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덕제

(홍타이지에서 넘어옴)
청의 역대 황제
초대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2대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3대 세조 순치제 풀린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40대 에제이 칸41대 복다 칸42대 아이비어 자사크 칸
묘호태종(太宗)
시호만주식겅시연 수 황제
중국식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한호[1]언두링거 한
칸호[2]복다 카간
만주어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愛新覺羅 皇太極, 애신각라 황태극)[3]
연호
(후금)
만주어압카이 수러
중국어천총(天總)
몽골어-
연호
(청)
만주어워시훈 어르더뭉거
중국어숭덕(崇德)
몽골어데게데 에르뎀투
생몰기간양력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
재위기간양력1626년 10월 20일 ~ 1643년 9월 21일 (15년 337일)

1 소개

(淸)의 제2대 황제. 청 태조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후계자가 되어 후금의 2대 한[4]으로 즉위했다. 첫째가 아닌데도 후계자가 된 것은 유목민족 문화가 장자계승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통 생각하지만, 사실 홍타이지의 어머니가 만주 최고의 명문가 에호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는 개인의 능력으로 만주를 통합하였지만 집안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정책적인 면에서 에호부의 명성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후처로 에호부 집안의 여자를 맞아들인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누르하치의 장남 아이신기오로 추연(愛新覺羅 褚英)은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 건국전에 숙청(유폐 이후 사망)당하며, 추연의 후손은 맏이의 후손임에도 청조 내내 무시당한다.[5]

어머니 집안의 후광으로 한이 되었지만 그 능력은 충분히 뛰어났는지, 내몽골을 평정하여 나라의 잔존세력으로 나라를 위협하던 차하르 몽골을 정복하여 대원제국 옥새를 얻었고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고치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청태종의 몽골 평정 이후 청의 황제는 몽골의 칸으로도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원나라의 정통을 잇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칭제하였으며, 반발하는 조선을 신속하게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어 신종하게 만들어 후방의 위협을 없앰으로써 중국 공격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공고히 만들었다. 이후 반간계를 이용해 숭정제로 하여금 원숭환을 죽이게한 뒤 산해관 외성들을 함락했으나 산해관 본성까지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후 중원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얼마 못 가 급사했다. 청의 중국 정복은 아직 어렸던 아들 순치제의 섭정을 맡은 홍타이지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도르곤(愛新覺羅 多爾袞)이 하게 된다.

이름에 대한 논란이 있다. 가 흔히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愛新覺羅 皇太極, 애신각라 황태극)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홍타이지'는 휘가 아니라는 설이 있는 것이다. '타이지'라는 단어는 사실 몽골족 세습귀족 관리의 명칭인 '일반명사' 비슷한 것으로 몽골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주 나오는 이름이 '타이지'다. 일본의 중국사학자 미타무라 타이스케(三田村 泰助)는 홍타이지의 본명을 '허칸'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어쨌든 청태종의 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분명하지는 않다. 아바하이(阿巴海)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건 그 당시 홍타이지가 만든 연호인 압카이 수러[6]를 러시아인들이 이름으로 잘못 읽고 이것이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이다. 그 외에 '홍'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

2 조선 관련

사실 한국에서는 중국사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해 더 친숙한 인물이다. 다름아닌 조선 인조 정권 당시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연 2차 침공하여 끝내 인조로 하여금 삼전도에서 삼전도의 굴욕이라고도 불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굴욕을 겪게 만든 인물이기 때문. 조선의 철천지원수

조선은 사대주의로 명나라를 섬기다가 병크의 병크를 거듭하여 자멸하였고 홍타이지가 자비를 베풀어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편견이 퍼져 있는데 그나마 그것도 사학계 이야기고 대중역사학은 아직도 때린 놈이 아니라 맞은 놈에게서 원인을 찾고있다. 흑역사지만 여러 매체에 역사물을 다룬 작품들 중에서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의외로 침략자에 대해 관대하게 평가받는 해괴랄한 역사이기도 한데, 심지어 어느 매체에서는 홍타이지에 우호적이지 않은 집단들은 대차게 까이기까지 한다(...). 이 문제로 홍타이지의 침략행위에 대한 비판은 잉굴다이에게 전가됐는데 실제로 잉굴다이는 조선을 신사적으로 관대하게 대우해 주었는데 조선이 청태종을 비난 할 수 없으니 대타로 잉굴다이를 비난한 것이다. 한마디로 주객이 전도가 된 것

조선에 대해서 침략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아버지 누르하치와 다르게 그는 즉위 전부터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광해군정충신을 시켜서 홍타이지를 반드시 회유하도록 밀명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홍타이지를 지원해주는 것으로 홍타이지를 회유하지만 홍타이지가 다른 형제들과 권력 싸움이 되도록 몰래 이간계를 시행할 것 역시 시켰으며 동시에 후금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빼올 것 역시 시켰다.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기고 있었고 홍타이지를 회유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계획을 지시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몰락하고, 정충신 등이 담당하던 외교 관련 업무들은 거의 모조리 취소되어 버렸다. 홍타이지는 이미 누르하치의 아들 중 한 명일 때도 위험성이 부각되어 광해군이 제일 위협이라 느꼈던 것이다.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해 매우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전혀 그렇지가 않다. 청이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은 것은 최초의 전략적 목표가 명을 치기 전에 후방을 안정하게 위해서였기에 당연히 인조는 퇴위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7] 그나마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8]라는데 애초에 청나라가 도망친 조선 백성들을 적당히 눈 감아준 이유 자체가 나중에 쳐들어 올떄보다 한숨 돌려서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은 속된 말로 삥을 뜯겼지만 명나라처럼 점령당하지도 않고, 한족들처럼 변발로 머리가 밀리는 등 풍습에 변화를 겪지도 않았다는데 애초에 전략적 목표 자체가 명이라는 주목표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니 목적이 당연히 점령이 아니니까 변발을 안 당한 것이다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가 어느 정도 적용이 되었겠지만, 청이 조선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말이 안된다 청이 조선에게 매우 호감을 가져서 한겨울에 심양까지 끌려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들 빼고 도착한 조선 포로들이 60여만 명이나 된다. 고위 왕족들이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려 한 경우는 극소수였으며 대부분 포로 신분으로 첩으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은 청나라인 남편이나 본처들에게 심한 학대를 받아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에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 여인을 학대하는 남편은 처벌하고 조선인 첩을 학대한 본처는 남편 사망시 무조건 순장하도록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조선 여인들의 입장에선 그저 병 주고 약 주기일 뿐이었겠지만 조선 여인들 : 우릴 포로로 끌고 와놓고 이제 와서 법으로 보호해주겠다고?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에서 병력을 요청한 경우도 청이 조선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호란 때 이미 청측에서 조선군의 조총병에 대한 평이 높았다. 그렇기에 조선군을 철저하게 총알받이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일단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예전 중화제국이 관례로 보답하는 하사품도 별거 안내줘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가는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명나라 공격에 원정군을 자비로 파견해야 했다는 점도 엄청난 부담이였다. 실제로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 중에는 나중에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9]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청은 전쟁 직후 귀환할 때도 약탈을 해대서 치를 떠는 기록이 존재하며, 남하시 현지보급으로 초토화된 서북방면 대신 약탈을 피했던 함경도 방면으로 귀환하는 등 계획적으로 강간 약탈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북도 일대의 피해는 가중되었다.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 문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가(媤家)를 다시 찾았는데 인조가 직접 강간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며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사대부들이 무시함으로써 조선의 평판을 크게 깎는 데 기여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성매매를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히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10]

3 작품에서

박씨전을 통해 청태종의 치세 동안 조선시대 당시 병자호란을 다룬 정신승리물 대체역사소설박씨전, 임경업전 등에서도 청 태종을 비하한 묘사는 별로 없으며, 매우 대범하고 유능한 군주로 나오고 있다.[11][12]

  1. 만주식 군주 칭호
  2. 몽골식 군주 칭호
  3. 이에 관해 논란이 있다. 아래 항목 참조.
  4. 유목 민족들이 군주를 가리키는 말인 칸의 만주식 발음
  5. 출처 책 옹정제(저자 미야자키 이치사다) 76쪽
  6. 압카이-아브카이-아바하이
  7. 하지만 백성들이 돌아오려면 돈을 내야 했다 애초에 필요 노동력을 초과하는 60만명이나 되는 조선 백성들을 끌고 갔다.
  8.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속환되는 일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병자호란 후 인조정권의 권력자들이 포로로 잡혀간 본인들 가족들만 빨리 구하기위해 은 수천냥에서 수만냥의 몸값을 치르자 조선인 포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당연히 이런 돈이 없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조선인 포로 주인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9. 실제로 청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이기고 있을 때에도 조선군 조총병의 기량은 상당히 높게 평가한 바 있다.
  10. 그러나 현대 만주족의 입장에선 결코 통쾌한 승리로만 보기는 힘든 게,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만주족이 중원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서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이후 청나라 후기로 가면서 만주족이 점차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가다가 청나라 멸망 후 만주족이 급속도로 한화되어 현재는 거의 사라지기 직전인 비운의 민족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의 패전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약 2~3백년 후 일제강점기를 겪고도 결국 독립에 성공하여, 비록 남북한으로 분단되긴 했지만 중국이나 일본과는 엄연히 별개의 나라가 되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한족에 거의 동화된 현대의 만주족들도 이 점을 부러워하고 있다. 만에 하나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승리하여 청나라가 패전의 여파로 후방안정과 경제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혼란에 빠져 점차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이후 부동항을 찾아 지속적으로 남하정책을 펴온 러시아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면, 만주족들은 끝내 중원을 손에 넣지 못하는 대신 오히려 그 덕분에 한족 문화에 동화될 염려가 없어지면서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현대의 다른 러시아 소수민족들처럼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다가(예를 들어 만주어에 부분적으로 러시아어의 잔재가 남게 될지언정 만주어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 이후 러시아 제국이 점차 쇠퇴할 때 만주족 자신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민족주의를 수용하여 '만주민족주의'를 원동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외몽골처럼 독립하여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거나, 그 뒤를 이은 소련에 의해 계속 지배당하다가 이후 소련 붕괴의 여파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처럼 독립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설령 끝내 독립에 실패하여 계속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남게 되더라도 다른 러시아 소수민족들처럼 자신들의 민족정체성만은 잃지 않았을 것이다. 즉, 차라리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이겼다면 만주족은 강옹건성세의 대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들의 민족정체성만큼은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겠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차라리 현대 몽골인들의 입장에서 자기 조상들이 고려를 굴복시켜 부마국으로 만든 게 더 통쾌한 승리일지도... 비록 지금은 자기 조상들의 신하나라였던 한국에 비해 한참 약소국이지만(부카니스탄보다는 나음) 원나라의 한족 탄압 정책과 몽골문화 수호 정책 덕분에 결과적으로 만주족처럼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지거나 자신들에게 동화되어 사라진 거란족처럼 또다른 유목민족에게 동화되어 사라지지 않고 별개의 나라, 별개의 민족으로 지내고 있으니...
  11. 역시 대체역사소설인 사명대사전에서 사명당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수뇌부를 실컷 농락한 것과 비교해 보자.
  12. 홍타이지가 비록 욕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사대로 섬기는 청나라의 시조이다. 그런 사람을 비판했다가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비판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씨전에서 용골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인물인 타타라 잉굴다이는 대부분 홍타이지의 부하들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것은 아마도 홍타이지에 대한 비판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