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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 |
백제 百濟 | ||
공식명칭 | 백제[1] | |
위치 | 한반도 서남부 | |
수도 | (무진주)[2] → 완산주[3]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왕(王) | |
국성 | 황간 견씨[4] | |
종교 | 불교 등 | |
존속기간 | 900년 ~ 936년 9월 (약 36년) | |
주요사건 | (892년 견훤 칭왕) 900년 후백제 건국 선포 909년~914년 나주 공방전 920년 대야성 점령 927년 서라벌 점령, 공산 전투 930년 고창 전투 935년 신검의 쿠데타 936년 일리천 전투 | |
성립 이전 | 통일신라 | |
멸망 이후 | 고려 |
목차
견훤의 내용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같이 읽으시면 좋습니다.
1 개요
(後)百濟
후삼국시대의 국가.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이 군사를 일으켜 세운 나라로, 국호는 옛 삼국시대의 '백제'에서 따 왔다. 공식 건국한 900년에서 936년까지 2대 37년간 존속했다. 후고구려→고려,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의 세 나라 중 하나.
견훤이 왕을 칭하며 독자세력화한 시기는 이미 892년부터였고 '백제'로 국호를 정한 것은 900년이다. 견훤이 칭왕한 시점부터 계산하면 2대 45년, 완산주(전주)에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로 정한 때부터 계산하면 건국 36년만에 멸망한 단명한 국가였다. 도읍은 완산주(오늘날의 전주시).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당시에는 당연히 스스로를 백제라 일컬었다. 참고로 멸망 당시 옛 백제의 국호는 성왕이 정한 남부여라고 보기도 하고, 남부여라는 이름은 딱 성왕 시절에만 쓰였다고 보기도 한다. '후백제'라는 이름은 후대의 역사사가들이 이전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5] 그런데 정작 후백제의 창업군주이자 그 자체나 다름없는 견훤은 옛 백제와 별로 관련없어 보이는 경상도 문경 사람(…). 《삼국사기》에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상주는 신라 9주 5소경의 하나로서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이었고 상주 관할 군현 중에 가은현은 현재의 문경에 비정된다. 실제로 현대에도 문경시에 가은읍이 속해 있기도 하다.[6] 상주시에 견훤이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견훤산성'이 있는데, 이것도 현재 행정구역 소속상 상주라는 것이지 문경에서 더 가까운 위치의 산자락에 있다.
후삼국시대의 시대범위가 학자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견훤의 칭왕(892년)부터 후백제의 멸망(936)까지로 비정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후백제 건국으로 후삼국시대를 열었고, 후백제 멸망과 함께 후삼국시대가 끝나는 등 역사적 의의가 작지만은 않은 나라다.
궁예의 후고구려와 경쟁을 벌였으며 궁예가 왕건에게 축출된 후에는 왕건의 고려와 경쟁을 벌였다. 고려가 무력해진 신라 조정에 대해 우호적 포용정책으로 일관한 것과 반대로 후백제는 후삼국시대 내내 신라의 서부 국경지역(대야성, 강주 및 상주 지역)을 공격하며 적대적 정책을 폈다.
2 역사
2.1 건국
상주 호족 아자개의 아들로 본래 신라의 무관이었던 견훤은 서남해(전라남도 지역)에 배치되어 해적[7]을 소탕하고 있다가, 신라가 점차 쇠망의 길을 걷고 있음을 느끼고 서기 892년에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견훤에게 가담했다고 한다. 견훤과 그의 군대는 진군하여 무진주와 완산주(전주)를 점령하였다. 이후로 해당 지역을 통치하며 내부적으로 왕을 칭했다. 다만 외부에는 감히 왕을 칭하지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서명했다. 일단은 신라의 신하라고 간판을 내건 것이다. 비슷한 시기 북쪽에서 양길의 세력이 강해지자 비장(裨將) 벼슬을 이 쪽에서 하사하는 식으로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8년 동안 이런 식으로 군림하다가 900년부터는 의자왕의 숙원을 풀고 옛 백제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후백제를 칭했다. 이는 곧 해당 지역에 살던 백제 유민들의 지지를 얻어 영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국호를 백제라고 했다. 또한, 무진주 대신 옛 백제의 중심에서 가까운 지역인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았고 나라 각지에 관서를 설치했다.
이후에 바다 건너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본격적으로 영토확장정책에 나서서 여러 성주들을 굴복시키고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그러던 와중에 북부의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고려)와 웅주(충청남도) 지역으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면서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미 신라는 김헌창의 난 때와는 달리 견훤과 궁예의 세력을 스스로 제압하기에는 너무도 쇠약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한반도의 세력은 남서쪽의 후백제와 북쪽의 후고구려로 양분되다시피 하였다. 다만 신라 역시 후삼국시대 초기까지는 공세적으로 나설 군사적 힘을 잃었을 뿐, 여전히 많은 호족들과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수세적으로 두 나라를 막아낼 여력은 남아 있었으며 삼한 백성과 호족들이 인정하는, 수백 년 동안 종주국이었던 확고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2.2 후고구려/고려와의 대립
궁예의 재위 당시인 903년에 왕건의 공격으로 금성(나주시, 지리적으로는 목포시나 무안군이라고 보기도 함) 일대를 잃어 해상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비록 나주 일대를 빼앗기며 형세는 불리해졌지만 후백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땅 중 하나인 지금의 전라도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후고구려에 밀리지 않는 국력을 갖고 있었다.
이후에도 후고구려와 지속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에 918년에 후고구려의 명목상 2인자 위치였던 왕건이 폭정을 일삼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친궁예 호족들이 반발해 견훤으로서는 고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견훤은 축하사절을 보내는 등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반발하는 일부 세력들은 견훤에게 붙으면서[8] 점차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924년에는 조물성에서 백제군과 고려군이 충돌하였는데, 서로 화친을 맺고 인질을 교환했다. 삼국사기에는 왕건이 견훤에게 밀려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에서는 견훤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고려에 볼모로 갔던 견훤의 조카 진호가 갑작스럽게 죽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여 고려측에서 볼모로 왔던 왕건의 사촌동생 왕신을 살해하였고 곧 다시금 양국간에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2.3 신라와의 대립
왕건이 이미 무력해진 신라에 우호적인 포용정책을 펼친 것에 비해 견훤은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공약 그대로 신라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삼국시대 시절부터 영남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대야성을 901년, 916년, 920년에 세 차례 공격했고, 대야성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기 때문에 견훤의 친정에도 불구하고 막아내다가 결국 920년에 함락당한다.
이후 신라 경애왕은 고려와 협력하고 후백제와 적대하는 정책을 폈다. 영남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얼마 안 되는 정도나마 신라군을 보내서 고려에 군사지원을 하기도 했고, 후백제와 고려군이 전투 끝에 소강상태를 보이자 왕건에게 좀 더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우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놓고 친고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애왕을 견훤은 고깝게 여겨 927년에 견훤이 친히 이끄는 후백제군이 신라 서라벌을 침공해 경애왕을 죽이고 서라벌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다만 아직 신라 천년사직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엔 명분이 부족하다 여겼는지 박씨 대신 김씨인 경순왕을 신라왕으로 다시 세웠다. 이때 후백제군은 철군하던 도중 신라를 구원하려 온 고려군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를 공산 전투에서 격파하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고려사 유금필전을 보면 후백제는 궁예 시절부터 뒷통수의 골칫덩이였던 나주까지 되찾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수차례 고려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하였다.
2.4 멸망
그러나, 930년에 고창 전투에서의 패배로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고창은 지금의 안동인데 흥미로운 점은 고창의 이름이 안동이 된 것이 이 전투 때문이라고 한다. 해당 내용은 고창 전투 문서 참조. 이 때 견훤에게 불만을 품었던 일부 호족들이 고려로 투항하면서 영토 손실도 커졌다. 특히 932년에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매곡성의 청원 일대를 상실하였고, 934년에는 견훤이 지휘하였던 최후의 전투인 운주 전투에서 유금필의 급습으로 패하면서 후백제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후계자 문제까지 불거졌다. 견훤은 장남이었던 신검 대신 금강 왕자를 후계자로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창업군주인 견훤을 유폐하는 사태에 이르었다. 견훤은 금산사에 3개월 정도 갇혀 있다가 탈출한 뒤에 아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평생의 적이었던 고려로 망명했다. 신검은 나름대로 혼란한 후백제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펼치고 중국에도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1년 뒤 견훤은 고려왕 왕건과 함께 선산 일리천(현 경북 구미시 선산읍) 전투에 참전하여 후백제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위에서 쫓겨났다고는 하나, 후백제 그 자체나 다름 없었던 자신들의 건국군주 견훤이 적진에 있는 것을 본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싸움도 해보기 전에 투항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속출하면서 결국 백제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며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일리천 전투 문서 참조. 그리고, 936년에 후백제왕 신검이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멸망했다. 결국 견훤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 기구한 운명을 맞고 만 것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바로 그 해에 견훤도 병사하였다.
3 사회
3.1 건축
전주 후백제 왕궁 추정지 (동아일보 2014년 4월 16일 기사).
후백제의 궁전이 있던 곳은 현재 네 곳 중 하나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엔 현 전주시청 동쪽인 물왕멀 일대,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동고산성, 21세기 들어서는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있던 완산구 중앙동 일대, 이후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리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후백제 당대에 지어진 목조건물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일부 석조건축의 터들이 남아 있다.
3.2 정치 체계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비록 백제를 계승하였다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본인부터 신라계이며 신라의 장수로 활동했던 경험 때문인지 후백제를 세우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후에도 신라의 관등명과 관직체계를 그대로 사용했다. 능환이 신라 관등 체계의 2등위인 이찬(伊飡) 벼슬을 지냈던 것과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 역시 신라 제7관등에 속하는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지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훗날에 견훤이 신라의 도읍인 경주시까지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함으로써 신라를 반속국화하고, 정치적으로 후백제에 귀속시켜 사실상 망하게 만들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왠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어떤 국가가 멸망하고 복국운동이 일어날 때 지배국가의 관제를 실용적 이유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흔하다.
후백제는 외적으로는 신라의 왕을 섬기는 부용국으로 행세했으나, 실상은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니고 천자처럼 행세하였음이 연구를 통해 분명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후백제가 신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는 나라였음을 표방한 면은 처음에 견훤이 세력을 일으켰을때 함부로 왕이라 칭하지 않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라 자칭했던 점과, 삼국사기 및 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는 왕건에게 보낸 서찰에서 스스로 '존왕(尊王)'의 의(義)를 두터히 하고 사대(事大)의 정(情)을 깊이 하였다.' 운운하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한반도 내부의 친신라계 호족들의 반감을 덜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신라를 적대했기 때문에 왕건 고려의 포용정책에 비해서 효과는 적었던 편이다. 후백제가 일본에 사신을 여러 번 보냈을 때도 후백제가 말이 후백제지 실상은 신라의 신하라는 점을 문제삼아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했다.[9] 그러나 한편으로 후백제가 독자적인 천하관과 연호를 지니고 있었음은 편운화상(片雲和尙)의 부도에 새겨진 후백제의 연호인 정개(正開)를 통해 알 수 있다. 승려 편운화상이 죽은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부도는 당시 견훤의 세력권에 속하였던 남원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부도의 금석문에는 부도를 세운 시기를 정개 10년, 경오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경오년이란 곧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정식으로 왕을 칭한지 10년이 되는 서기 910년을 뜻한다. 즉 견훤은 900년에 정식으로 후백제를 개국하면서 일찍이 정개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후백제가 곧 신라를 의식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국이라 자처하였음을 내외에 표방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는 궁예가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연호인 정개(政開)와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
궁예의 후고구려, 왕건의 고려가 그랬듯이, 후백제 역시 기본적으로는 중앙집권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호족 연합체와 같은 성격이 강했다. 견훤 역시 왕건 비슷하게 여러 명의 아내와 최소 10명이 넘는 자식들을 가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왕건이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의 딸이나 친족들과 혼인하여 혈연관계를 맺었던 것과 같은 사례였을 것이다. 이는 신라 골품제의 폐쇄적인 혼인 풍조와는 대조적인데, 과거 김유신은 무열왕과의 혼인 동맹을 위해서 상당히 무리한 계략을 썼으며, 바다를 주름잡은 대호족 장보고조차도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드는 것은 약속까지 받아냈음에도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신라 중앙과 거리가 있는 각 지방의 호족들은 왕족과의 결혼을 통해 중앙 권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고려, 후백제의 체계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3.3 군사
후백제의 군사력은 이미 다 쓰러져 가던 신라는 논외로 치고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후고구려나 고려의 군사력에 비해 매우 강대한 편이었다. 이는 우선 후백제의 왕인 견훤의 출신 성분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본래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던 점도 있었지만 후백제가 자리한 호남 지방에 비옥한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었던 것도 한몫하였다. 특히 공산 전투에서 견훤이 왕건을 크게 이긴 후에 조서를 보내어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어두고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고 싶다."라며 반협박 수준의 말을 한 것도 이렇게 튼튼한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역으로 삼국유사에는 견훤이 "아오 왜 우리는 고려보다 군사가 갑절이나 많은데 이기지 못하냐"하는 식으로 한탄하는 기록도 나온다.
기록에 보면 후백제군의 군대의 구성은 크게 보병대와 기병대, 수군으로 나뉘었으며, 특히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병대는 정예병으로 쳤다. 실제로 견훤은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철기병을 대규모로 운영한 군주였다고 한다. 다만 중무장 기병을 정예병으로 치는 것은 고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로도 중기병을 애용하였다. 오히려 중기병이든 경기병이든 편제상으로는 고려가 후백제에 앞서 있었는데, 이는 후백제의 영토인 전라도 일대가 비옥한 곡창지대이긴 하지만 넓은 평원 농지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대규모의 기병 양성은 힘들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때문에 후백제군의 전력은 보병 중심이었다.
후백제 수군의 경우에는 초기에는 그리 강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여기지며, 특히 해전에 능하였던 왕건의 공격을 받아 후방을 늘상 털리기만 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후백제 후방의 금성(전라남도 나주시)을 빼앗겼던 일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나주 해안가를 고려군이 점령하면서 후백제는 늘 후방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한쪽 다리를 묶은 상태로 고려군과 대적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외국과 교역을 할 수있는 해상로가 줄어들었고 경제력도 크게 상실하였다. 다만 후에 나주를 회복하고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나 상애 등이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도읍인 개경 근처의 해안까지 진출해 깽판을 쳤던 기록을 보면 갖은 굴욕을 당한 이후로 나름대로 수군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건이나 궁예가 그랬듯이 후백제의 왕인 견훤 역시 직접 전장에 나서서 군대를 통솔하는 친정 지휘 체계를 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견훤 자신이 군인 출신이라 군을 지휘하는 데에 자신이 있었던 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왕이 직접 전장에서 공을 세워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기록에 따라서 굳이 왕이 전장에 나서지 않고 왕자들과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했던 사례도 없지는 않다. 견훤의 아들인 수미강(신검)이 군대를 지휘했던 기록도 간간히 보이고, 특히 수군대장인 상귀나 상애는 직접 수군 함대를 이끌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개 왕이 친솔하는 중앙군이 아닌 지방에 파견된 장수나 도독들이 지휘하는 지방군인 경우일 것이다. 또한 중앙군 중에서도 왕이 언제나 친솔하지 않는 부대와 언제나 왕의 친솔을 받는 친위군이 따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견훤의 측근이었던 김총은 견훤의 인가별감이 되었는데, 이 인가별감이라는 직위가 곧 견훤의 친위군의 장으로 추정된다.
3.4 대외관계와 외교
3.4.1 한반도 외교
후백제는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일으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신라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였다. 신라의 입장에서 후백제는 반란군이 자신들의 영토에 세운 반국가단체(?)나 다름이 없었고, 견훤도 경상도 지역으로 줄어든 신라를 자주 침략하는 등 그리 우호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 왕조의 정통성은 다 망해가고 있던 발해를 제외하면 다름아닌 신라에 있었다. 아무리 후백제가 군사적으로 신라를 압도한다고 해도 신라가 1000년에 걸쳐 이룩한 역사와 정통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견훤은 일단 형식적으로는 신라의 왕과 군신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견훤이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여놓고서도 신라를 함부로 병합하지 못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는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며 극렬히 적대하였던 궁예의 태도와 대비되는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아자개, 소격달 등 영남 지역의 호족들은 대부분 후백제보다는 고려에 협력하는 쪽을 택했다. 고려에 비해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가 그렇게 좋게 비쳐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편, 후고구려나 고려와는 대립했다. 특히 왕건보다도 더 호전적인 성격의 궁예 시절에는 늘 싸우기만 했다.
물론 왕건이 처음 고려를 세웠을 때에는 선물을 보내주는 등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고려와는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다투지 않을 수 없었던 사이였기에 결국은 과거에 후고구려와 싸웠던 것 처럼 언제나 군사적으로 대립 관계를 유지하였다. 물론 조물성에서의 사례처럼 일시적인 화친을 맺는 경우는 있었다.
3.4.2 해외 외교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은 젊은 시절을 신라 서남해안가에서 해적을 소탕하며 보내었던 경험 덕분인지 바다 너머에 있는 해외의 나라들과 국교를 트는 것을 중히 여겼다. 때문에 원교근공책을 채택해 가까운 고려와 신라와는 대립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바다 건너 외국들과 지속적인 소통을 시도했다.
당시 중국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기라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는데, 십국 중 하나인 오월이나 오대 중 하나인 후당에게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기도 했다. 삼국사기의 견훤 열전에는 925년에 후당으로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은 기록이 있으며, 중국 측의 사서인 '오대사'에 936년 1월에 후백제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한 기록이 있다. 오대사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신검이 즉위했을 때이므로 이것은 신검이 자신의 정변을 중국측에 알리고 국제적으로 자신의 정권을 승인받기를 노린 것이다.
일본측의 기록을 보면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해 통교하려고 했던 기록이 있다. 장언징(張彦澄), 휘암(輝巖) 등의 인물을 대마도에 보내 통교를 요구했지만 견훤을 '신라의 신하'라고 규정하여 통교를 거부당하고[10] 대마도에서 약간의 식량만 받고 돌아왔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일본이 처음부터 후백제를 신라의 신하로 규정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옛날 삼국시대 때 왜와 우호 관계였음을 내세우는 후백제의 메시지에 상당 부분 호의를 보였으며 사실 통교하려고 했다.[11] 그러나 이렇게 하면 일본측은 예전에 백제에게 그랬듯[12] 후백제도 지원해야 하는데, 당대의 일본은 쇄국정책이니 뭐니 이전에 국내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견훤은 건국 초에는 형식적으로 신라왕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자칭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 백제가 일본과 통교하고 신라와 대립한 게 분명한 데 그걸 반복하겠다는 건 신라의 신하로서 할 일이라 할 수 없다. (요시노 마코토 저의 한일2천년사 참조)
그 외에도 삼국사기에 거란의 사신 35명이 후백제에 내빙하였으며, 견훤이 이들의 귀환길에 장군 최견을 시켜 호송케 하였으나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후당의 등주(산동성)에 난파하여 모두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거란과도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외교에 관해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건데, 후백제는 외교면에서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당시의 어떤 국가도 외교 부분에서 이렇게 많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중국과 일본이 나라 내부사정이 과거 삼국통일전쟁 시절과 다르게 별로 좋지 않아서 바다 건너 후백제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고려와 후백제는 935년 신검의 난 이전까지는 슬슬 후백제가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그럭저럭 용호상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가 거란이나 일본과 함께 고려를 양쪽에서 쌈싸먹어 양면전쟁을 강요했다면 최후의 승자는 후백제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후백제의 의지와 별개로 운이 없었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5 문화
견훤은 신라삼최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명사 최승우와 같은 유능한 문인들을 등용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나름대로 문화의 발전에도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최승우는 후백제 측에서 남긴 거의 유일무이한 역사 기록인 <대견훤기고려왕서>를 집필했다. 견훤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무찌른 후에 보낸 편지로, 고려사와 삼국사기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최승우가 지은 <호본서>라는 책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사관을 두어 사서를 편찬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역사서에서 그 흔적을 희미하게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후백제가 스스로 남긴 역사 기록 또한 대부분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하여 알기 힘든 부분이 많다는 점은 왠지 비슷하다(...).
그 외에도 불교의 진흥에도 상당히 노력한 면모도 보이는데, 아마도 당시에 유행하던 미륵 신앙을 사상적 토대로 이용해 보려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말기에 이르어 난세가 이어져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자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 신앙이 유행하였다. 후고구려왕 궁예 역시 이를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견훤 역시 궁예만큼 본격적으로 신정국가를 추구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미륵 신앙을 이용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제 때에 지어졌던 금산사를 견훤이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혜거국사 비문>에 따르면 922년에 미륵사에 개탑을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 훗날 이 왕조를 후(後)백제라고 부르는 건 당연히 고대 백제와의 구분을 위한 것으로 당시에는 그냥 백제였다.
- ↑ 현대의 광주광역시. 892년 스스로 왕을 칭할 때는 무진주가 기반이었다. 다만 이 때는 정식으로 백제왕을 칭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괄호 표기.
- ↑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 ↑ 단명한 왕조라 존재감이 낮지만 엄연히 지금까지 존속하는 성씨로 유명인으로 견미리가 있다.
- ↑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흔한 일로, 비슷한 사례로 후한, 후당, 후금, 고조선, 후고구려 등이 있다. 모두 그 당시에는 후, 고 자가 붙지 않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후대인들이 구분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 ↑ 상주 견씨 족보에 따르면 백제왕족의 후손이 상주로 이주해서 일가를 이루웠다고 하는데 족보상 기록이라 신뢰하기 어렵다.
- ↑ 당시는 한국인 해적 신라구가 일본 본토 서부 지역까지 탈탈 털고 있었을 정도로 해적이 기승을 부렸다.
- ↑ 특히 웅주(충청남도) 지역의 호족들이 대부분 후백제에 붙어서 두 나라의 최전방 전선이 북상하게 된다. 나중에 930년대가 되어서야 고려가 이 지역의 주도권을 되찾게 된다.
- ↑ 일본이 후백제를 도울 나라꼴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핑계를 댄 것에 가깝다.
- ↑ 19세기 서구열강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선 정부는 조선이 청나라의 신하국이기 때문에 외국과 개별적으로 통상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 ↑ 사실 이때 후백제는 일본에게 꽤 저자세로 나갔다. 발해의 경우처럼 사방이 적이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동맹을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
- ↑ 관산성 전투, 백강 전투 등 6~7세기 일본은 백제를 도와 신라와 싸우기 위해 원군을 여러 번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