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율희

蘇律熙

1 개요

후삼국시대에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를 차지했던 호족 세력.

2 생애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후고구려후백제의 양강구도+겨우 버티는 신라의 후삼국 구도가 거의 완성되었던 908년, 그 이전에 김해지역을 지배했던 호족 김인광을 형 소충자와 함께 몰아내고 진례성[1]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911년 제작된 광조사 진철대사 탑비의 기록에는 소충자가 빠지고 동생 소율희의 이름만 있는 것으로 보아 3년 새에 소충자가 급사했거나 혹은 소율희가 배신하고 세력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세력을 차지했지만 왕건이나 견훤처럼 따로 왕을 칭하거나 왕봉규처럼 독자적인 행보는 걷지 않고, 멀지 않은 경주의 신라 조정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세력 중 하나였다.

한편 후백제왕 견훤은 920년에 대야성을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함락시켰는데, 김해 진례성은 당시 후백제에서 신라 서라벌로 쳐들어가는 주요 루트 중 하나로, 신라를 완전히 박살내는 것을 목표로 하던 견훤은 당연히 소율희의 진례성을 겨누게 된다. 이 때 신라 경명왕이 왕건에게 진례 방면에 구원군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소율희의 요청이 있었던 듯. 이후 후백제와 고려가 경상남도 일대에서 계속 투닥거리면서 그 사이에 끼인 소율희도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가 되어 몰락한다.

선종(불교)을 후원하였고 당시 김해는 선종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1. 지금의 경남 김해시 진례면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