제로 계모이자 고모였던 은귀비의 무덤을 파헤치고 부장품을 싹쓸이 하기도 했다.
  4. 아버지는 하우였으며 어머니는 무제 유유의 딸 예장공주 유씨(유흔남)이었다. 예장공주는 원래 서교와 결혼했다가 서교가 요절하자 하우와 재혼했으며 하매와 하씨를 낳았다. 그리고 하매의 아내가 신채공주로, 유자업에 의해 하매는 살해당하고 신채공주는 첩이 되었다(...).
  5. 유의륭의 미인으로 이름은 양수의
  6. 자는 휴도였으며 원가 13년(436년)에 유의륭과 사용화 사이에서 9남으로 태어났다. 원가 22년(445년) 3월에 의양왕에 봉해지고 식읍 2천호를 받았다. 원가 27년(450년), 임보장군, 남패태수, 하비태수에 임명되었으며 원가 30년(453년)에는 동중랑장이 더해졌다. 효건 원년(454년) 8월에는 이복형 유준이 동양주자사로 임명했다.
  7. 유창은 무읍공주가 죽자 건흥장공주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였고 건흥장공주가 죽자 다시 평양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태화 17년(493년), 북위 효문제(문성제의 손자로 헌문제의 아들)는 유창을 제공으로 봉하고 송왕의 칭호를 더했으며 태화 18년(494년) 8월에는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유창은 태화 20년(497년) 6월에 팽성에서 6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으며 명(明)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태부, 영(领) 양주자사가 추증되었다.
  8. 유창은 북위에서 다시 가정을 꾸려 유승사, 유문원, 유휘를 낳았으며 유창의 적자 유승사가 유창의 작위를 잇고 문성제의 딸 팽성장공주와 결혼하여 부마도위가 되었다.
  9. 사실 유의를 제외하면 모두 뚱뚱했는데 유욱이 제일 뚱뚱했던 모양이다.
  10. 사실 유의는 어리석어서 다른 황족들도 그를 무시했다.
  11. 유자업은 자기 첩들을 심복들과 함께 공유(?)했기 때문에 유자업의 자식인지, 심복들 중 하나의 자식인지 알 수 없다.
  12. 귀신눈깔떡이라는 뜻이다.
  13. 유의공은 아들이 16명이었는데 이전에 유소에게 열 두 아들을 잃었었다. 따라서 이 때 유의공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14. 실제로 유자업의 할아버지 유의륭과 아버지 유준이 셋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