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전투


당시 신흥강국에 대한 동아시아 최강대국의 최후 발악

명청결전(明淸決戰)

명나라와 청나라가 벌인 대규모 전투이자 사실상 명청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전투. 이 전투가 끝난 후에도 명나라는 몇년간 존속하고, 후에도 몇번의 전투를 더 벌이긴 하지만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더이상 거대한 규모의 군대로 야지에서 회전[1]을 벌이지도, 외부를 향해 대규모로 전력을 투사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사람으로 치자면 팔다리가 모두 잘린 꼴이나 다름이 없어지고 만다.[2]

때는 1641년, 1618년 누르하치의 무순 점령을 시작으로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지역의 주요 거점과 지역의 대부분을 뺏겼고 그와중엔 웅정필과 원숭환같은 걸출한 명장들도 있었지만 명나라 조정의 뻘짓과 내부분열로 패배책임과 내통죄를 뒤집어쓰고 숙청을 당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1627년 명나라의 섬서 지역에선 그동안 누적되어온 명나라 내부 체제의 문제점들(세금폭증, 빈부격차와 농민들의 유민 화(化), 북로남왜, 명 4대암군)과 결정적으로 이쯤에 발생한 기후변화로 나타난 대기근으로 인해 엄청난 아사자들이 속출했고 식량가격이 치솟고 구할 수가 없어서 전염병식인이 빈번하는등 현세지옥이 펼쳐졌으나 명나라 정부는 뚜렷한 구율,구제책을 내놓지못했고 오히려 농민들에게 수탈을 일삼았다. 결국 이자성의 난이 시작됐으니...자세한 경과는 참조바람,

북방에선 1630년, 비록 원숭환이 숙청당해 죽었으나 그가 생전에 구축한 영원성을 위시한 방어선(금주(진저우)외 4개 성)은 여전히 효과적이었고 송산전투 전까지 청나라는 이것을 정면으로 뚫을 수가 없었다. 홍승주가 부임하기전까진.. 정체불명했던 후임자들도 원숭환의 방법을 기초로 크게 변동없이 청나라와 대적하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청태종내몽골자치구로 우회하여 만리장성의 취약한 부분이었던 섬서성북부[3]산서성,허베이성남부로 침입하여 여러차례 대규모 약탈을 감행했다. 그때마다 수십만명의 포로(대부분은 백성이고 포로중엔 황족도 포함)와 무수한 가축, 재화를 노획했고 심지어 산동성까지 도달했다. 이들이 북경 이남 곳곳을 약탈했을때 이를 저지해야할 명나라 군대는 겁을 먹고 거의 나서지않았다. 홍타이지의 이런 약탈시도는 좋았지만, 침입한 영토를 확고히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국력상의 문제로 적국에 장기적으로 침투하는 것은 힘들었다. 명나라의 내부 사정이 워낙 막장이라 약탈을 막진 못했지만 여전히 명나라의 인구와 국력은 약탈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는 것은 어렵지않았고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과 요서지역의 대부분을 빼았겼지만 그에 비해 수백배 이상의 영역과 인구를 지닌 전통적인 중국 본토(산해관 이남 지방 13개 성과 2곳의 직례성)[4]은 여전히 명나라의 영토로 건재했고, 하남, 섬서지역에서 들끓었던 이자성의 난도 1630년대 중반 홍승주, 손전정, 양사창등의 활약으로 핵심 지도자 고영상이 잡혀 처형되고 장헌충은 일시적으로 투항했으며 반란군의 대부분이 전멸되고 핵심 잔당이었던 이자성의 무리는 진짜 수십명의 무리만으로 산중에 은신하며 지냈다.

(2016/05/25) 위의 장문을 작성한 수정자는 여담일수도 있지만 최근 소현세자 관련 서적을 몇권 구입해서 읽었는데 송산-금주 전투에 대한 기록이 담긴 복수의 단락을 발견했다. 요약해서 여기에 소개하고자한다.

1. 청나라는 명나라 지원군의 동향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고 명군 지원군이 금주로 오는 길목 곳곳에 도로장애물같은 것을 설치해서 이동을 차단했고 또한 주요 경로상에 많은 매복병력을 심어두고 명군 지원군에 대한 견제를 타격있게 가했다.

2. 명군의 전략적, 전술적 미스와 청군의 대응으로 인해 그들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송산과 금주 사이의 어딘가 야지에서 포위를 당했고 오삼계를 위시한 일부 명군은 산해관으로 탈출했으나 대부분은 전멸하거나 후방의 송산성으로 도피했다. 초기의 야전에서 명군은 주기적으로 야간돌파를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했고. 그때마다 인명손실이 커서 최종적으로 5만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내용과는 다르게 명군은 그들의 종특인 숙련된 화기사용능력과 기병도 다수있었고 기량면에서도 팔기군과 차이는 없었으나 전술적인 병크로 군마 수천마리를 노획당했다고 기록되어졌다.

ㅡ 계속 작성중ㅡ

송산-금주 전투
날짜
1641년~1642년
장소
중국, 산해관 이북 송산(松山), 금주(锦州)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명나라(明)청나라(淸)
지휘관주장 홍승주
부장 조대수
홍타이지
지르갈랑
병력홍승주의 군대 13만
조대수의 군대 2만5천
8만
사상자약 60000명불명
결과
청군의 결정적인 승리
기타
산해관을 제외한 명나라의 북방 방어선 붕괴, 홍승주의 투항
  1. 물론 이 전투는 명나라가 좋아서 벌인 회전은 아니었다. 본디 수성전으로 끌고가 장기적인 방어전을 계획했지만, 재정과 군량사정으로 단기간에 결판을 내기위해 억지로 나와서 청군과 야지에서 붙었던 것.
  2. 이 전투 전에는 명나라도 일정수준의 군사력이 잔존했고 이자성에게도 어렵지않게 대적할수있었다. 이 전투로 명나라 군사력의 중핵이 소멸되었다고 보면 된다.
  3. 당시의 섬서성은 닝샤 후이족 자치구감숙성의 남부지역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이 두 지역은 각각 중화민국 이후의 시대와 청나라 중기에 독립된 신설지역이다.
  4. 송나라 시절, 그들의 숙원이었던 연운 16주(북경과 그 이북의 허베이성최북단)도 고스란히 명 왕조의 영토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명나라는 여러모로 송나라보다 조건이 좋았으나 내부뻘짓으로 다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