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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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환 동상

1584 ~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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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원숭환(袁崇煥)
출생명나라 만력(萬曆) 12년 음력 4월 28일
(그레고리력 1584년 6월 6일)
사망명나라 숭정(崇禎) 3년 음력 8월 16일
(그레고리력 1630년 9월 22일)
출생지광둥성(廣東省) 둥관현(東莞縣)
국적명나라
원소(元素)[1]
자여(自如)

1 개요

말기의 명장. 원숭이가 아니다
명나라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실패한 이순신[2]

사르후 전투 이후 노도와도 같은 기세로 명을 공격하던 누르하치영원성 전투에서 막아내고, 이후에도 홍타이지의 공격도 잘 막아 촉한의 승상 제갈량과도 많이 비교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전공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처형당했고 후세 역사가들이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바로 그의 처형이었다고까지 평가하는 인물이다.

2 등용

1619년 3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 급제한 그 해가 바로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이 명나라와 조선의 군을 각개격파로 물리친 그 해였다.

어쨌든 무과가 아니라 문과로 급제한 사실로 알 수 있듯이 그는 본래 문관이었다. 다만 명에서는 문관들도 총병이 무관이면 부총병은 반드시 문관 식으로 전쟁 및 군사 업무에 투입하였기에[3] 무관이나 무관으로 전환하거나 무관에 가까운 업무를 맡는일은 비일비재하였으며[4] 또한 그는 본래 평상시에도 군사적 업무에 관해 토론하길 즐긴 일종의 밀덕후.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지나가는 군사들이나 군졸들을 보면 항상 변방의 정세를 물었고 친구와는 군사적인 일을 잠도 안 자고 토론하며 즐길 정도였다고 한다.

어사 후순(侯恂)은 원숭환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쓸만하다고 판단해서 병부(兵部) 직방사주사(職方司主事)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1622년부터 병주에 부임하였는데 혼자 위장을 하고 적의 진영을 직접 염탐하는 충공깽 수준의 일을 벌이고는 돌아와 말했다.[5]

"제게 산해관(山海關)을 맡겨 주십시오. 방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산해관을 맡게 된 원숭환은 바로 떠나지 않고 고향을 돌며 병사를 모아 산해관에 입성했다.

3 활약

3.1 영원성 전투

중국명 영원대첩(寧遠大捷)

당시 명군은 무려 120~300만 수준의 대군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요동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후금군에 패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세를 반전시킨 것이 요동경략사 웅정필로 만력제에게 무려 “안에서 나 흔들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내 발목잡지 말아 달라.” 며 다짐을 받고서 요동경략을 하러 나가서 후금군이랑 전면전 하면 못이기니까 삼방포치책을 도입하여 18만의 병력을 모아 이를 조련하고 언제 후금군이 쳐들어와도 알 수 있도록 각기 연락 체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산해관의 방비를 강화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고 수군으로 찔러서 후금을 상대하자. 라는 전략으로 후금과 대치 상태를 유지한다.

누르하치 역시 이를 보고 경계하여 결국 1년간 성공적으로 후금을 막아내나. 웅정필을 밀어주고 국방 부분에서의 사고력은 그나마 조금 정상이던 만력제가 사망하고, 백치에 가까웠던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웅정필이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특히 요동 순무 왕화정이 명군이 후금으로 쳐들어가면 몽고에서 40만이 호응하고, 이영방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모문룡이 가도에서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후금으로 쳐들어간다는 말도 안되는 소문을 믿고서 6만명만 주면 후금을 멸망시키겠다며 상관인 웅정필을 흔들기 시작한다. 웅정필은 꿈과 같은 소리라며 디스했지만 왕화정은 계속해서 고집 부리면서 웅정필의 방책을 따르지 않다가 결국 믿었던 자기 부하에게 배신당하고 누르하치에게 털리고 요동의 거의 대부분을 빼았긴다. 이때 패전의 책임은 전적으로 왕화정에게 있고 웅정필은 단지 명목상의 상관이었을 뿐이지만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환관 위충현의 참소로 1625년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당하고 그 머리는 변방 각지로 돌려져 전시된다. 왕화정은 이때는 죽음을 피했지만 결국 숭정제 때인 1632년 이때의 책임을 물어 처형된다. 이렇게 당시 누르하치의 기세는 파죽지세나 다름이 없었고, 요동의 거의 대부분이 후금의 손에 있었다.

결국 요동지역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나서 명나라의 방어는 산해관에 집중되게 되는데, 만리장성의 끝인 산해관은 말 그대로 명나라 방어의 핵심이었고 열리지 못하면 반드시 지킬 수 있지만, 열리면 명나라는 바로 끝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원숭환은 산해관의 위협을 좀 더 줄이기 위해 산해관 밖 200리 지점인 영원에 성을 만들자는 주장을 내었다. 하지만 곧바로 까였는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청을 올렸다. 물론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원숭환의 집념은 무서울 정도라, 결국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이 원숭환의 의견을 존중해 드디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후 요동 원수가 된 원숭환은 영원성(寧遠城)을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결국 영원성이 만들어지자, 명나라는 기존의 산해관에서 200리나 앞에 방어선을 하나 더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때 명나라는 유럽에서 수입하던 홍이포의 자체 제작에 막 성공하였는데 원숭환은 이 홍이포의 위력에 주목하여 서광계가 산해관에 설치해놓았던 홍이포들을 영원성 요지에 재배치하고, 대포를 다룰 수 있는 화포 전문가를 불러서 포병들의 교육에 힘쓴다. 이 선택은 정말 탁월한 것이었는데, 당시 명은 후금의 막강한 기병을 제압하는데 여러모로 힘이 들었으나 홍이포의 강력한 화력 덕분에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군사들의 훈련이 이루어지고 영원성도 완성되자 원숭환은 자신감을 가지고 1624년 1만4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요서 일대를 순찰한다. 이때 원숭환군의 기세는 대단해서 명나라 군대를 밥으로 알던 후금군도 이때만큼은 전혀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원숭환은 손승종에게 금주(錦州), 송산(松山), 대릉하(大陵河), 소릉하(小凌河) 등의 요새에 군사를 배치해 요서 방위를 더 단단하게 굳힐 것을 건의하고 손승종이 여기 흔쾌히 응하여 병력을 파견하여 요서 일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때 다시 한 번 위기가 있었다.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 위충현이 자기 말을 잘 안 듣는 손승종을 몰아내고 고제(高第)라는 용렬한 인물을 산해관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해 버린 것이다. 고제는 이때 원숭환과 손승종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요서 방어선을 모조리 포기하고 산해관으로 방어선을 후퇴시킨다는 어이없는 결정을 내린다. 원숭환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상대는 위충현이 임명한 정권 실세, 원숭환의 반대에는 아랑곳없이 영원성을 제외한 다른 요새 지대에서 병력과 식량을 모조리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켜버린다. 원숭환의 극렬한 반대 때문에 그가 지휘하는 영원성 한 곳만은 남겨두는 데 자기에게 밉보인 원숭환은 거기서 싸우다 죽으라는 고제의 심사였다.

원숭환이 산해관 200리 앞에 있는 영원성을 건설하고 요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바람에, 사실상 요동을 거의 다 차지한 상태에서도 영토를 요서까지 확장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누르하치는 고제의 삽질을 최고의 기회로 보고 1626년 10만[6]의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으로 쳐들어갔으나, 이때까지 수백 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을 만큼 신출귀몰의 평가를 얻던 영웅이었던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하라.

이 싸움의 결과는 누르하치에게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주었는데

"짐이 25세부터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하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때의 패배 과정에서 누르하치 자신이 중상을 입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설이 있지만 청의 기록으로는 병사이며, 누르하치가 정말로 대포를 맞고 죽었는지는 큰 의문이 있다. 누르하치는 이후 정무도 처리하고 몽고 원정도 했다가 8개월 후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대포를 맞고 8개월간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죽었다고 하기에는 큰 의문이 있다. 실제 누르하치 사망설은 당시 영원성에 있었던 조선의 역관인 한원의 기록에 의존하는데, 영원성 전투 당시 원숭환과 함께 있다가 대포를 쏘더니 이겼구나 -> 이후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아 그러고보니 이전에 영원성에서 누르하치가 대포에 맞아서 이틀 만에 퇴각했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그 때 죽었구나! 라던 당시 역관이던 조선 측 인물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정황증거로 봤을 때 병사보다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원성 전투의 패배에서 입은 심리적 타격이 그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된 건 분명해 보인다. 육체의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심해 죽은 것. 하긴 홧병으로 죽는 역사적 위인들도 있었고 현대인들도 이런 경우가 종종 나오니 그럴만 하긴 하다. 여러분 홧병은 암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3.2 영원(寧遠), 금주(錦州) 전투

중국명 영금대첩(寧錦大捷)

영원성 전투는 누르하치가 이 패배가 원인이 되어 사망하는 등, 당시 명나라 입장에서는 참으로 기적 같은 대승이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는 환관 위충현이었는데 위충현은 어떤 의미로 봐도 극악무도한 악인에다 요동 방어선의 붕괴와 웅정필의 죽음에도 직접적 책임이 있는 위인이지만 이때만큼은 원숭환의 대승에 기뻐하며 고제를 해임하고 원숭환을 요서 방어의 총책임자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나름대로 빠방한 지원을 해준다.

원숭환은 다시금 금주과 송산 등의 요새에 병력을 배치하고 성을 강화하며 다음 싸움에 대비하던 중 누르하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그의 죽음을 조문한다. 싸웠던 적이지만 일세의 영걸이 분명하니 그의 죽음을 조문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제로는 누르하치 사후 후금의 정세를 살펴보려는 목적이었다. 이 조문 이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이 조문에 대한 답례를 하고, 또 후금의 지위를 인정하고 세폐를 보내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하기도 하는 등 그와 원숭환 사이에 여러 번 사자가 왕복하게 되는 데, 이는 홍타이지와 원숭환 둘 다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훗날 원숭환 개인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훗날 그가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했다는 증거의 하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처형 당시 죄목에는 이때부터 후금과 내통했다고 되어있다.

다음 해인 1627년 조선을 적당히 손봐주고 후방을 정리한 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침공을 개시했다. 후금군은 대릉하, 소릉하를 비롯한 여러 작은 요새들을 점령하고는 금주성(錦州城)을 포위했다. 홍타이지로서는 아버지 누르하치의 원수를 갚고 새로 즉위한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영원성 공략의 전초전으로 임한 전투였지만 여기서 홍타이지는 체면을 구긴다. 금주성은 이미 과거의 금주성이 아니었다. 원숭환이 조정의 빠방한 지원을 받아 성벽을 강화한데다 믿을 수 있는 동료 조솔교(趙率敎)가 지휘하는 3만의 병력과 충분한 식량을 준비해 두었고 여기에 홍이포까지 대량으로 배치해 두고 있었다.

간단하게 점령할 수 있는 잔챙이 요새로 생각하고 포위했는데 금주성의 방어력은 홍타이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14일 간이나 포위 공격하고도 함락이 어렵다는 걸 깨닫자 홍타이지는 방향을 돌려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을 공략한다. 하지만 금주성이 안 되는데 영원성이 될 턱이 있나. 홍타이지는 영원성 공략에 실패하고 방향을 돌려 다시 금주성을 공략해보지만 실패한다. 홍타이지가 평생 동안 일관되게 보여주는 뛰어난 지략과 판단력이 이때만은 작동하지 않는 듯 금주성과 영원성 사이를 왔다갔다, 우왕좌왕, 그답지 않은 모습들만 잔뜩 보여주다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군사를 물려 후퇴한다.

아버지 누르하치도 아들 홍타이지도 중국사를 조금만 읽어본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 빼어난 인물들이다 원숭환은 이런 부자 영웅을 모두 싸워서 격퇴하는 희대의 대공을 세운 것이다.

이때 홍타이지도 마음 속 깊이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원숭환이 살아있는 한 요서 방어선의 돌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4 해임과 복귀

이 때 명나라 조정에 큰 변화가 생긴다. 정사는 환관 위충현에게 모두 맡겨버리고 목수 일에만 열중하던 천계제가 죽고 동생 숭정제가 즉위한 것이다. 숭정제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권세를 농단하던 위충현을 추방한다. 역사상 환관 권력의 정점에 섰다고 할 위충현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도 능지형이 아니고 자살로 죽을 수 있었던 건 천계제가 총애했던 덕분에 내려진 관대한 조치였다.

그런데 이런 정세 변화의 불똥이 엉뚱하게 원숭환에게 까지 튄다. 원숭환이 위충현의 일당으로 몰려 해임되고 조정으로 소환된 것.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시대가 바로 명나라 말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가장 큰 위협이 후금이며 이를 막아낼 적임자로 원숭환 이상의 인물이 없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아는 사실, 결국 여러 신하들의 청원으로 1628년 숭정 원년 원숭환이 다시 요서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이번에는 승진도 따랐다. 병부상서(兵部尙書)겸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 계료독사(薊遼督師)라는 지위에다 휘하의 모든 장병을 보고 없이 주살(誅殺)해도 좋다는 특권과 이를 상징하는 상방보검(尙方寶劍)까지 하사받았다.

그런데 이때 숭정제와 대면한 자리에서 원숭환은 이상한 장담을 한다. 5년 안에 요동을 평정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총체적 국력이나 경제력에서 후금을 압도하는 명나라지만 여러 번의 전쟁을 통해 군사력에 있어서만큼은 후금에 계속 밀리고 있던 것이 당시 명나라였다. 그런데 이를 5년 안에 평정하겠다니 연속되는 승리로 자만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아니면 숭정제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런 자신감이라도 보여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롭다고 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영원, 금주 전투에서 홍타이지가 보여준 우왕좌왕하던 모습과 당시 후금이 처한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들 때문에 상황을 완전히 오판했던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당시 후금은 경제적으로 극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당시의 후금은 예전의 여진족처럼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사는 원시부족이 아니라 명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상업 국가였다. 그런데 이 유일한 무역 상대 명나라와의 교역이 전쟁으로 완전히 정지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개해보고자 땅을 개간해서 농사도 지어보고 요동을 점령해서 요동 지역 한족들을 통해 농업 기술을 도입하고 식량 사정을 개선시켜 보려고 했지만 조국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지 아니면 한족에 대한 차별과 탄압 때문인지 요동 지역 한족들은 순순히 응하지 않고 극심하게 저항했다. 이런 상태를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고자 조선을 침공해서 상호간에 무역을 한다는 확답을 받아냈지만 조선 정부는 영 소극적이었다. 아니 조선 정부가 설사 적극적이 된다고 하더라도 당시 조선의 상업 수준으로 봐서는 무역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모든 물자가 부족했지만 특히 식량이 부족했다. 1626년과 27년에는 기근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고 쌀 한 말에 은 8냥이라는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은 1냥이면 흉년이라도 쌀 1~2석, 평년이면 4석, 큰 풍년이 들었을 때는 8~9석을 살 수도 있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후금의 고질적 물자 부족은 1629년 이후부터 요서 방어선을 우회하여 장성을 넘는 경로로 약탈전을 벌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해소된다.

어쩌면 이런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린 후금의 상황을 잘 인지하고 저런 장담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타임머신이라도 발명되지 않는 한 정확한 진실은 이제 알 길이 없다.

5 모문룡 주살

재기용된 다음 해인 숭정 2년 1629년 4월 원숭환은 수군 좌도독 모문룡에게 군사 문제로 의논할 일이 있으니 쌍도(雙島)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보낸다.

모문룡은 당시 압록강변 가도(椵島)에 주둔하며 자신에게 맡겨주면 요동 전 지역을 수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인물로, 바다의 싸움에는 조금 재주가 있었지만 사람됨이 좋지가 못했다. 애초에 요동에서 후금군 5천의 병력에 참패하여 도망친 뒤에는 조선의주로 들어가 광해군인조를 압박하며 여러 차례 행패를 일으키고 다녔으며, 조선의 평안북도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여 이후 밀무역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정묘호란 때에도 후금에게 무수히 패하는 등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7] 명나라 조정에는 후금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한다고 말하며 막대한 군사비를 타먹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평안도 해안을 약탈하고 적인 후금을 상대로 조정에서 금지한 물품을 팔아먹는 등 해적이나 밀수꾼 두목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막강한 함대와 수만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휘하의 수하들을 보고없이 주살할 수 있는 상방보검을 하사받은 인물이었기에 후금이나 원숭환도 쉽게 여길 대상은 아니었다.

모문룡은 갑자기 원숭환이 자신을 소환하자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원숭환은 그의 직속상관, 그가 군사 일을 의논하자고 소환하는 데 불응할 수는 없었다. 모문룡은 2만8천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쌍도로 간다.

모문룡은 1629년 5월26일 쌍도에 도착했다. 6월1일 원숭환과 모문룡 두 사람이 만나 회견하고 군사일을 의논했다. 6월3일 모문룡은 원숭환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깊어가자 이 자리에서 원숭환은 은근히 모문룡에게 은근히 은퇴를 종용했지만 모문룡은 요동의 위급함이 남아있어 은퇴할 수 없다고 은퇴를 거절하며 이때 요동이 안정되면 조선을 기습하여 차지하겠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조선을 얼마나 만만한 먹이감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월5일에도 두 사람은 만나서 원숭환 휘하와 모문룡 위하의 병사들 사이에 활쏘기 경기를 했다. 활쏘기 경기가 끝나자 원숭환은 비밀리에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며 섬의 산꼭대기에 설치해 둔 장막으로 모문룡을 데려갔다. 이때 장막 부근에는 이미 복병을 배치되어 있었다. 원숭환은 몇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부하들에게 모문룡을 포박하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 12가지 죄를 거론하며 모문룡을 질책했다.

수 년 동안 병마와 전량(錢糧)을 공급받으면서도 조정의 감사를 전혀 받지 않은 것. 전공이 없으면서도 공을 세웠다고 황제를 속인 것, 나라에서 금하는 시장을 멋대로 열어 오랑캐와 무역한 것, 도적이 되어 상인들을 약탈한 것, 민간의 부녀자들을 빼앗아 음행을 일삼은 것, 위충현을 숭배하고 환관들과 결탁한 것, 몇 년이나 군사를 맡고 있으면서 촌토도 수복하지 못하고 관망만한 것 등이었다.

모문룡은 겁에 질려 대답도 못했다. 원숭환은 북경을 향해 절한 뒤에 죄인 모문룡을 죽이겠다고 외친 뒤 숭정제로부터 하사받은 상방보검으로 모문룡의 목을 베었다. 이때 원숭환이 말한 12가지 죄는 실제로 모문룡이 지은 죄들로 그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처형당할 중죄였다. 모문룡이 데려온 2만8천이나 되는 군사들은 일이 너무 급박하게 벌어진데다가 원숭환의 추상같은 위엄에 몸이 굳어 모두 식은땀을 흘리며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 원숭환은 다음 날 모문룡의 장례를 치러주고 죄는 모문룡에게 있을 뿐 모문룡의 수하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그들을 위로하고는 다시 재배치한다. 가도는 모문룡의 부하였던 부총병 진계성(陳繼盛)에게 지휘하게 하고 자신의 부하인 부총병 서부주(徐敷奏)를 파견하여 이를 감시하게 했다.

모문룡이 처형되자 모문룡의 부하들이 바로 달아나 후금에 붙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두 원숭환에 의해 재배치되었고 원숭환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들은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원숭환이 죽고 나자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곧 배반하여 해적이 되거나, 나라를 세우고서 왕을 자칭하거나 하다가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후금에 투항한다. 이 대표적 인물들이 청나라 입관 후에 번왕으로 임명되는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이다. 이들의 입관 이후 운명은 삼번의 난 참조.

그리고 이들 모문룡의 잔당이 모문룡 처형 때문에 후금에 투항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들은 처음부에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희박한 집단이었고 그 수령 모문룡 자신도 기회만 되면 명나라를 배신할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들의 행태가 잘 나타나는데 후금이 자신을 유예로 삼으려 한다는 말을 조선의 신하들 앞에서 태연히 지껄이는 인물이었다. 유예는 금이 북송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세웠던 괴뢰국가의 제의 황제였던 인물이다. 왕조국가에서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를 태연히 내뱉는 무리가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군사적 실재는 형편없더라도 수많은 해군과 무역으로 번영하던 가도는 병자호란 이후 청과 조선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다만 모문룡이 살아있을 때도 후금에 위협이 되지 않았던 점은 마찬가지였다. 모문룡이 죽은 뒤로는 예전의 위세를 부릴 수 없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조선을 삥 뜯으려는 점은 모문룡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망할 때까지 조선에는 민폐만 끼친 집단이었다. 오죽하면 그 형편없는 인조 정권에서 가도를 원정할 생각까지 했을까.

하여간 이렇게 모문룡 주살에는 성공했지만 이건 원숭환의 상당한 월권행위였다. 비록 숭정제로부터 휘하의 부하들을 보고 없이 참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진짜 행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 법. 더구나 모문룡은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상방보검까지 하사받은 거물이었다. 원숭환은 모문룡 주살한 사실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조정에 보고한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주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거의 기절할 만큼 놀랐다고 하는데 모문룡의 악명은 이미 이전부터 조정에 보고되고 있었고 모문룡 집단의 실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는 각료가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원숭환이 없으면 요서 방위를 책임질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문룡 주살 건은 원숭환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비교적 조용하게 넘어간다. 그래도 숭정제와 조정대신들의 속마음은 아마도 “독한 놈, 그걸 진짜 하냐.” 정도였을 듯.
이전 문서에는 이 모문룡 주살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원숭환이 처형당했다고 되어있었지만 원숭환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모문룡 주살이 아니라 바로 아래에 나오는 기사년의 변이다.

6 기사년의 변(己巳之變)

영원, 금주 전투에서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체면을 구긴 홍타이지의 가슴에는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어 있었다. 바로 원숭환이 지키는 한, 명나라 요서 방어선은 절대 돌파할 수 없다.는 뼈저린 현실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체념해 버렸다면 홍타이지는 영웅 아버지를 둔 용렬한 자식에 불과할 뿐, 아버지를 능가하는 건국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방어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중대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첫 번째 방향전환은 침공경로의 변경이었다. 후금의 근거지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최적 루트는 누가 봐도 요서를 지나 산해관을 통하는 길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원숭환이 버티고 있어 돌파가 불가능했다. 후금으로서는 우회가 불가피했다. 홍타이지가 선택한 경로는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일대를 우회하여 몽골족의 영역을 지나 하북 북방의 장성 일대인 용정관(龍井關)과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 경로의 장성 북쪽 일대는 수렵, 채집과 원시적 농경민족인 여진족의 땅이 아니고 유목민인 몽골 코르친 부족의 영역으로 후금에게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후금은 여러 번의 전쟁과 혼인을 통한 회유 등으로 코르친 부족을 완전히 포섭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향전환은 바로 전쟁 목적의 변경이었다. 그 동안 후금의 전쟁은 조선을 침공했던 정묘호란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복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땅은 모두 자신들의 영토가 되었고 그 주민들은 모두 자신들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부터 전쟁의 목적은 정복을 통한 영토 획득이 아니라 물자 획득을 목적으로 하게 돈다. 정복전에서 약탈전으로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홍타이지는 사촌 아우인 지르갈랑에게 영원, 금주 등을 가볍게 공격하게 하여 원숭환의 시선을 요서 일대에 묶어두고는 1629년 10월 2일 그가 직접 인솔하는 10만의 대군이 장성을 넘었다. 경로는 위에서 말했던 용정관(龍井關),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 장성을 넘은 후금군은 대대적인 약탈전을 감행하는 동시에 북경 일대를 초토화하더니 10월 26일 마침내 북경성 코앞까지 진출한다. 명으로서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명나라 조정과 북경 시민에게 전쟁이란 무릇 천리 밖 요서의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북경성 자체가 포위 당해버렸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아직 홍타이지가 요서를 우회하여 북방으로 침공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히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방어선에 막혀 산해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꿈도 못 꿀 후금군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사람이 어이없는 사태를 만났을 때 정상적 사고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다 화풀이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북경 시민들에게 원숭환이 길을 내주어 후금의 오랑캐들이 침공할 수 있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원숭환의 정치적 반대파인 엄당(閹黨)[8]에서 이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엄당에게 원숭환은 자기 일파인 모문룡을 죽인 정적인 동시에 해마다 모문룡이 보내오던 뇌물을 차단한 경제적 원수이기도 했다. 또 당시 조정 대신들은 북경 인근에 토지와 별장을 가진 자가 많았다. 이들도 자신의 재산이 침해된 원인을 원숭환에게 돌렸다. 결국 조정 대신들도 북경 시민들도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게 다 원숭환 때문이다.

사태를 제대로 인지한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불행히도 옛날식 세는 나이로 19살, 지금 한국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애송이였던 숭정제는 이 극소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14년 뒤 자살하면서 남긴 유언장에서도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렸던 숭정제답게 이번에도 그는 모든 책임을 원숭환에게 돌리고 있었다.

원숭환은 예전부터 후금이 자신이 지키는 요서를 우회하여 북방으로부터 침공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조정에 알리고 경계를 촉구했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렇게 갑자기 후금의 우회 침공이 시작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 하다.

후금의 침공 소식을 들은 원숭환은 대경실색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급히 모아 북경으로 달려왔다. 산해관에 도착하자 준화성(遵化城)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참장 조솔교에게 4천의 군사를 나눠주며 준화성을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왕원아(王元雅)가 사수하던 준화성은 조솔교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되었고 [9] 조솔교와 그가 이끈 원병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후금의 복병을 만나 전멸하고 말았다. 영원, 금주 전투에서 금주성을 지키며 홍타지가 직접 인솔하는 군대를 패배시켰던 원숭환의 믿음직한 동료 조솔교도 어이없이 여기서 전사하고 말았다. 후금군은 함락된 준화성에서 대학살을 벌였는데 이 소식은 그대로 북경에 전해져 북경 시민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고, 원숭환에 대한 원망도 같이 깊어졌다.

원숭환은 9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11월 17일 북경 광거문(廣渠門)에 도착한다. 부총병 주문욱은 먼길을 달려와 병사들이 몹시 지쳤으니 일단 북경 안으로 들여보내 휴식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원숭환은 거절하고 북경성 밖에 주둔한다. 그리고 20일 광거문 밖에서 원숭환이 인솔하는 9천 병사는 6시간에 걸쳐 후금군과 10차례 이상 싸워 결국 이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혹자는 이때 원숭환이 후금의 10만 대군과 싸웠다고 하지만 당시 후금군의 대부분은 약탈에 바빴으니 아마도 실제로는 후금의 선봉 일부와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원숭환이 이끄는 군사들이 과거와 달리 얼마나 잘 훈련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 군대는 단 한 번도 후금군과 평지에서 싸워 이겨보지 못했다. 아니 평지는커녕 수성전조차 못하고 지리멸렬하다가 원숭환 등장 이후에야 겨우 제대로 된 수성전을 보여주게 된다. 그런 약졸 명나라 군이, 천리의 먼 길을 달려온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평지에서 후금군을 무찔렀다. 원숭환이 이끄는 명군은 이런 수준까지 성장해 있었다. 더불어 원숭환이 수성전만이 아니라 야전에서도 충분히 유능하며 다수의 적과 평지에서 싸우는 것도 회피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11월 23일 후금군을 물리친 원숭환은 병사들이 오랜 행군과 전투, 그리고 장기간의 노숙으로 지칠대로 지쳤으니 성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이미 숭정제의 머리에는 원숭환에 대한 의심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숭환이 이끄는 병사들은 음력 11월 북경의 차가운 겨울 날씨 속에서도 성밖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원숭환은 11월 27일 북경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시 후금군을 격파한다. 평지의 싸움에서도 원숭환을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북경 함락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까? 홍타이지는 군사를 남해자(南海子)라는 곳까지 철수시킨다. 하지만 약탈전은 계속되었다. 통주(通州)에서는 1000척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북 일대는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이때의 약탈은 대단히 성공해서 병사 한 명당 우마(牛馬) 한 마리씩이 돌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더불어 수만 명의 남녀포로도 얻었다. 후금은 물자의 약탈 그 이상으로 사람도 잡아갔다. 후금 최대의 약점은 인구 부족이고 잡혀간 이들은 후금의 영토로 끌려가 요동 일대의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후금의 약탈전이 기사년의 변이었지만 후금 입장에서는 엄청난 대박이었다. 후금의 가장 큰 약점인 인구 부족과 고질적 물자 부족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명나라의 약점을 발견한 후금은 이때부터 명이 멸망할 때까지 하북, 산서의 장성 루트를 통해 십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약탈전들을 감행한다. 이제 후금에게 전쟁은 위험은 적고 수익은 높은 최고의 경제활동이 되었다. 만주족 가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집안의 가장이 전투에 나가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집집마다 환성이 터져 나왔다.

하북, 산서, 산동 등 명나라의 황하 이북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유린당한다. 이 결과는 명나라 재정의 붕괴와 도적의 창궐이었으며, 이들 중에는 훗날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이자성의 유적 집단도 있었다.[10]

명나라로서는 후금의 이런 침공을 막아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후금의 침공로로 이용되고 있는 하북, 산서의 장성 일대에 요서 방어선에 버금가는 방어선을 건설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걸 이룰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원숭환 뿐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 사람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7 반간계

원숭환에 대한 반간계는 너무나 유명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후금은 광거문 밖의 전투에서 비록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마방태감(馬房太監)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이라는 궁중의 환관 두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명나라 조정에서 환관이 받는 대접을 잘 아는 후금군은 두 사람의 환관 포로를 비교적 관대하게 대접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둘이 구금되어 있던 바로 옆방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이 밀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숭환과 홍타이지 사이에 이미 북경을 공취(攻取)하기로 약속했으니 북경은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두 환관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밀담을 들었다. 자신들이 여기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두 사람이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11월29일, 홍타이지는 명나라 조정에 평화를 제의하면서 양춘과 왕성덕 두 사람도 풀어주었다. 풀려나 황궁을 돌아온 두 사람은 숭정제에게 자신들이 들은 바를 고했다. 이전부터 원숭환을 의심하던 숭정제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만주인들이 삼국지연의에서 주유장간을 이용해 채모장윤을 모살한 부분에서 힌트를 얻어 이 계책을 꾸몄다고 한다. 주유가 반간계로 채모와 장윤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소설에 불과하고 역사적 사실이 아니지만 당시 무식한 만주인들은 실제 역사는 잘 모르고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은 잘 알았기 때문에 그 계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너무 작위적이라 예로부터 그 진실성을 많이 의심받아왔다. 다만 에피소드 자체는 훗날 만들어진 이야기일지 몰라도 반간계 자체는 존재했던 게 분명하다.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1630년 인조 8년 2월 27일 정축 2번째 기사에 후금에 사신으로 갔던 박난영이 보낸 글에

골대가 좌우를 물리치고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원공(袁公) 이 과연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일이 누설되어 체포당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반간계(反間計)를 쓰는 말이 분명합니다.

라는 구절이 있다. 명나라 조정의 신하도 아닌 외국 조선의 사신에게까지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당시 후금이 주도하는 대 원숭환용 반간계가 다방면으로 펼쳐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직접적인 증거인 셈이다.

위의 일화는 원숭환이 체포된 이후의 일이니 어쩌면 원숭환의 체포 당시에는 반간계가 없었더라도 원숭환의 구금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부르며 원숭환의 완전한 제거를 위해 불리한 증거들을 마구 만들어 퍼뜨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건 당사자인 후금이 자기 쪽에서 조작하는 일이니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조선 사신도 듣자마자 코웃음을 치는 이런 유치한 속임수에 어느 바보가 넘어가겠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분명히 일리 있는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정상적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배를 잡고 웃으면 웃었지 이따위 조악한 반간계에 속을 리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정치사, 전쟁사는 반간계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숭정제가 평생토록 보여준 지독한 의심증과 당시 명나라 조정의 고질적인 당쟁은 이런 유치하고 졸렬한 속임수가 충분히 통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었고, 명나라 조정은 자신들의 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

8 최후

1629년 12월 1일, 아직 후금군이 물러가지 않고 북경 조금 아래 쪽에 주둔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원숭환을 군량에 관해 의논할 것이 있다는 구실을 붙여 황궁으로 소환한다.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으니 당연히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은 원숭환은 수하인 총병 만계(滿桂)와 그의 부장 흑운룡(黑雲龍) 두 사람만을 대동하고 황성으로 달려갔다. 후금군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으니 성문을 열 수 없다면서 문은 열리지 않고 성 위에서 큰 바구니가 내려왔고, 원숭환은 바구니를 타고 북경성으로 들어가 황궁에서 숭정제를 만난다.

그러나 원숭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군량에 대한 의논이 아니고 배신에 대한 숭정제의 추궁과 힐난이었다. 생각도 못했던 급작스런 추궁에 원숭환은 당황하여 제대로 입을 열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것을 숭정제는 배신의 또 다른 증거로 보았는지 불문곡직 원숭환을 금의위 감옥에 투옥하고 만다. 원숭환이 대동했던 총병 만계와 만계의 부장 흑운룡에게는 승진과 함께 상이 내려졌다.

북경성 아래에 있던 원숭환의 수하 조대수는 원숭환 구금의 소식을 듣자 자기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해관을 넘어 도망친다. 애초에는 후금에 투항하려고 했지만 숭정제의 명으로 원숭환이 옥중에서 보낸 서신과 손승종의 만류로 도로 귀환한다.

원숭환이 체포 구금되었다는 소식에 먼저 조정의 대신들이 놀랐다. 즉각 그를 구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먼저 내각 대학사 성기명(成基命)이, 뒤를 이어 손승종이 “적이 성 아래에 와 있는 상황에서 원숭환을 죽이는 것은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리는 일과 같다.”고 말하며 구명을 청했다. 반대로 원숭환을 즉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엄당(閹黨)의 인물들이었다. 천계제 시절 권세를 누리던 환관 위충현이 만든 엄당은 위충현의 실각과 함께 세력이 약해졌으나 이 기회에 다시 세력을 만회하려는 목적으로 동림당의 지지를 받는 원숭환을 말살하려고 했다. 또한 원숭환이 주살한 모문룡은 엄당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막대한 뇌물을 보내주는 고마운 화수분이기도 했는데 그런 화수분을 부숴버린 원숭환이 증오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다 북경 시민들의 여론도 결코 원숭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원숭환을 구명하려는 동림당과 그를 죽이려는 엄당의 논쟁은 몇 개월에 걸쳐 계속되고 마침내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준다. 아니 오히려 원숭환 처형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 바로 숭정제였고 엄당은 그런 황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열심히 원숭환 처형을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1630년 음력 8월 16일 원숭환은 임금을 속인 죄와 모반의 죄로 서시(西市) 거리에서 책형(磔刑)에 처해진다. 책형은 시대에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명청 시대에는 능지형이었다. 시장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점이 한 점씩 잘려나가는 형벌로 적게는 수백 번, 많게는 천 번이 넘는 칼질을 받을 동안 죄인은 살아 있다는 끔찍한 형벌이다. 이때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북경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나눠진 그의 살점을 씹었다고 한다.[11]

누르하치홍타이지라는 두 명의 영웅을 패퇴시키며 조국 명나라를 수호하던 일대 명장의 억울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최후였다.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원숭환의 죽음이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부분에서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9 죽음 이후

원숭환이 북경에 소환될 때 동행했던 두 사람 총병 만계와 그의 부장 흑운룡이 숭정제로부터 상을 받고 승진했다는 이야기는 위에 적었다. 만계는 원숭환 구금 직후 상방보검을 받고 경략으로 승진 북경 방위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때 후금군이 다시 몰려와 북경성을 포위하자 숭정제는 만계에게 나가 싸울 것을 명령한다. 만계는 전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성을 나가 싸우면 승산이 없으니 농성할 것을 건의했지만 숭정제는 계속 나가 싸울 것을 재촉했다. 숭정제의 명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 죽음을 의미했다. 12월15일 만계는 어쩔 수 없이 수하인 흑운룡, 마등운(麻登雲), 손조수(孫祖壽) 등을 대동하고 북경성을 나가 북경성 영정문(永定門) 밖 2리 되는 곳에 진영을 세우고 다음 날인 16일 후금군과 싸우지만 대패한다. 만계와 손조수는 전사하고 이쯤 되면 상방보검은 그냥 사망 플래그 흑운룡과 마등운 등은 후금군에 생포된다. 흑운룡은 훗날 탈출하여 명으로 귀환한다. 훗날 북경성으로 이자성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노인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항복을 거부하고 아들들과 함께 순절한다.

홍타이지가 인솔하는 후금군은 약탈전에 완전히 성공, 후금 최대의 현안이던 물자부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염원하던 홍이포 제작 기술자까지 손에 넣는다. 1631년 후금이 제작한 홍이포가 전선에 등장한다.

북방 루트를 통한 후금의 약탈전은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를 막아내고 방어선을 건설할 능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은 명나라 스스로 죽여 버렸다. 후금의 약탈전은 북경 일대를 넘어 산동, 산서까지 미쳤고 이를 저지해야 할 군사들은 진영 안에 머문 채 이들이 그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고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홍타이지는 수만의 군대가 있었지만 화살하나 쏘는 놈 없더라며 명나라를 조롱한다. 산동을 약탈한 도르곤이 천진 운하를 건널 때는 도하에 며칠이 걸렸고 방비도 허술했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이를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12] 명나라는 후금에 백성과 재물을 공급해 주는 좋은 공급원에 불과했다.

졸지에 역적의 가족이 되어버린 원숭환의 유족들은 후금으로 도망친다. 원숭환의 아들 원문필은 뒤에 한군 팔기에 소속되어 후금군에서 공을 세우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벌어진다.

조정대신도 군인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인물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일생을 명왕조를 위해 바치며 충성했던 원숭환의 이런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이상, 명왕조를 위해 충성할 마음이 생겨날 수 없었다.

후금은 이후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킨 뒤에 명나라 요서 방어선을 공략한다. 과연 원숭환이 없는 요서 방어선은 차례로 무너지고 명나라의 대청 방어선은 산해관까지 후퇴하고 만다. 결국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요서 방어선을 지키던 원숭환의 부하들은 요서 방어선 붕괴와 함께 차례차례 청에 항복한다.

원숭환의 죽음과 동시에 그의 수하들이 후금에 항복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원숭환이 기른 인물들은 모문룡 집단의 무리와는 달리 나름대로 최대한 직업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그들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요서 방어선이 붕괴된 이후다. 가장 많이 알려진 조대수(祖大壽)의 경우 원숭환의 죽음에 불만을 가져 투항한 것이 아니고 원숭환이 구금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거느리고 산해관 밖으로 도망쳤다가 원숭환의 옥중서한과 손승종의 권고로 도로 귀환한다. 이후 1631년 대릉하를 방어하다가 자체 제작한 홍이포와 대장군포를 앞세운 후금의 공세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항복한다. 하지만 금주를 투항시키겠다고 위장하여 탈출한 뒤 오히려 금주성 방위의 책임자가 되어 금주를 방어한다. 이후 금주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다시 투항한다. 이때 조대수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홍타이지는 그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그 이후부터 그는 충실한 청의 신하로서 명나라 공격에 종사한다.

이런 역사상 일대의 억울한 죽음을 명한 숭정제 자신은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점령하자 다른 신하들은 다 도망쳐 버리고, 단 한 명의 환관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결하고 만다.

요서 방어선 붕괴 후 산해관은 오삼계의 지휘 하에 청나라 군을 막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이자성에 의해 명이 망하자 오삼계는 군사를 거느리고 청에 투항한다.

원숭환은 청나라 건륭제 때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된다. 그렇다고 이때 이르러 원숭환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다 그런 건 아니고 이미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건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청나라와 싸웠던 인물이라 공식적 복권이 늦어졌던 것뿐이다.

원숭환의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나 반간계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 등이 건륭제 당시에 조작되는 이야기도 돌아다니지만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적었듯이 반간계는 원숭환이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나온 이야기이며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은 영웅이라는 이미지도 건륭제 때 조작된 이미지가 절대 아니다. 다만 원숭환이 처형되는 시점에서부터 청나라 초기까지는 원숭환이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걸로 보인다. 당시에 기록된 야사 중에는 사람들이 반간계인 줄 알았는데 진짜 배신이었다는 식으로 이런 반역자 원숭환의 이미지가 그대로 나타나는 기록이 여럿 보인다. 하지만 강희 중기 쯤 되면 이미 원숭환에 대한 이미지는 완전히 반전 역사상 보기 드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명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1712년에 쓰인 노가재 연행일기[13][14]에 보면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북경으로 가는 길에 영원 지방을 지나며 반간계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원숭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때가 강희 51년이고 이때 이미 원숭환은 완전한 영웅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지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15]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그동안 만주족에 의해 핍박 받던 한족들에 의해 멸만흥한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원숭환의 죽음은 중국 역사상 가장 억울한 죽음으로 꼽혔고, 그를 찬양하는 작업이 활발해진다. 청나라 말기의 양계초도 그런 인물 중 하나로 원독수전(袁督師傳)을 지어 그를 기리고,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광서(光緖) 연간에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이다. 그는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에다 한족 민족주의자로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을 만든다. 그는 원숭환을 죽인 것은 명나라지만 그 원인은 반간계를 쓴 청나라를 지목하여 청나라에 대한 한족의 반감을 고조하고자 했다. 덕분에 반청 한족 민족주의 상징같은 인물의 위치에 있기도 하고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쉬운 위치에 있다 보니 아래 논란 부분에 나오는 엉뚱한 주장이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 중국에서도 평가는 높다. 공산당이 베이징에 입성하여 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직후인 1952년 베이징시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지식인들이 마오쩌둥에게 원숭환의 묘를 보전을 건의했고 마오쩌둥 역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평가하며 당시 베이징 시장에 원숭환묘의 보전을 명령했다.

10 논란

현대의 중국인들 중에는 모문룡을 죽였기 때문에 원숭환도 망하고 명도 망했다는 식으로 질타하는 주장도 있다. 과연?;; 모문룡이 모택동이랑 성씨가 같아서 그런 걸지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국공내전 승리에서의 게릴라전이 매우 핵심이기에 게릴라전이라면 다 우호적으로 봐서 그렇다는 비판도 많다. 다만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전문 역사학자들이 아니고 역사 전공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전문 역사학자들은 없다고 봐도 좋다.

원숭환(袁崇煥): 군사재능이 과대평가되었는가 글/누흔)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이 잘못인가 글/ 주가웅

중국에서는 이런 글들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며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원균 명장론 수준의 인터넷 뻘글에 불과하지만 이걸 현대 중국 사학계의 주류 의견이나 현재의 대세 의견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전 문서에도 그런 식으로 착각할 수 있도록 적혀 있는 부분도 있어서 링크를 삭제하지 않고 남겨둔다. 그리고 위의 주장은 블로그 주인장의 의견이 아니고 블로그 주인장은 중국에 이런 글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블로그 찾아가서 난동부리지 말자.

당장 위 블로그의 글에선 '원숭환은 견고한 성위에서 고작 이틀을 막아냈을 뿐인데 뭔가 명장이냐'고 하는데, 반박하자면, 원숭환은 고작 이틀밖에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틀 만에 적을 무찌른 것이다. 누르하치라는 일생 승리밖에 몰랐던 영걸이 고작 이틀 만에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영원성 전투(영원대첩)의 후금측 전사자는 500명이 아니고 2000명이며 이 전투의 패배가 원인이 되어 병사했다는 건 원숭환 숭배자가 과장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르하치의 후손들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영원, 금주 전투(영금대첩)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모자란다는 말을 듣지 않는 홍타이지가 이때만큼은 오락가락 우왕좌왕 영원과 금주 사이를 왔다갔다 기력만 허비하고 그답지 않은 모습만 보이며 체면을 완전히 구긴 전투였다. 이런 전공을 세운 사람이 명장이 아니라면 도대체 글쓴이가 말하는 명장의 조건이 뭔지 궁금하다. 소수의 군대로 열 배가 넘는 적을 평지에서 무찔러야만 명장인가? 어린애 같은 망상은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다.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적을 격파하는 건 다수의 적이 병신같은 짓을 해서 스스로 약점을 만들어 줄 때나 가능한 건지 누르하치나 홍타이지 같은 뛰어난 전술가들 앞에서 그딴 짓을 벌였다간 한신이나 백기 같은 인물도 그저 밥이 될 뿐이다.

그리고 글쓴이가 말하는 그 아무것도 아닌 수성전을 못해서 순식간에 요동의 70여개 성이 누르하치에게 넘어갔고 영원성 전투 이전 고제(高第)는 요서 지역의 모든 성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산해관으로 후퇴시켰다. 수성전이 글쓴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성만 쌓으면 전쟁에 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아래 블로그의 글은 더 웃기는데 저 글에 있는 모문룡의 활약은 글쓴이의 머리 속에나 존재하는 망상에 불과하다. 당시 사료를 조금만 교차 검증해보면 당장 박살나는 내용들이다. 모문룡이 실제로 그런 활약을 보여줬다면 웅정필, 원숭환이 왜 그 개고생을 했을 것이며 정묘호란에서 조선이 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겠나. 중국에서도 원균 명장론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원균 명장론 같은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위 블로그의 글 같은 인터넷 뻘글 몇 개를 읽고 현대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원숭환을 까는 의견이 의외로 강하다는 주장 같은 건 좀 자제하자. 한국 인터넷에 원균이 명장이라는 의견이 몇 개 돌아다닌다고 많은 사람이 진짜 원균이 명장이라고 믿는 건 아니다. 환빠들 주장이 인터넷에 넘쳐난다고 한국 사학계 주류 의견이 환빠들과 같다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0.1 명장인가?

원숭환이 이루어 낸 일이 원숭환 혼자 달성한 일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는 의견이 있다. 현대의 원숭환 평가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측에서는 역사를 앞뒤 잘라버리고서 마치 사르후 전투 패배해서 망해가는 명을 원숭환이 추스리고 원숭환이 죽자마자 명나라가 망한 식으로 모든 공을 원숭환의 공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은데 과연 이게 사실인거냐는 게 첫 번째 문제. 일단 후금군을 상대로 사르후에서 야전에서 박살난 후 후금 군을 상대로 한 총괄적인 대비책 = 삼방포치책 = 산해관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고 수군으로 후금을 괴롭히며 조선의 도움을 받자.를 마련한 장수는 웅정필이며. 홍이포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은 서광계이며 산해관에 홍이포를 설치한 사람도 서광계이다. 원숭환이 한 일은 산해관 앞에 지성인 영원성을 건축하고, 이 홍이포의 배치를 재배치하고, 홍이포의 전문가인 손원화를 불러들여 부하들을 교육시킨 것에 불과한데 모든 공을 원숭환에게 돌리는 것을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원숭환은 여러 가지로 타고난 장수라기보다는 꼼꼼하고 대비가 철저한 밀덕후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다보니 "걍 성문 위에서 대포만 갈겼는데 그게 대단함?" 이라면서 거품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따르면 세상에는 명장이라는 존재가 아예 있을 수가 없다. 저런 억지를 믿으면 이순신도 명장이 아니다. 판옥선도, 각종 총통도 이순신이 만든 건 하나도 없다. “왜군 전선보다 훨씬 우수한 판옥선 위에서 포만 갈겼는데 이순신이 무슨 명장임?” 하는 거랑 전혀 다를 게 없는 주장이다. 알렉산더 대왕도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남긴 군대와 전술을 그대로 활용했을 뿐이고 나폴레옹도 이미 당시 유럽 젊은 군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던 전술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원숭환은 당시 명나라 군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평지에서의 전투를 회피하고 수성전에 전력을 집중하며, 보급에 만전을 기한 뒤 병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끝까지 사기를 유지하는 등 명장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잘 수행하였다. 만약 이 정도는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군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자인하는 거나 다름없다. 기본을 제대로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은 세상만사에 다 통하는 이야기지만 군사 부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당장 이 정도도 못해서 운에 모든 것을 걸고 대충 추스린 병력으로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하는 일이 전쟁사에 비일비재했다.

원숭환이 펼친 방어 전략과 동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은 웅정필이 먼저이며 웅정필이 뛰어난 군략가라는 것과 원숭환 명장론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선배가 잘 잡아놓은 방법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해서 그걸 계승한 사람에게 아무 공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선배가 잘 잡아놓은 방법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도 비범한 재능이며 이것도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새고 샜다.

원숭환이 죽은 뒤에도 방어선은 기본적으로 잘 작동했다는 주장은 원숭환이 기본적으로 방어 시스템과 전략을 잘 세워두었기에 견고하게 막을 수 있었다는 말로 간단히 논파되며 그렇게 하고도 원숭환 사후에는 차례차례 함락된다. 물론 이때는 만주군에도 홍이포가 갖춰져 있었다는 점이 큰 이유의 하나다.

산해관은 원숭환이 죽고난 이후에도 명나라가 이자성의 반란에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안이 아닌 밖에서 열리지는 못했다는 주장은 산해관이 '한 명이 서 있으면 일만 명을 막을 수 있다'고 전해지는 천하제일의 요새화된 관문이기 때문이며 그나마도 원숭환이 군사를 잘 훈련시켜 놓은 덕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10.2 모문룡의 처형

원숭환이 명장이 아니라는 설은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불과하지만 모문룡의 처형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요즘 나온 얘기가 아니라 명나라 말기나 청나라 초기의 기록에도 이미 이 논란이 나온다. 이는 원숭환이 몰락 및 죽음을 맞는 직접적인 계기의 하나가 되었는데, 문제는 원숭환이 도대체 왜 모문룡을 죽였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아무리 객관적으로 서술해도 모문룡에게 문제가 많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가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선에는 큰 민폐였는데, 인조가 즉위하고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모문룡에게 의지하자[16] 이걸 빌미로 조선에서 미친 듯이 수탈을 시작하고 양곡으로만 26만 8천 7백여 석, 은으로는 맨 마지막 해만 50만 냥을 뜯어간다. 심지어 조선왕조 실록에는 모문룡의 이름이 총 580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큰 해악을 끼친다. 물론 타국에는 민폐라도 자국에게는 명장이 될 수 있지 않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웅정필과 원숭환의 전략은 조선의 힘을 빌어서 함께 청나라를 무찌르는 것이었고, 특히나 인조가 친명반청을 기치로 내세운 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민폐를 끼쳤던 건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본국에 민폐를 안 끼친 것도 아니다. 가도를 경영하고 명의 유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명나라 본국으로부터 매해 20만 냥의 은을 받아간다.

또한 모문룡의 군대가 후금을 어느 정도 견제한 것은 사실이고, 미약하지만 약간의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진강성을 빼았고 성주를 죽이고 + 가도진 건설 후 여섯 차례 후금 본국으로 진입하여 후금을 짜증나게 했으며, 간계에 능하여 후금 내의 한족 반란도 모문룡이 지원하였으며, 병사들 역시 본국에서 뽑아간 건 200명뿐이고, 건달들과 패잔병들 및 후금에 납치되었다 도망친 명나라 병사들을 모아서 총 7만 명의 병력을 편제할 정도로 크게 세를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금을 상대로 승리한 적은 없으며, 심지어 조선 조정에서도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걔네가 도움이 되겠냐는 질문에 그가 거느리고 있는 것이 모두 오합지졸인데 어떻게 쓸 수가 있겠습니까 라며 디스 당할 정도로 군사들의 자질도 개판이었다. 원숭환이 이후 모문룡에게 다섯 가지의 개혁안을 보냈던 것을 보면 모문룡의 조직 체계 자체가 문제가 많았다.

게다가 원숭환의 주장에 의하면, 모문룡은 숭정제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기까지 했다! 이를 숭정제가 알았다면 숭정제의 성격으로 봤을 때 빼도박도 못 할 사형감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교차 검증할 경우 원숭환의 주장이 맞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단 40명의 기병에게 패배하고는 며칠 후 무려 만 명의 후금군을 상대로 승리했다며 조선에 지켜줬으니 물자 내놓으라며 자랑겸 꼬장을 피우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모문룡은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숭정제로부터 임명을 받은 장수임에는 틀림없고[17] 원숭환이 임의로 처형할 수 있는 부하 장수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순신이 열받은 나머지 원균을 죽여 버린 것과 비슷한 상황[18]아..아깝다..인 셈인데, 원숭환이 아무리 공적과 명성이 높았다고 해도 모문룡을 죽인 것은 명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원숭환이 이런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모문룡을 죽여야 할 급박한 이유는 없었다는 점이다. 모문룡이 명에 큰 도움은 안 되었을지 몰라도 청에 투항해서 명을 공격한다거나 하는, 시급히 주살해야 할 정도의 반역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모문룡 처형 이후 모문룡의 부하들도 건달패에 가까운 자들이었지만 나름대로 뛰어난 통솔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는데. 모문룡을 죽이고 사후 처리도 엉망으로 해서 결국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은 그대로 살아남아 해적이 되거나, 반란을 일으킨다. [19][20] 명에서는 수군 대도독 주문욱과 7만의 군대를 보내어 이들 반란군을 진압하였지만 이들은 청으로 도주하는데 성공[21] 덕분에 총 1만 4천의 병력과 185척의 전함, 그리고 전함마다 실려있던 홍이 대포 및, 그 대포를 제작할 수 있는 제작소, 대장장이까지 모두 넘어간다. [22] 여기에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은 인성이 양아치라 그렇지 수군 지휘의 달인들인 뛰어난 장수들이었으며 이에 홍타이지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며 감격한다. 그리고 단 2개월 이후 공유덕과 경중명이 지휘하는 청의 해군은 명나라의 해군을 여순에서 대파하며 갑자기 청과 명의 세력 균형 추가 완전히 무너진다. 이후에도 공유덕과 경중명, 상가희등은 공을 계속 세워 청의 번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공유덕의 딸인 공사정은 청나라 황제의 양녀가 되어 황실의 공주까지 된다. 이러한 점에서 모문룡 처형이 어떤 나비효과를 낳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원숭환이 순간적으로 분노해서 칼을 뽑아 죽인 것도 아니고, 주연을 즐기는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기회를 노리다가 갑자기 포박해서 죽인 것으로 보아 명백히 계획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숭환은 이에 대해 숭정제에게 석고대죄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것이 석고대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았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 일단 첫 번째 원인으로 뽑을 만한 것은 원숭환과 모문룡의 관계 자체가 그닥 좋지 않았었고, 원숭환은 모문룡의 가도진에 문제가 심각하게 많다는 것을 인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원숭환 같은 경우 모문룡에게 5개조의 가도 개혁안, 즉 병사 훈련 좀 제대로 시키고, 부정축재 하지 말고, 명령 좀 잘 듣고 등등의 개혁안을 보내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의 반응은 니가 뭘 아냐 하고 끝.

또한 현대 모문룡을 치켜세우고, 원숭환을 디스하는 중국측 의견 중 하나로는 모문룡은 공유덕, 경중명과 의형제를 맺은 협객출신인데 원숭환은 고루한 유학자 출신이다. 즉 유가적 마인드로는 협객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제거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는 지극히 계급투쟁적, 공산주의적 마인드의 설도 있다(-,-;;) 원숭환의 마음속을 자기 멋대로 들어갔다 나왔다는(...)점에서도 일단 말도 안 되는 설로, 특히 명나라는 아예 신분제 자체가 없었던 나라였고, 모문룡의 출신은 미상으로 3가지 설이 제시되니 꼭 협객이라고 할 수 도 없고, 유가와 협객이 대립각을 세운다는 전제도 잘못되었던 데다가, 원숭환이 몽고 출신의 장수와도 함께했던 걸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모문룡을 치켜세우고 원숭환을 디스하며 계급투쟁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론. 다만 나름 이름있는 가문 출신의 원숭환에게, 모문룡을 처형하는 데에 약장수나 범죄자 출신이며 교양도 없는 모문룡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가 좀 더 작용했을 수는 있기야 하다.

  • 또 하나의 원인 중 하나로 뽑을만한 것은 원숭환의 전임자였던 웅정필의 처형. 즉 웅정필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원숭환이 아무리 옳은 지휘를 해도, 부하가 제멋대로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서 실책을 저지를 경우 처벌은 정작 그걸 말린 상관인 원숭환도 함께 처형당한다는 점에서 원숭환이 모문룡의 행패와 자기 명령에 안 따르는 것에 대해서 큰 위기감을 느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상황은 아니지만, 당시 막장인 명나라 상황에서 이미 웅정필 이외에도, 자기는 누르하치가 쳐들어온다고 정확하게 보고했을 뿐인데 막상 장슴음이 싸우러 나가서 깨지니까 처형당한 이유한이나, 사르후 전투에서 지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예전에 관계 좋을 때 누르하치 동생 딸이랑 결혼했다고 니가 배신해서 진거 아니냐고 추궁당해서 자살당한 이여백 등 수 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 여기에다 모문룡이 조선에 부리던 행패가 단순한 민폐 수준이 아니어서 조선과 협력하여 후금을 견제 공략하려는 원숭환에게 모문룡이 엄청난 장애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 끝날 때 도우라는 조선을 돕기는 커녕 오히려 부하들을 보내 청군에 의해 머리가 깎인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 조정에다가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 서해안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다가 꼴리면 약탈을 자행하고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을 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평안도 사람들이 모강도가 쳐들어온다는 말에 청나라 군대가 오는 것보다도 무섭다면서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원숭환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을 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동맹국이 되어야 할 조선을 거의 적국으로 돌릴 만한 모문룡의 행패를 더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숭환은 모문룡의 목을 친 다음에 조선에 편지를 보내서 모문룡이 그간 벌인 행패를 참다 못해서 죽였으니 이제 양국이 힘을 합쳐서 청에 맞서자는 편지를 보냈다.
  • 당파적 문제로 모문룡을 죽였다는 설도 있다. 이건 명말 청초의 야사 등에서 보이는 것으로 원숭환은 동림파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인데 전용석은 일찍이 예부시랑까지 승진했지만 천계년간에 위충현에 의해 쫓겨난 이력이 있는 인물로 숭정제 즉위 이후 위충현이 실각시키고 위충현의 당파인 엄당 제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 어느 날 같은 동림파의 선배인 진계유(陳繼儒)가 터럭 하나(一毛)[23]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게 어떠하냐고 넌지시 권했다는 것이다. 전용석은 처음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후 원숭환을 만난 자리에서 일모(一毛)가 바로 엄당의 자금줄이던 모문룡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원숭환에게 모문룡 제거를 권했고 원숭환이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굳이 직접 모문룡을 죽인 것은 여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모문룡이 죽여 마땅한 인물이었나 아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조정에 모문룡의 죄를 보고하고 그를 처벌할 것을 청하는 일반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직접 모문룡을 죽여야 했는가이기 때문이다. 명나라 조정에서 보면 아무리 모문룡의 죄가 사형을 당할 만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판단하고 집행하는 것은 원숭환 개인이 아닌 숭정제의 조정이어야 한다. 만약 모문룡이 조정에 뇌물을 많이 바쳐서 등의 이유로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면,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썩어빠진 조정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청나라와의 일이 급해서 원숭환이 일단은 용서받았지만,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조정에서 즉시 원숭환을 잡아들여 죄를 묻는 게 당연한 대응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동료 장수를 임의로 죽이는 것은 반란의 첫 번째 단계가 되는 동시에 반란으로의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으로 간주된다.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원숭환은 자신의 죽음을 상정하지 않고 나중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김용은 그의 소설 《벽혈검》에서 원숭환의 아들 원승지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화산파의 무공을 익힌 뒤 침략하는 만청족과 부패한 명황실에 대항하는 모습을 그렸다. 물론 원승지는 창작 인물이다.
  1. element란 의미의 그 원소와 정확히 같은 한자를 쓴다. 역시 화학덕후
  2. 따지고 보면 의외로 비슷한 점 많다. 조선과 명나라의 인간 비밀병기급 활약을 펼쳤고 상관과 동료를 잘못 만나 생고생한 점. 적군의 이간질로 고생한 점. 화력덕후였다는 점. 다만 원숭환은 실패했고, 이순신은 성공했다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3. 예를들어 임진왜란때 종군한 총병 유정은 무관이었고, 부총병 양호는 문관이었다.
  4.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라는 말처럼 현대의 눈으로 보면 그다지 좋은 방침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무관이라는 건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현대의 직업 장교와 달리 전문 교육 따위는 전혀 받지 않고 군에서 오래 생활했거나 개인적인 무력이 뛰어날 뿐인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글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전문적으로 글을 읽어주거나 문서를 작성해주는 문사들이 따라다녀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전근대 동양에서는 대국적인 안목을 갖춘 무관이 없을 경우 군사 부분에 소양을 가진 문관이 무관을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원숭환이나 웅정필처럼 문관이었지만 성과가 나온 경우도 있지만, 사르후 전투의 판도 자체를 잘못 짜서 패배의 단초를 만든 양호 같은 인물도 나온다. 다만 양호는 임진왜란에서는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을 보여줬다.
  5. 사실 원숭환의 행동은 근무지 무단이탈 등으로 중형을 받을 수도 있는 사항이었지만, 당시 명나라는 상황이 말이 아니었고 원숭환의 행동도 적을 정탐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6. 누르하치는 원숭환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30만 대군이라고 자칭했고 뒤의 기록에도 16만이라고 되어있지만 당시 후금의 동원 능력등을 고려해보면 실제로는 10만 정도로 추정된다.
  7. 이전 문서에는 정묘호란이 모문룡과 그를 받아준 조선조정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었지만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묘호란은 후금이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모문룡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일어났을 전쟁이다.
  8. 천계제 시절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장학하면서 세력을 형성한 당파로, 엄(閹)은 환관이라는 뜻이다. 환관인 위충현이 만든 정파라서 엄당이라고 불리지만 주요 인사들은 환관이 아닌 조정 대신들이었다. 숭정제 즉위와 함께 세력이 약해지지만 그래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후 명나라 멸망하고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대항해서 마지막 싸움을 힘겹게 벌일 때도 이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9. 내부에 후금과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 다만 이자성이나 이자성 이전의 두목 고영상이 도적이 된 것은 후금의 약탈보다 조금 이전이다.
  11. 모문룡의 가족이 그가 보는 앞에서 나눠진 그의 살을 씹었다는 설도 있다.
  12. 물을 건널 때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라는 건 전근대전에서 병가의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군사들은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13. 1712년 동지사겸 사은사인 김창집의 아우 김창업이 자벽무관으로 형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이다. 수많은 연행 기행문 중에서도 발군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는 또 다른 읽는 재미가 있다.
  14. 한국고전 종합DB 로 들어가 서명에서 연행록선집을 찾은 뒤 다시 연행일기 항목으로 들어가면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
  15. 영원성을 지나갈 때 짧게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가 역사에 밝지는 않은지 원숭환이나 기타 당시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앞뒤가 좀 맞지 않거나 과장되거나 하는 부분들이 보인다. 그냥 민간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고 옮긴 듯.
  16. 모문룡이 이후 이걸로 엄청 울궈먹는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인조에게 나 아니면 왕도 못 됐을텐 데 물자 좀 달라는 걸 거절해? 라고 땡깡 부리다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일까지 존재한다.
  17. 특히나 모문룡은 원숭환보다 먼저 전장에서 부하를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상방보검을 받았다. 직급 자체는 한 단계 낮아도 원숭환과 동일한 위치임을 조정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18. 사실 임진왜란때 정말로 이와 비슷하게 될 뻔했다. 다만 원균을 죽여버릴 뻔한 건 이순신이 아니라 권율이었다. 원균이 호언장담하며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는데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마자 말을 바꿨다. 이에 열 받은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만약 권율이 원균을 참수형으로 다스렸으면 진짜 이와 똑같은 일이 날 뻔했다.
  19. 물론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순간 자신도 죽게 되리라고 생각하기는 정황상 어려웠고일단 권한을 받기는 했고 숭정제도 뛰어난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모문룡 부하들이 원래 명에 반역한 자들이라서 청에 투항했다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는데, 숭정제가 하도 사이코라 당시 명에서는 대장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죽거나 투옥되는 경우 그 부하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숭정제의 재위기간인 17년동안 죽이거나 자살하게 만든 총독만도 11명, 죽인 순무가 11명이다. 단적인 예로, 원숭환의 부하들 역시 원숭환이 죽자 결국은 청에 투항했다.
  20. 근데 또 이 해석도 애매하다. 산동반도의 등래 수군으로 해로로서 청을 견제하던 손원화가 공유덕, 경중명의 무리들을 받아주고 또 중용했기에 사실 명에 충성한다면 충성할 기회는 있었다. 사실 출신 성분만 봐도 그렇게 좋은 무리들은 아니었다. 다만 어쨌든 모문룡 밑에서 반란을 한건 아니니 일차적인 잘못은 원숭환에게 있다.
  21. 수군이 필요했던 홍타이지에 의해 범문정이 나서서 설득을 했으며, 모문룡의 원한을 갚아야하지 않냐는 식으로 설득했다는 야사가 있다.
  22. 원숭환의 화포를 이용한 수성전략은 적군이 강한 공성포를 운영하게 되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23. 모문룡의 성이 바로 털 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