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의 난

1627년부터 46년까지 지속된, 명나라를 멸망시킨 그러나 신 왕조 수립에는 실패하고 청나라에 의해 종말을 고한 명 말엽 대규모 농민반란

1 배경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100여년 가까이 누적된 명 제국의 사회질서 붕괴와 변혁, 이에 따른 혼란, 그리고 계속되는 암군의 등장으로 인한 통치체제 약화라고 할 수 있다.

명 제국의 기본적 농촌사회질서는 이갑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 본인부터가 농민 출신으로, 농민반란을 통해 원을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었기에 이상적인 농촌공동체 형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갑제 역시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만 부역과 조세의 의무가 부과되었기에 농민들은 이갑제 체제에서 이탈, 즉 호적을 올리지 않고 유랑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세부담이 과중해지고 다시 유랑민이 늘어나고 이하 무한반복. 더군다나 명 제국 최대의 치욕인 토목의 변, 그리고 북로남왜로 대표되는 이민족의 침략 등에 맞서기 위해 명 제국의 군사비는 급증하기 시작했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올려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명 말기에 이르면 상인과 지주층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 의한 부의 축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자영농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이탈하는 유민들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1505년 정덕제의 즉위를 시작으로 그 이름도 찬란한 명나라 4대 암군, 소위 F4의 기나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덕제는 아바타 놀이 말고는 특별히 암군이라 부를 소지가 없었지만 가정제 치하 45년은 도교 신봉에 빠져 국고를 열심히 축내고 도교를 추종하는 권신이 조정을 좌우하면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로남왜가 본격화되었고 농촌 유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황제가 이 모양 이 꼴이고 조정도 권신이 좌우하니 대책같은 걸 세울리가 있나….

가정제 사후 5년간의 짧은 쿨타임이 지나고 조선에 도움을 준 것 말고는 한 일이 하나도 없는, 명나라 F4에서도 톱을 달리는 만력제 치하 48년이 시작되면서 명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첫 10년은 장거정의 개혁으로 명이 중흥하나 했지만 장거정이 죽자마자 만력제가 신나게 장거정파를 숙청하면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1] 이후 30여년에 걸친 기나긴 업무거부, 즉 파업을 단행하였고 이 시기에 만력 3정으로 대표되는 대외전쟁과 만력제 무덤 공사로 막대한 재정까지 축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1620년대까지 명은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다. 명 중후반기 이후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인, 지주층의 성장으로 늘어나는 재정부담을 어떻게든 줄여주고 있었고, 과거를 통해 유입되는 인재들과 이들이 기반이 된 관료층은 어떻게든 제국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내부 통제에 들어가면서 남왜의 걱정은 사라졌고, 명은 모든 전력을 후금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 위기만 넘긴다면, 어떻게든 명 제국은 되살아날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620년대 중반부터 동북아시아 모든 국가들을 휩쓴 대기근이 닥쳐왔다.[2] 국가별로 시기와 규모는 다르지만 25년~30년에 걸쳐 명, 몽골, 후금,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화북지방의 기근이 극심했는데 1627년 섬서성 일대의 대기근이 결정타였다. 이때의 기근은 유랑민들과 빈농들에게 결정타였고 이들은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 봉기한다. 농민반란으로 건국된 명 제국이 농민반란으로 몰락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조선이 후금에게 연속으로 패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복함에 따라 그나마 후금을 동쪽에서 견제해 주던 세력이 오히려 적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전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 전개

2.1 전반기

1627년 섬서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반란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급료와 식량을 받지 못해 탈영한 군인, 급료를 받지 못하고 실직자가 된 빈민과 전직 관리 등이 대거 가담했다. 이 봉기와 군세가 조직화된 것은 1628년의 일로, 왕가윤(王嘉胤)이 봉기하며 군세를 조직했고, 유력한 지도자 없이 도적떼에 불과했던 각지의 반군들이 왕가윤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1631년 왕가윤이 진압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지만, 이미 반란군에는 유능한 부장급 지도자들이 다수 있었고,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이자성(李自成)이 왕가윤의 뒤를 이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1633년까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며 섬서, 산서 두 성을 차지한 고영상의 군대는 정부군의 진압작전에 한때 전멸 위기에 처했으나 같은 해 겨울에 황하의 결빙을 틈타 산동, 하남으로 탈출하고 반란의 규모를 크게 불렸다. 이후 고영상은 틈왕을 자처하였고, 이를 위협적으로 본 숭정제는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했다.

당시 반란군 토벌의 중책을 맡은 인물은 홍승주(洪承疇)로, 태자태보와 병부상서를 겸임하며 하남, 산서, 섬서, 호광, 사천의 군사전권을 맡을 정도로 숭정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리고 이 절대적 권한을 가진 홍승주는 대군을 이끌고 1635년 위남 전투에서 고영상의 군대를 말 그대로 영혼까지 털어버렸다. 위남 전투의 패배로 고영상의 군세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이듬해인 1636년 섬서순무 손정전(孫傳庭)에 의해 지도자 고영상이 체포, 북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이 무렵 남은 반란군은 수십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고 말 그대로 반란은 끝난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부장급 지도자 중 장헌충(張献忠)과 나여재(羅汝才)는 투항했고, 이자성(李自成)만이 투항을 거부하여 틈왕을 자처하였으나 이자성마저 1638년 동관 전투에서 홍승주와 손정전이 이끄는 진압군에게 참패하여 부하 17명만을 데리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사실상 반란의 명맥이 끊긴 상황에서, 이자성을 구원한 것은 숭정제와 숭정제를 압박한 청이었다. 같은 해 9월, 청의 군대가 금주를 포위했고 숭정제는 반란도 진압되었겠다, 자신이 가장 믿고 신임하는 최고의 에이스 홍승주를 전격적으로 계료총독이라는 대청전쟁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639년 출병시켰다.[3]

그러나 이자성은 아직 살아있었고, 항복한 장헌충과 나여재도 후일을 기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이 전력을 모아 청과의 전쟁에 임하는 동안, 이들 농민반란 지도자들은 하남으로 이동하여 세를 모으고 재궐기한다.

2.2 후반기(1639년~1644년)

이자성 등 반란군 지도자에게 더할나위 없는 이점은, 명의 근본적인 사회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데다 기근까지 계속되어 정부에 불만이 많는 유민들이 하늘처럼 많다는 것이었다.[4]투항했거나 도망친 부하들이 다시 이자성 주위로 결집하고 새로운 유민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이자성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여기에 이암(李岩), 우금성(牛金星), 송헌책(宋獻策)과 같은 지식인 집단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단순한 농민반란군 수준이었던 이자성군은 본격화된 반군조직이자 명을 대신한 새로운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석권한 하남성을 중심으로 부정부패한 관료들을 처벌하고 관아의 재물과 곡식을 백성들에 나누어주면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으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장헌충과 나여재의 군대도 화남 지방으로 진출한다.

1641년은 명나라에게 있어 실로 치욕스러운 해였다. 2월 장헌충군은 대치하던 양사창군의 포위망을 뚫고 호북성 최대의 요충인 양양을 함락하고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였다. 양왕 주익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병부상서 양사창은 이후 홧병으로 숨진다.[5] 직후 나여재는 장헌충과의 불화로 이탈하여 이자성에 합류하지만 결국 이자성에게 죽는다. 이로서 장헌충은 호북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같은 해 이자성은 낙양을 함락한 뒤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준 후 복왕 주상순을 삶아 죽였다.(…) 명 황실에 속한 왕 두 명이 반란군에 잡혀 끔살당한 것이다. 그걸로 부족해 양대 반란세력이 중원 한복판을 차지하며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642년 이자성은 격전 끝에 개봉을 함락시켰고, 1643년에는 좌량옥(左良玉)을 격퇴하고 동관에서 손정전을 전사시키며 1638년 동관 전투 패배를 설욕했으며 상양을 점령하여 양경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상양왕이라 자칭하였다. 같은 해 무창을 함락한 장헌충도 스스로를 대서왕이라 칭하였으며 이후로 이자성군은 순#s-5.2, 장헌충군은 서라는 국호를 쓰며 사실상의 국가체계를 갖추게 된다.

운명의 1644년, 이자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1644년 초 서안을 함락한 이자성은 서안을 수도로 삼는 대순(大順)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칭제하여 황제가 되었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에 맞선 명 왕조에서는 조정 신료들이 남경 천도를 강력히 주장할 정도로 자체적인 방위력이 없는 실정이었는데, 명의 마지막 남은 군사력은 모두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지휘를 받으며 청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숭정제는 남경 천도를 거부했는데 이자성군이 북경에 육박한 상황에서 안전한 천도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북경을 포기할 경우 당시 명의 유일하다시피한 군사력인 산해관의 오삼계군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점이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명 왕조의 유일한 살길은 청이 내부문제로 철군하고, 그 틈을 타 오삼계군이 북경으로 돌아와 이자성군을 격파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1644년 4월 23일, 외성수비를 맡은 태감 조화순(曹化淳)이 투항했고, 이틀 뒤인 4월 25일 자금성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는 자결하고 명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2.3 난의 종결 (1644~1646년)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군은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그동안 엄격했던 규율이 일시에 무너졌고 신나게 약탈을 시작했다. 이는 북경 시민들 및 지식인, 관료 및 신사층들을 적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자성은 숭정제의 내탕금을 빼앗아 부하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자금성을 함락하고 보니 내탕금이 없어서(…) 약탈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 이자성군의 책사 역할을 했던 이암과 우금성간의 갈등까지 일어났다.

한편,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을 멸망시키긴 했지만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자성은 최우선적으로 오삼계를 회유하여 산해관에서 청과 대치하는 현 상황을 유지코자 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이자성의 회유를 거부하고 역으로 청에게 투항한다.

이자성은 청군이 오삼계군에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하겠다는 의지로 출병하여 일편석에서 격전을 벌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으나, 접전의 와중에 청군이 등장하여 대규모 돌격을 감행하자 전세가 크게 기울고 참패하고 만다. 워털루 전투?

이후 이자성은 청-오삼계 연합군으로부터 북경을 지켜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북경을 포기하고 후퇴, 화북 각지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맞서 싸웠으나 여러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사실상 재기불능에 빠졌고, 1645년 6월에 최후를 맞이한다.

한편, 이자성과 행동을 달리했던 장헌충은 촉 지방으로 후퇴하여 역시 결사항전하였으나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배, 멸망당한다.

3 평가

3.1

명 제국이 이자성의 난에서 끝내 패배한 이유는 내부적인 사회모순은 둘째 치더라도 외부의 강대한 적(청)을 맞서싸우며 동시에 내부의 적까지 상대해야 했다는 치명적인 전략적 불리함에 있었다. 당장 오삼계군이 자유롭게 이자성군 진압에 나섰다면 이자성군은 영혼까지 털렸을 것이다. 그 전에, 홍승주를 중간에 소환하지만 않았어도 이자성은 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명의 유능한 장수들이 하나둘 전열에서 이탈한 것도 컸다. 홍승주는 대청전쟁을 위해 차출되었다가 포로로 잡힌 후 청에 귀순했고, 양사창은 후반기 반란군 토벌의 최고책임자이자 최고의 전략가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사망하였다. 양사창 사후 반군 진압에 나선 장수 중 가장 뛰어났고 사실상의 최고지휘권을 갖고 있던 손정전은 숭정제와 조정의 무리한 출병요구에 불리한 상황에서 억지로 출병했다 패하여 전사했다.

3.2 이자성

이자성이 명 왕조를 뒤엎은 이후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펼칠 마스터 플랜이나 비전이 전무했다. 민심의 기대와 정당성의 불충족이라는 그것만으로도 문제가 큰데 문제는 군의 통제를 못해 민심마저 떠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지휘권이 일원화되지 않아 이자성의 순#s-5.2과 장헌충의 서라는 양대 세력이 공존하였다는 건 심각했다. 이는 이자성과 장헌충이 사실상 독립된 세력을 갖게 되면서 벌어진 일인데 때문에 두 세력은 청과 오삼계군의 공세에 개별적으로 저항하다가 각개격파당했다.
  1. 근데 이걸 가지고 만력제를 까기는 좀 뭣 한게, 장거정이 분명 개혁파고, 명 중흥을 위해 힘 쓰기는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개인적인 부정축재 여부는 명대 최고 수준으로 심지어 황제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 인간이 죽기 전까지 만력제가 당한 취급은 그냥 바지사장이었다. 안 그래도 자기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인간이었는 데, 죽은 뒤에 뒤져보니 부정축재로 대저택을 수 십개나 보유하고 있다니 만력제가 빡칠만 했다.
  2. 기근의 원인이 소빙기로 인한 기후 변화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3. 숭정제에게는 불행히도, 그가 가장 믿고 누구보다 신뢰했던 에이스 홍승주송산전투에서 참패 후 포로로 잡혔고, 청의 투항권유를 받아들여 항복하고 한군팔기의 지휘관이 되었다. 숭정제는 홍승주가 전사한 줄 알고 크게 슬퍼하고 대대적으로 제사까지 지내다가 투항 사실을 전해듣고 멘붕했다.(…) 그리고 홍승주는 훗날 청의 중국대륙 침공때 선봉이 된다.
  4. 명나라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다룬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도 극중에서 감옥에 갇힌 내각수보(명나라의 재상직책) 주연유에게 홍승주가 최후의 만찬(+술, 사약)을 대접하면서 나눈 대화중 주연유가 언급한 것이 있다. 청나라의 팔기군이 기세가 대단해도 병력수가 18만명에 불과하니 명나라 곳곳에 있는 오만가지의 성곽을 뚫을 수가 없으나 명나라 내부 섬서, 하남 2개성에만 도적수가 최소 50만-100만이고 병력의 우위가 정부군의 10배가 넘어서 절대 막을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후 극중에서 주연유는 홍승주가 건넨 길상주(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
  5. 책임감이 너무 과해서 자결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아들이 남긴 기록에서는 자결설을 부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