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53대 신덕왕 박경휘 | ← | 54대 경명왕 박승영 | → | 55대 경애왕 박위응 |
시호 | 경명왕(景明王) | |
성 | 박(朴) | |
휘 | 승영(昇英) | |
생몰년도 | 음력 | ? ~ 924년 8월 |
재위기간 | 음력 | 917년 ~ 924년 8월 (8년) |
1 개요
신덕왕의 아들로 뒤에 왕위에 오르는 경애왕이 그의 동생이다.
2 치세
이 왕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하면 무능하고 존재감 없다. 그리고 기록도 별거 없다.
그나마 있는 기록을 참고하자면 재위 2년째가 되자마자 김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김)현승(玄昇)의 반란이 일어나 가뜩이나 허약한 신라의 멸망을 더 재촉하게 되었다.[1] 그리고 나라 밖에서도 큰 일이 일어나는데...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죽고 고려가 건국된 것. 경명왕은 왕건과 우호관계를 맺는데, 이는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신라 최후의 보루였던 대야성이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함락된다. 사실상 경주로 향하는 마지막 장벽이 사라진 격. 대야성이 신라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김춘추 항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대야성이 후백제에게 넘어간 이상, 경주로 향하는 관문은 소규모 성 밖에 없어서 경애왕이 급습을 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 외의 기록으로는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울었으며(!)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 또한,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 등. 신라 말기에 신라인은 3D 입체구현을 실현시켰나 보다.
그냥 단순히 말해서 망조(亡朝)의 기운이다. 비슷한 예로 백제의 의자왕을 살펴보면 위처럼 믿기 힘든 기록들이 여럿 보인다.
924년에 사망해서 황복사 북쪽에 장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불교식으로 화장했다는 설도 있다. 경주 시가지 남쪽의 배동 삼릉이 경명왕의 왕릉으로 전해진다.
다만, 독보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게 있다면 자식이 무려 8남이나 있었다. 다만, 나이가 어려서 난세에 적합하지 않다 걱정되었는지 아우에게 물려준 것이다. 사실상 신라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는 동생 경애왕은 한때 암군의 결정판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나름대로 신라를 버텨보려 노력했다고 재평가받기도 하므로 동생에게 물려준 건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불행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3 기타
그리고 경명왕의 8남은 사실상 현대 박씨(朴氏)의 근간이 된다. 경명왕의 장남인 박언침은 밀양 박씨(오늘날 박씨의 70~80%를 차지하는 대성(大姓)), 차남인 박언성은 고령 박씨, 삼남은 함양 박씨, 그 다음 사남부터 팔남까지 죽산, 무안, 춘천, 순천, 충주, 경주, 월성, 울산 박씨들의 시조가 되는 등 오늘날의 박씨를 한국 3대 성(姓)에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경명왕이다. 물론 파사왕이나 경애왕계에서 갈라져 나온 박씨들도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경명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위응을 상대등으로 삼고, 유렴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현승이 반역하여 사형을 당하다
二年夏六月 태조가 즉위하다
二年秋七月 아자개가 태조에게 항복하다
三年 사천왕사 소상의 활줄이 끊어지다
三年 김성을 각찬으로 삼고, 언옹을 사찬으로 삼다
三年 태조가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기다
四年春一月 왕과 태조가 우호를 닦다
四年春二月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四年冬十月 태조에게 원군을 요청하다
五年春一月 진평왕의 보대를 찾다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
五年春二月 견권이 말갈족을 물리치다
五年夏四月 경도에 강풍이 불다
五年秋八月 황충과 가뭄이 발생하다
六年春一月 원봉과 순식이 항복하다
六年春一月 홍술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七年秋七月 성달과 양문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七年秋七月 김락과 김유경을 보내 후당에 조공하다
八年春一月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八年春一月 왕봉규가 후당에 공물을 바치다
八年夏六月 후당에 조공 간 김악이 조의대부시위위경에 제수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