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襄公
(재위 기원전 651년 -637년)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군주이다. 성은 자(子), 휘는 자부(茲父). 춘추오패의 하나.
송환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송나라는 송환공의 즉위 전부터 계속 하극상이 벌어져서 혼란한 상태였고, 송환공도 원래 왕위 계승 서열에서는 매우 순위가 낮았으며 형인 송민공을 죽인 반란을 수습하며 보위를 잇게 되었다.
송양공은 제환공을 이어 패자가 되려는 꿈을 키웠는데, 문제는 송나라가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초나라, 진(晉)나라, 진(秦)나라, 제나라보다는 훨씬 국력이 처지는 2류국가였던 것이다.
춘추시대의 첫번째 패자였던 제환공이 사망하면서 제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제나라 왕자들은 옥좌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패한 제나라 왕자 소는 송나라로 망명하여 도움을 청했다. 송양공은 소를 도와 왕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제효공이다.
송양공은 패자국이었던 제나라의 정변에 개입하여 보위를 결정하는데 한몫하자 스스로 패자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회맹를 소집했다. 그런데 이때, 훨씬 약한 작은 나라인 증나라 군주가 여기에 늦게 오자, 송양공은 증공을 삶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1] 송양공은 이로서 신망을 잃었고, 조(曹)나라 공공[2]은 송양공을 비난하며 그냥 가버렸다.(혹은 말도 없이 달아났다고 하지만 당시 조나라 군사력은 송과 차이가 없었다) 이에 송양공은 군대를 동원해 조나라를 치지만, 조나라도 송에 떨어지지 않은 군사력을 가진지라 6달동안 여럿 작은 전투를 벌이며 대체를 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사실 은 조에게 총력을 다하면 이길지 모르나,당연히 송도 피해가 클테고 춘추전국시대이니만큼, 상대가 약해지면 쳐들어오는 게 일상사이던 시대에 같이 망하는 것뿐이라 힘을 다하지도 못하다가 결국 물러나야 했다.
그럼에도 송양공은 강대국인 초나라, 제나라를 불러 회맹을 열고 회맹의 장이 되어 패자로 등극하려고 했지만, 초나라는 이에 딴지 걸었다.[3] 송양공은 초성왕을 모욕했으나, 도리어 초성왕을 빡돌게 하여 초군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송나라는 신하 목이가 공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고, 초성왕은 송나라의 내분을 조장하기 위해 송양공을 풀어줬다.
송양공은 씩씩거리며 분노하며 돌아왔으나,[4] 목이는 다시 송양공에게 왕위를 순순히 넘겨주었다. 사실 목이가 왕위에 오른 척을 한 것은 송양공을 석방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다. [5]
송양공은 초나라에 한을 품었으나, 강대국 초나라를 건드릴 수 없고, 다만 초나라의 동맹국이었던 소국 정나라[6]를 치게 된다. 초나라는 동맹국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홍수(泓水)에서 초나라와 대치하게 된다.
초군은 강을 건너서 송군을 치려고 했고, 송군은 이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었으나, 송양공은 스스로 패업을 이룬 패자(覇者)이며, 패자는 인의로서 정정당당히 싸워야한다고 고집하며, 재상인 목이와 군사들과 장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초군의 도강을 구경만 했다. [7]
초군이 모두 강을 건너고 제대로 군을 추스려 확실히 싸울 준비가 다 된 다음에야 송양공은 돌격명령을 내렸으나, 강력한 초나라에 송나라군은 대패했고, 자신도 크게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정정당당하게 싸웠으니 후회 없다고 말하다가 목이에게 혼난다. 이런 명분론을 후세사람들은 송양지인이라고 하며 매우 비판했다. 그러나 저 윗말이 거짓은 아니였는지 당시 유랑하던 진문공(중이)이 오자 환대하며 받아들였다. 중이는 송나라의 사정을 깨닫고 바로 송나라를 떠났다. 중이가 떠난지 얼마 안가서 상처가 덧나 사망한다.
이 일화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있는데, 바로 쓸데없이 베푸는 인정을 뜻하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이다.
이렇게 인의를 내세운 명분론 때문에 후세 유학자들의 동정을 받아서인지 춘추오패에 낀 경우도 있었다. 사실은 송양공은 다른 패자들과는 달리 진정한 패업을 이룬바 없고, 그저 회맹을 주최하고 잠시 맹주를 맡았을 뿐이었지, 송나라는 제환공이나 진문공, 진목공과 같은 업적을 이룬바 없었다. 그저 유학자들, 명분론자들에게만 동정을 받을 뿐이지 중국 역사 많은 기록에서도 천하의 둘도 없는 얼간이라는 투로 패자는 커녕 암군자라고 신나게 까였다.사마천도 사기에서 군주의 자질이 없다며 차라리 재상 목이가 패자가 될 인재라고 평가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윗문에 반론이 있는데 애초에 송나라는 중상 수준의 국력이 한계인 외래 민족국가 라는것이다.
게다가 송양공은 즉위 내내 성군이라 불리며 찬양받았으며,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제나라와 송나라의 위기를 단숨에 안정시키는 내치의 업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게다가 송양공의 악행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묘사된 점도 없잖아있다, 위에서 깠다는 사마천도 잘 사기 내에서 송앙공을 인의있고 덕있는 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 사마천은 양공은 인덕도 좋고 정치도 잘했기에 명군으로 좋았지만 이렇게 전쟁에서 너무 개폼잡다가 말아먹고 나라 멸망시킬뻔했다고 깠다.- ↑ 그러나 이에 대하여 양공이 바보가 아닌한, 아니 막대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 아닌한 중상급 수준인 송으로서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이래봐야 다른 비슷한 나라들에게 송나라만 무시당하는데? 정확한 거 맞나? 라는 분석도 중국에서 오랫동안 있었다.
- ↑ 고우영 십팔사략을 보면 촐싹맞게 나와서 진문공이 목욕하는 걸 체신없게 보다가 문공이 무시하고 떠난 뒤 패자가 되어 나중에 혼쭐 좀 내주었다고만 나오는데 그렇긴 해도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다.
- ↑ 초나라는 성왕은 왕을 자칭하고 있었지만, 천자국인 주나라로부터 받은 작위는 공도 아닌 자(子)에 불과했다.
- ↑ 실제로는 양공은 체념하고 타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 ↑ 목이는 양공의 배다른 형제였다. 목이가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는지, 원래 양공은 즉위하기 전에 목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둘간의 신의는 매우 굳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당시에는 힘없는 소국이지만 춘추전국시대 초기에는 정신적인 큰 형님 나라이던 주나라에게 인정받은 강대국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여러 전투에서 패하고 땅도 팍팍 줄어들었기에 같은 시대를 그린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간단하게 동네북으로 그려 두들겨 처맞는 그림을 그렸다...
- ↑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는 반론이있다. 자세한건 문서 하단을 참조